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8 송하나 =========================================================================
둘은 녹색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 카페를 찾았다. 마침 카페 내부는 조용했다. 손님이 몇 있었지만, 모두 노트북을 하거나 독서에 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둘은 적당한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한서진은 몰래 송하나의 얼굴을 살폈다. 과하지 않은, 옅은 화장기가 느껴진다. 화장 같은 거 하나도 안 하는 게 오히려 훨씬 예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합이라.’
또렷이 보이는 적합 판정. 이것이 의미하는 게 뭘까? 여자친구로서 합격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배우자로서 합격이라는 뜻인가.
‘통찰안, 너도 남자구나.’
송하나는 들고 있던 손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비싸 보인다. 재벌 회장 딸이니, 아마 명품 같은 것을 들고 다니지 않을까.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느꼈던, 도도한 분위기가 한결 연해진 듯했다.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뭘요.”
“제 패션 스타일이 조금 독특하지요?”
갑자기 송하나가 찌르듯이 물었다. 한서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은데요. 자기 스타일에 어울리게 옷을 잘 입는 것 같아요. 지금도 굉장히 잘 어울려요.”
“저, 안 꿇고 2학년인데. 이게 잘 어울린다면 늙어 보인다는 말씀이시네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한서진은 조금 당황했다. 늙어 보인다니, 절대로 그런 생각은 가진 적이 없다.
물론 겉보기에 그녀는 이십 초반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차분하고 사색적인 분위기 때문에 성숙해 보인다는 의미지, 늙어 보인다는 것은 아니었다.
“농담인데 되게 당황하시네요. 저도 제가 성숙해 보이는 건 알아요.”
송하나는 방글거리며 팔짱을 끼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넘치는 볼륨감이 한층 더 강조되어, 한서진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그래서 이런 옷을 더 선호하는 것도 있고요. 제 친구들이 주로 입는 스타일은 저한테 별로 안 어울리더라고요.”
“그, 그러시군요. 나름 고충이 많으시겠어요.”
“키가 커서 조금 고민이긴 해요. 남자들이 키 큰 여자 별로 안 좋아한대서.”
“키 큰 여자 좋아하는 남자도 많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
“그런가? 한 대표님은 그럼 키 작은 쪽은 별로 안 좋아하세요?”
“저야…….”
사실 한서진은 원래 아담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쪽이었다. 최근 겪은 ‘어떤 일’ 덕분에 그 생각이 지금은 180도 바뀌었지만. 비에 젖은 교복이라든가.
“생각해보니 저도 키 큰 쪽이 더 좋은 것 같네요.”
“어머, 그러시구나.”
“그래도 저보다 큰 건 좀…….”
“한 대표님도 키 크시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는 꽤 크신 것 같은데.”
한서진은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177입니다. 큰 건 아니죠. 요즘 남자들 183은 넘어야 키 크다 소리 듣는 거 같더라고요.”
“상당히 크신데요? 저보다 7cm나 커요. 제가 170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전 180 넘으시는 줄 알았는데. 제가 지금 10cm 힐 신었는데도 저보다 눈높이가 높으셔서요.”
“요즘 구두는 깔창이 좀 있더라고요.”
한서진은 뭔가 대화 흐름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생각한 그녀의 방문 용건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적어도 그룹이나 반도체, 하다못해 백철중 회장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어느덧 커피까지 앞에 놓은 채 대화가 이어졌다.
“공부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저 요즘 공부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어요.”
“공부가 잘 안 되시나 봐요.”
“네, 그래도 좋은 대학은 가야겠는데…… 공부가 정말 힘들어요.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이해도 어렵고. 특히 수학이 너무 어려워요.”
“저런…….”
“어디 좋은 과외 선생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송하나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한서진은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여고생에게 해선 안 될 말이지만, 슬쩍 보인 붉은 혀가 심장을 제대로 저격했다.
