00119 그룹의 선택 =========================================================================
500억 달러의 대박을 터트린 후, 한서진은 일약 학교 대스타가 되었다. 학생들이 선망의 눈으로 보는 것은 물론, 교수들까지 은근히 상전 취급을 해주며 눈치를 본다.
500억 불.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의 가치는 나이와 신분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이 있었다.
덕분에 한서진은 수업을 들어가는 게 고역이었다. 전공 수업은 그나마 좀 나은데, 교양 수업에 들어가면 타학과 학생들이 난리가 났다.
“저 사람이야?”
“응, 500억 불의 부자래.”
“와, 그럼 어느 정도야?”
“개인으로는 우리나라 최고 부자일 걸? 진성그룹 이창용 회장도 공개 재산이 5조 원이 안 되잖아. 게다가 저 사람은 전부 다 현찰이래.”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번 거야?”
“저번 이과 박람회 때 무슨 반도체 기술 하나 공개했는데, 그 자리에서 석유 재벌이 500억 달러 주고 사갔대.”
“대박, 진짜 대박.”
“저 오빠, 10억인가 하는 포르쉐 타고 다니잖아. 아까 오다 본 은색 2인승 오픈카 그거.”
“아, 그게 저 오빠 차였어? 완전 대박.”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온 방향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한 번 말을 걸고 싶지만, 값싸게 보일까 봐 그러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절절하게 느껴진다.
한서진은 모른 척 태연히 태블릿 PC를 꺼냈다. 정지원이 보낸 보고 이메일을 열었다. 알파벳과 숫자로 가득 찬 전자 문서가 쏟아져 나왔다.
그걸 일일이 읽어보며 전자서명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하나 봐.”
“영어 되게 잘하나 본데. 그냥 막 술술 읽고 있네.”
“완전 멋있어.”
최고 대학이라는 한국대 학생이면서 영어 하나 가지고 왜 저리 감동받는단 말인가. 한서진은 내심 이 상황이 우스웠다.
교수가 들어와서 출석을 불렀다. 한서진 차례가 되었다.
“한서진.”
“예.”
40대 남교수는 놀라서 눈을 들었다. 얼마 전 500억 불이라는 초대박을 터트린 학생, 좀처럼 수업에 나오지 않던 인물이 나왔으니 놀란 것이다.
“아…… 오늘 웬일로 나왔나요?”
“수업 들으러 왔습니다만.”
“그, 그렇군요.”
수강 학생한테 왜 수업에 나왔냐고 묻다니. 본인도 민망했는지 남교수는 헛기침을 했다.
“가, 강의 시작하죠.”
교수는 곧장 수업을 시작했다.
한서진은 편안한 마음으로 듣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교수의 목소리가 어딘지 딱딱하게 경직돼 있다고 할까. 마지막에 들었을 때는 강의 스타일이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심지어 3시간을 꽉 채워서 했다. 분명 2시간 10분 이상 수업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루한 수업이 겨우 끝났고,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정리하는데 문득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한서진은 그대로 강의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데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쳐다본다. 사진이 실린 적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것인지 신기했다.
한서진은 학교 반도체 연구소를 들렀다.
“교수님, 진성전자 쪽은 이제 거리를 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너만 믿고 따라오라 이거냐? 역시 500억 불은 무섭구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조만간 진성전자 주가가 박살 날 일이 있어서요.”
“뭐야? 지금도 많이 떨어졌는데, 거기서 또?”
“그럴 이슈가 곧 생길 거라서요.”
한서진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SJ인더스트리에서 한창 생산 중인 코카 스패니얼은 아직 충분한 물량이 비축되지 않았다. 그래서 발표를 미루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코카 스패니얼을 발표하는 순간, 진성전자의 주가는 곤두박질 칠 것이다. 메모리 산업마저 무너진다면, 진성전자는 더 이상 반도체 사업을 지속할 수 없으니.
코카 스패니얼 발표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제 시기만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혹시 진성그룹 쪽 주식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파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의미심장한 조언에 박효산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오래 전에 다 팔았다. 진성 쪽은 쳐다도 안 봐.”
학교를 나와 사무소로 향하던 도중 한서진은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이서나의 비서실장, 김준혁이었던 것이다.
