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7 송하나 =========================================================================
H반도체는 경영진 교체 절차를 마쳤다.
새 경영진은 재벌가와 크게 상관이 없는 전문 경영인 위주로 구성되었다. 아직 빈자리가 더러 있지만, 사업 운영에 필요한 수는 갖추었다.
H그룹은 입김이 닿는 인물들을 이사진에 밀어 넣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S드론에 절대 밀려선 안 된다.”
사모펀드 S드론은 기업 합병이라는 1차 목적을 달성했다. 이제 자신들의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사를 심기 위해, H그룹은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S드론이 꽂은 신임 경영진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H반도체! SJ인더스트리의 파운더리 계약 수주!」
「슈나우저, 메이드 인 코리아!」
「H반도체, 기사회생하나?」
신임 사장, 한국계 미국인 케이단 리는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SJ인더스트리의 수주를 따왔다. 그 물량이 자그마치 1억 개였다.
개당 제조비용이 50달러이니, 50억 달러짜리 계약을 가져온 것이다.
이 뜻밖의 소식에 증권가는 일시에 멍해졌다.
많은 이들은 S드론의 합병 목적이 투기 수익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H반도체는 철저한 기피주였다. 임시주총 전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주가는 해임안 통과 이후로 끝없이 떨어지기만 했다.
때문에 파는 사람만 있고 사는 사람은 없는 주식이었는데, 50억 달러짜리 계약을 따오다니.
그것도 일시적인 매출이 아니다. 슈나우저로 비메모리 반도체의 황제로 우뚝 선 SJ인더스트리의 위탁생산 계약이다.
파운더리 능력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H반도체. 그리고 슈나우저. 이 둘의 결합에 국제 증권가는 크게 술렁였다.
H반도체 호가는 급기야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사려는 사람만 있을 뿐, 파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이미 누군가가 싹쓸이라도 한 것처럼, 증권 시장에 물량 자체가 풀리지 않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들 하는 겐가?”
나지막하지만 분노가 실린 음성. 노기 가득한 백철중의 얼굴에 임원들은 쩔쩔맸다.
두 주먹 하나로 지금의 H그룹을 쌓아올린 인물. 그런 이가 뿜어내는 분노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H반도체 주식을 다 팔았다고? 내 승인도 없이?”
“백호진 사장님의 지시였습니다.”
차남이 언급되자 백철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특하고 경영능력이 뛰어나 H자동차 사장을 맡긴 아들이다.
그런데 H자동차가 보유하고 있던 H반도체 주식 15%를 전부 팔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임시주총 직후 한꺼번에.
“호진이 녀석은 대체 언제 오는 거냐!”
백철중이 또다시 성을 냈다.
그때 백호진 사장이 도착했다. 그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머리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네 이놈! 누가 H반도체 주식을 팔라고 했느냐! 반도체가 우리 그룹의 미래거늘, 어찌 그리 경솔히 처분한단 말이냐!”
백호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S드론의 기업공작이 성공한 후, 백호진은 H반도체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생각하고 빠르게 보유 주식을 처분했다. 아버지 역시 자신과 같은 뜻일 거라 생각했다.
이미 우호 주주들도 손을 털고 처분을 시작하지 않았나. 더 쥐고 있어봐야 결국 쓰레기가 될 주식이다.
S드론은 다른 사모펀드가 그러했듯이, 알짜배기 재산만 빼먹은 뒤 유유히 빠져나갈 테니까.
그런데 그 반대가 일어났다.
주식을 처분하자마자 1억 개의 슈나우저 위탁생산 계약을 수주한 것이다. 그것도 S드론이 심어 넣은 신임 경영진이!
백호진은 부랴부랴 H반도체 지분을 다시 사들이려 했지만, 이미 시중에는 물량이 씨가 말랐다. 다른 우호 주주들도 똑같은 입장이었다.
백철중은 길게 탄식하더니 물었다.
“현재 그룹이 보유한 H반도체 지분은 얼마인가?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약 5.3% 정도입니다.”