“그런데 송하나 학생은 왜 어머니 성을 따른 건가요? 회장님과 서먹한 사이 같지는 않던데.”
“근데 언제까지 저를 송하나 학생이라 부르실 거예요?”
대답 대신 반문이 돌아오자 한서진은 난감해졌다. 그럼 학생 말고 다른 호칭이 있어?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말도 편히 해주시고요. 저보다 오빠잖아요.”
“아니, 오빠라고 하기에는 좀…….”
“겨우 7살 차이인데 오빠죠. 이름 불러주시고, 말 편히 놔주세요.”
말을 편히 해달라니. 그것은 왠지 낯설다. 그랬다가는 백철중 회장이 야구 배트를 들고 쫓아올 것 같다.
“회장님 체면도 있는데, 말 놓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대신 하나 학생이란 말이 어색하다면, 앞으로는 하나 씨라고 부를게요.”
“……뭐, 그러죠. 일단은.”
송하나는 뭔가 아쉬운 눈치였지만, 선선히 넘어갔다.
팔짱을 낀 채 그녀는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천천히 다리를 꼬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요염함을 뿜어낸다. 아무리 봐도 고교생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한서진은 스타킹을 신지 않고 치마가 조금 더 짧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망측한 상상을 했다가 얼른 지워버렸다.
‘쟤는 여고생이야. 회장님 딸이야. 경쟁사 후계자야…….’
한서진의 복잡한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하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 만나보셨죠.”
“아, 네. 그때 봤습니다. 비 오던 날…….”
“아, 저 비 맞고 홀딱 젖어서 들어온 날이요?”
“그, 그렇긴 합니다만.”
뭔가 표현이 위험하게 들리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진짜로 위험한 건 자신이 낀 색안경인지도…….
“저희 어머니, 혹시 모르시겠어요?”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한서진은 어리둥절했다. 송하나는 조금 서운한 눈으로 보다가 말을 이었다.
“엄마 알면 섭섭해 하시겠네. 그래도 왕년에 엄청 잘 나갔던 여배우시거든요. 대상도 받았었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전 14살까지 아빠가 H그룹 회장님인 것도 몰랐어요. 엄마와 둘이서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4년 전에 아빠 집에 합가한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도 제가 회장님 딸인 거 몰라요.”
“…….”
“이건 비밀인데, 두 분 서류상으로는 부부가 아니에요. 재혼할 때 유산 문제 때문에 온 가족들이 들고 나서서 반대했다 들었어요. 아빠도 어쩔 수 없이 물러 났구요.”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한서진은 한편으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벌 집안이니 유산 갈등도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지 않을까?
송하나는 밝은 미소를 짓고 물었다.
“저 좀 안 됐나요?”
“미안합니다. 송하나 학생한테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전 그냥 엄청 늦둥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나 씨. 송하나 학생 말고요.”
“아, 하나 씨.”
“그래도 아빠가 돈이 많아서 안 된 것보다는 좋은 게 훨씬 많아요. 엄마도 자상한 편이고. 사실 이 정도면 엄청 행복한 인생이죠.”
세 시간쯤 족히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송하나는 화술이 좋은데다 성격도 밝고 사근사근했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차갑고 딱딱할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싹싹하고 맑았다.
“아, 저 이만 가봐야겠어요. 숙제가 밀려 있어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해요.”
“그래요. 오늘 재미있었습니다.”
“네, 저도 즐거웠어요. 또 놀러올게요.”
“그러세요.”
뭔가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한 것 같은데?
카페를 나서자 자연스럽게 세단이 다가와서 그들의 앞에 섰다. 송하나의 개인기사가 끌고 온 차였다. 그녀는 뒷문을 열고 차에 탔다. 그리고 내려간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또 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나 씨.”
학생이라 부르지 않은 게 흡족했을까. 송하나는 방긋 웃어 보였고, 차가 곧 출발했다.
머쓱하게 서서 바라보던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근데 물어보고 싶다고 한 게 뭐였지?”