그는 재벌 회장을 대하듯 몹시 정중한 말투로, 이서나가 꼭 한 번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했다. 거절하기 미안할 만큼 매우 간곡한 태도였다.
크게 거절할 이유도 없던 한서진은 가볍게 말해보았다.
“정 그리 보고 싶으시다면, 오늘이라도 뵐까요? 마침 제가 저녁에 시간이 나는데.”
당연히 안 될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인데, 대답은 의외였다.
「그렇다면 저녁에 일정을 잡겠습니다. 편하신 시간과 장소가 있으신지요?」
“아, 오늘 바로요?”
「네. 저희 대표님은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와서 말을 무르기도 애매해서, 한서진은 적당히 저녁 약속을 잡았다.
사무소에 도착한 그는 살짝 놀랐다. 송하나가 와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각선미가 드러나는 검은색 스키니진에 분홍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터질 듯한 볼륨감에 눈을 어디에 둘지 곤란해 하며, 한서진은 조금 떨떠름해서 맞이했다.
“말도 안 하고 왔네요. 오늘은…….”
“수업이 끝나서요. 그래서 놀러 왔어요.”
“근데 전 바로 나가봐야 하는데. 약속이 생겨서요.”
“약속? 혹시 데이트하세요?”
천진스럽게 묻는 말에 한서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진성그룹 계열사장 만나기로 했어요.”
“진성그룹이면, 누구요? 제가 아는 분일 수도 있겠는데.”
“이서나 사장님이라고, 이창용 회장님 장녀라고 하던데.”
“아, 서나 언니 만나시는구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언니란 호칭에, 한서진은 새삼 그녀가 재벌 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빤히 바라보던 송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지금 그 차림으로 바로 가시려고요?”
“네? 안 되나요?”
“흐응…….”
송하나는 뒷짐을 진 채 한서진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치 품평을 하는 듯한 기세에 그는 조금 어색했다.
“괜찮으시면, 제가 코디 좀 해드려도 되나요?”
“코디?”
“이러고 가면 그 언니 내색은 안 해도 속으로는 우습게 봐요. 안 그래도 오빠를 세상 물정 모르는 벼락횡재 대학생 취급할 텐데, 더더욱 우습게 보이면 안 되죠.”
“하나 씨는 이서나 사장님을 잘 아나 봐요. 잠깐, 근데 방금 저를 뭐라고…….”
“한 대표님,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 그럼 부탁할게요.”
송하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잘랐고, 엉겁결에 한서진은 송하나와 함께 백화점에 가게 되었다.
‘분명히 오빠라고 불렀는데, 그냥 실수였나?’
한서진은 조수석에 송하나를 태우고, 그녀가 알려준 뉴월드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차안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도 기사 봤어요. 특허 대박 내셨다면서요.”
“아, 봤습니까?”
갑자기 입맛이 씁쓸해진다. 혹시 그녀가 이러는 것은 그것 때문이었나, 하고.
그러나 송하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서나 언니가 보자고 한 것도 그거 때문이겠네요. 용무 아저씨랑 경영권 다툼하고 있으니까, 오빠를 끌어들여서 이기려고 하는 거 맞죠?”
“……여고생 맞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그쪽 집안하고 좀 친하니까요. 사정은 대강 알죠. 그럼 서나 언니는 오늘 확실히 끝을 보려고 하겠네요.”
송하나는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었다.
“전투 준비 단단히 하고 가셔야겠어요. 제가 코디 잘해드릴게요.”
차가 적신호에 걸려 멈췄다. 한서진은 문득 천천히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하나 씨는 요즘 왜 이렇게 저를 자주 찾아오나요?”
“…….”
“혹시…….”
뭐라 말하려는 찰나 송하나가 바로 자르고 들어왔다.
“처음부터 줄곧 궁금했거든요. 어떤 분이기에 아빠가 그렇게 친근하게 대하는지.”
“…….”
“우리 아빠, 저한테는 다정하지만 사실 정말 무서운 분이세요. 그런데 오빠하고는 같이 밤늦게까지 술도 마시고 그러시는 게 신기했어요. 아빠한테 그런 사람 없는데.”
“…….”
“몇 번 이야기 나눠 보니까 저도 아빠가 왜 호감을 가지는지 알 것 같아서요. 오빠 같아서 편하기도 하고요. 전 오빠들이 하나같이 오빠 같지 않거든요.”