“우호 지분은 얼마나 되지?”
“그게…… 0%입니다.”
“뭐? 그 많은 백기사들이 벌써 손을 털었단 말인가?”
백철중의 노기에 비서실장은 마치 자기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탄식을 거듭하던 백철중이 심각히 입을 열었다.
“개미들이 소화 가능한 물량이 아니다. 그 많던 우호 지분이 처분됐다면 분명 사들인 세력이 있을 텐데, 그게 어딘가?”
“그것이…….”
“S드론인가?”
“그렇습니다, 회장님.”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정말 들어맞을 줄이야. 백철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S드론이 알맹이만 빼먹고 사라질 놈들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지만, 경영권을 가져오기는 더욱 요원해진 것이다. 이대로는 H반도체에서 S반도체로 이름이 바뀌게 생겼다.
“그럼 저들의 지분은? 우호 지분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하게.”
“우호 지분은 이번에 주주총회에서 S드론의 편을 든 P보험을 포함해 약 18%입니다. 그리고 어제부로 금융감독원에 신고 된 S드론의 단독 보유량은…… 51%입니다.”
“뭣!”
51%라는 말에 백철중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이건 사실상 H반도체가 S드론의 소유이며, 그룹이 H반도체 경영에 개입하는 게 불가능해졌음을 뜻한다.
아무리 주가가 땅을 쳤어도, 1주에 20만 원이 넘는 대형주다. 그런 회사의 지분을 51%나 긁어모으다니, 그런 돈이 대체 어디서 났단 말인가.
「어차피 제1해외공장으로만 쓸 거니까 51%면 충분하다고 봐. 굳이 더 실탄을 쏟아 부을 필요는 없지.」
“그렇군요.”
「납품가는 가혹하게 책정할 생각이다. 어쨌거나 100% 우리 소유가 아니니까, H반도체에 높은 마진을 줄 이유가 없지.」
“그래도 연간 몇 억 개씩 찍어내면 엄청 남겠는데요.”
「주주 배당은 거의 하지 않을 생각이다. 기름 낀 돼지들에게 먹이를 줄 필요는 없지.」
정지원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가 외국인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아, 하긴 이제는 어엿한 미국인인가?
S드론은 에스코너가 설립한 사모펀드였다. 에스코너가 100% 한서진의 것이니, S드론도 결국 한서진의 것이고, 나아가 H반도체도 한서진의 소유가 된 것이다.
비록 51%뿐이지만, 주식 시장에서 그만한 지분이면 실질적인 사주라 할 수 있다.
‘이거 기분이 참 묘하네.’
작년에 말단 직원으로 들어간 회사가 불과 일 년 만에 자기 소유가 되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감개가 무량했다.
「이름만 H를 달고 있지, 실질적으로는 이제 H그룹 계열사라 할 수가 없지. 회장 일가를 다 합쳐도, 그쪽이 가진 지분은 5.3%가 전부니까.」
“H그룹 우호 주주들이 그렇게 빨리 주식을 처분할 줄은 몰랐어요.”
「그들도 멍청이들이 아니니까, H반도체가 회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거지. 덕분에 편해졌다. H자동차 사장은 지금쯤 자기 아버지한테 엄청 깨지고 있을걸.」
정지원은 그게 즐거운 듯이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일이 잘 풀리면 진성전자 반도체 사업도 어쩌면 인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용무 부회장이 부디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할 텐데.」
“돈이 엄청 들 텐데.”
「걱정하지 마라. ADSC가 입금한 500억 달러 덕분에 자금은 매우 풍족해.」
“돈은 제 건데 쓰는 건 팀장님이군요.”
「쓰는 건 난데, 명의는 너지.」
웃으면서 통화하고 있는데, 어느덧 차가 사무소에 도착했다.
그는 오늘 한지혜에게 사준 레인지로버를 타고 왔다. 포르쉐는 한지혜가 오늘 하루만 타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어서 잠시 빌려줬고.
사무소에 들어서는데 공기가 묘했다. 의아해서 고개를 든 한서진은 접객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뒷모습을 보니 여자였다.