왜 안 물어보고 시간만 때우다가 갔을까?
이용무는 요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H반도체가 SJ인더스트리에 사실상 넘어갔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5nm공정 원천특허는 ADSC에 넘어갔고 말이야. 거대 석유 자본의 손에.”
“…….”
최만재 이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어특허를 준비하는 등 진성전자가 준비했던 공작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원천기술의 주변 응용기술을 선점해서 공격한다는 것도 통하는 상대가 있지, 끝없는 돈을 가진 아랍 재벌에 그런 게 통할 리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반격에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수가 있었다.
UAE 대통령의 친동생을 적대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50조 원이라니…….”
이용무는 이천억을 제시한 후 결국 기술을 넘길 것이라 확신하며 여유만만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유가 깨진 건, 한국대학교 박람회 첫날 벌어진 즉석 경매 때문이었다.
무려 150억 달러까지 입찰액이 나온 첫날 경매, 이용무는 그때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원천기술은 500억 달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에 넘어가버렸다.
싫어도 인정해야 했다. 이제 상대는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25살의 나이에 500억 달러의 현금을 쥔 부호 아닌가. 이제는 이용무 자신보다 훨씬 부자였고, 500억 달러면 그룹 전체를 흔들어놓기에도 충분했다.
“이젠 얕은 수가 아니라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할 인물로 등극하셨군.”
“…….”
틀린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천억이란 헐값을 제시한 것에 느끼고 있을 불쾌감을 해소해줘야 한다. 앞으로 진성그룹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우호 세력으로 붙잡아야 한다.
이용무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약자에게 부탁하는 것은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강자에게 웃어주는 것은 당연한 법칙이니까.
상대는 널리고 널린 약자에서, 이 나라를 움직일 수도 있는 힘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당연히 환대를 해줘야 하리라.
이용무는 비서실장을 불러 지시했다.
“조만간 그 친구와 약속을 잡으세요.”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이용무는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아주 정중하게 부탁하세요.”
헬스장을 방불케 하는 넓은 운동 공간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런닝머신 위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넓은 공간을 혼자 차지한 채 운동에 열중했다.
제법 잘 빠진 탄탄한 몸매를 가졌지만, 눈가에 남은 세월의 흔적은 숨길 수가 없다.
양복을 입은 비서가 정중히 옆에 와서 섰다.
“대표님,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이서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듣고 있어요. 말하세요.”
“백세완 실장은 백철중 회장님의 눈 밖에 벗어나 가문에서 완전히 내쳐진 것 같습니다. 그룹에 관한 모든 권한을 회수하고,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
“좌천인가요?”
“일시적인 좌천이 아니라 영구 축출인 것 같습니다.”
“백 회장님이 대체 뭐 때문에요? 죽은 동생 아들이라고 그렇게나 예뻐하셨으면서.”
“한서진 그 친구한테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임시주총에서 H그룹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요. 그 때문에 백철중 회장님이 크게 분노하신 듯합니다.”
“백 실장이 실수했네요. 이제 어엿한 500억 달러 자산가인데 그런 사람에게 실수를 저지르다니. 쫓겨날 만하겠어요.”
백세완이 쫓겨난 것에 대한 유감이나 걱정은 없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다.
“부회장님이 한서진 그 친구에게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서나는 런닝머신을 정지했다. 서서히 줄어드는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걸으며, 그녀는 차갑게 내뱉었다.
“그건 안 되죠.”
“어떡할까요?”
“먼저 약속을 잡아요. 내 쪽으로 끌어들여야겠어요.”
============================ 작품 후기 ============================
일일 2연참을 무사히 사수했습니다...하악.
그리고 연애파트는... 별로 넣지 않을 생각입니다. 애초에 리미트리스 드림은 연애라인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아서요.
히히, 오늘도 쌰장님들이 보우하사 딱지 두 장씩 동냥해갑니다.
ps : 송하나 일러스트는 [작품설정]에서 언제든지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