어쩌면 상처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쾌활하고 덤덤하게 늘어놓는다. 그 모습에서 한서진은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 여고생이 설마 500억 달러 때문에 그러겠어? 그러고 보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찾아왔었잖아?
“대표님 같은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 많이 했거든요. 제가 배다른 오빠들한테 구박을 워낙 많이 받아서요.”
“그랬군요.”
“저, 오빠 동생해도 되나요?”
한서진은 여기서 조금 망설였다. 송하나가 친해지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오빠 동생으로 선을 딱 그어야 한다는 것에 왠지 본능적인 거부감이…….
‘내가 미쳤나 봐. 어린애를 두고 무슨 생각을.’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어 잡념을 떨쳐낸 한서진은 쾌활히 웃으며 끄덕여줬다.
“그래요. 동생해도 됩니다.”
“그럼 이제 말 놔주세요. 동생한테 존대하는 오빠는 없잖아요.”
“……알았어. 이제 말 놓을게.”
“전 계속 존대할게요. 거리 두려는 게 아니라 예의 지키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예쁘게 봐주세요.”
상냥하게 눈웃음을 치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고생이다. 한서진은 마음을 놓았다. 그래, 이렇게 싹싹한 여자애가 설마 딴 생각으로 접근하겠어?
어느덧 백화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둘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는 매장이 있어?”
“네, 제가 자주 가는 매장이 있어요. 근데 오빠, 부자잖아요. 그쵸?”
“부자……. 이제 부정은 못하겠네.”
“그럼 제 마음대로 골라도 돼요? 오빠한테 어울릴 만한 것들 잘 아는데, 쬐에끔 비싸요.”
“괜찮아. 코디는 너한테 맡기기로 했잖아.”
한서진은 선선히 승낙했다. 얼마 전에 입금 된 500억 불 덕분인지 마음이 편안했다. 사실 액수만으로 치면 대한민국 제일가는 부자 아닌가?
송하나는 그를 명품관으로 이끌었다. 으리으리한 인테리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서진은 은근 기가 죽었지만, 가슴을 당당히 폈다.
“어서 오십시오.”
송하나가 안내한 곳은 처음 들어보는 매장이었다. 아니, 유명한데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맞으리라.
“여기 옷이 참 예뻐요. 오빠한테 잘 어울릴 거예요.”
송하나는 옷을 고르는 게 즐거운 듯이 보였다. 한서진도 어느덧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사실 명품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그냥 옷에다가 0 몇 개 더 붙여서 파는 것뿐이지. 동네 시장과 똑같은 옷가게일 뿐이다.
옷을 여러 번 입어볼 필요도 없었다. 송하나는 능숙하게 몇 벌을 골라내고는, 가장 어울릴 만한 옷을 대번에 선택했다. 그래서 한서진은 두세 번만 입어보고 바로 살 수 있었다.
‘여자들은 쇼핑할 때 기본이 세 시간이라던데.’
정장과 구두, 시계까지 해서 풀세팅을 하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숨이 턱 막힐 가격이었지만, 한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긁을 수 있었다.
“됐다, 되게 잘 어울려요. 역시 옷이 날개라니까.”
송하나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작품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대학생처럼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일까. 그녀의 몸짓에서는 평소의 차분함 대신 싱그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때였다.
“어, 송하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말끔한 양복을 입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였다.
“어? 오빠.”
송하나는 그를 보고 반가워했다. 한서진은 이상하게 그 모습이 기분 나빴다.
남자는 반가워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쇼핑하러 왔어? 그럼 말을 하지. 내가 매장 직원들한테 잘 말해놓을 텐데.”
“그냥 폐 안 끼치려고 조용히 샀어요.”
“남자친구랑 같이 온 거야?”
갑자기 급격히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점심에 먹은 게 조금 잘못된 모양이다.
송하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친구는 아니구요, 친하게 지내는 오빠예요. 서로 인사하세요.”
“한서진입니다.”
“반가워요. 하나가 남자랑 쇼핑하는 건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네요. 정준석입니다.”
순간적으로 한서진은 흠칫 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정준석 씨라고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혹시 한지혜라고 아나요?”
정준석의 눈빛이 불현듯 차가워졌다.
“당신이 지혜를 어떻게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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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금니콱깨물어라 각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