“아, 대표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하정태가 쑥스럽게 맞이했다. 그는 사석에서는 편히 대하지만, 외부인이 있는 곳에서는 깍듯하게 고용주 대접을 했다.
“손님? 누구…….”
의아해하는데 여자가 이쪽을 돌아봤다.
손님은 바로 송하나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송하나 학…….”
‘학생’이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그는 멈췄다. 송하나는 누가 봐도 커리어 우먼으로 보일 법한 반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성숙한 얼굴에 서구적인 몸매, 그리고 복장까지. 누구도 그녀를 여고생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송하나를 차분히 바라봤다.
「적합.」
또렷이 보이는 적합 반응. 비록 미성년자지만 지금까지 봤던 여자 중에서 유일하게 적합이 뜨는 여자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스무 살만 됐어도 어떻게 찔러볼 여지가 있을 텐데. 심지어 이런저런 일로 얽힌 백철중 회장의 막내딸 아닌가.
불현듯 그녀의 지난 여러 모습들이 머리를 스쳤다. 오프 숄더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어깨, 비에 흠뻑 젖은 몸의 굴곡, 그리고 조수석에 앉았을 때 힐끔 보였던 쭉 뻗은 각선미.
성격은 잘 모르지만, 그녀의 미모와 몸매는 남자라면 끌릴 수밖에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그래서 여러 장애에도 불구하고 끌리고 있지 않은가.
“여기는 어쩐 일로 왔나요?”
“그냥 한 대표님께 여러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잠깐 시간 내줄 수 있나요?”
“시간……. 그러죠.”
“여기 말고, 밖에서요.”
“밖에서?”
잠시 생각하던 한서진은 알겠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럽시다. 나가죠.”
등을 돌리려는데 하정태가 부러운 얼굴로 ‘파이팅’하고 소리 없이 말했다. 아마도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중에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다.
한서진은 빌딩 광장 구석에 있는 휴게터로 향했다. 송하나는 다소곳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다리가 긴데 힐까지 신으니 더욱 날씬해 보인다. 비율이 장난 아니다.
“뭘 물어보고 싶은 건가요? 근데 나 만나러 온 거 회장님이 알면 가만있지 않으실 텐데요.”
“괜찮아요. 아빠한테 말하고 나왔는데 뭐라 안 하시더라고요.”
“…….”
냉정히 선을 긋던 백철중이 별 말 안 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근데 이 시간에 학교는 안 가요? 오늘 평일일 텐데.”
“개교기념일이에요.”
“아, 그렇…….”
이런 데서 여고생 티가 난다고 문득 생각하던 한서진은 기시감을 느꼈다. 눈이 마주치자 송하나가 수줍게 웃었다.
“그 학교는 개교기념일이 일 년에 대체 몇 번이에요?”
“사실 저번에는 하루 땡땡이 친 거고, 오늘은 진짜 개교기념일 맞아요.”
“……믿어보죠.”
“정말인데.”
방글거리며 웃는 미소가 순수해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기분 좋게 당기는 웃음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녀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저번에 내가 실수한 건 괜찮았어요? 친구들이 오해하지 않던가요?”
“아파트 입대위 회장이라고 했으니까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사실 친구들이 한 대표님 보고 난리가 났거든요. 소개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는지 혼났어요. 제가 여자친구 있다고 하니까 겨우 안 괴롭히더라고요.”
“어, 나 여자친구 없는데.”
“아하, 여자친구 없으시구나.”
“…….”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살살 올라오는 것 같아 한서진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말로 설명하기 묘한 기분이다.
“근데 계속 여기 서서 이야기하실 거예요?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면 안 돼요? 제가 살게요.”
“아, 그러죠. 저기 길 건너편에 조용한 카페 있는데 저기나 갈까요?”
“녹색불인데, 지금 건널까요?”
============================ 작품 후기 ============================
"녹색불인데 왜 안 건너옴??"
ps : 오늘 아픈 건 아니었는데 컨디션이 최악이라서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연약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