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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16화 (116/609)

00116  송하나  =========================================================================

냉엄한 시선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한기를 느꼈다. 그 시선이 향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세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신기했다. 그 독사 같던 인간도 범 앞에서는 얌전해지는구나.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해주게. 이 중에 눈에 익은 게 있는지.”

“있다면요?”

“골라보게. 어서.”

한서진은 천천히 그를 주시하다가 손을 뻗었다. 백세완은 그의 손의 궤적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백철중은 그런 불안한 시선을 놓치지 않다가, 다시금 한서진에게 눈을 돌렸다.

그가 집어든 것은 너클이었다. 그날 밤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모멸감을 남긴, 바로 그 물건이었다.

“…….”

잠시 소리 없이 탄식하던 백철중 회장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시선은 백세완을 향한 채로.

“저걸 가지고 뭘 했느냐?”

“…….”

“좋다.”

백철중은 이번에는 한서진을 돌아보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네가 당한 그대로 하게.”

“……여기서 말입니까?”

“그래,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한서진은 너클을 가만히 만졌다. 그날의 모멸감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백세완의 얼굴이 더욱 흙빛으로 물들었다. 한서진은 냉랭하게 그를 주시했다. 독사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그는 범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한 마리 도마뱀일 뿐이었다.

한참 후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별로 내키진 않군요.”

“왜인가? 똑같은 사람이 되긴 싫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한서진은 백세완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백철중을 똑바로 응시했다.

“분을 풀 수만 있다면 그 이상 가는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당한 것의 열 배 이상으로도 갚아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건 회장님이 벌이신 판 아닙니까.”

“…….”

“남이 벌인 판에서 주먹질을 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기분이 유쾌할 것 같진 않네요. 심지어 여긴 회장님 댁이잖습니까.”

“자기가 한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 그게 내 신조라네.”

백철중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자네에겐 결례였나 보군.”

“회장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갚아주고 싶진 않았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주는 것. 그게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몇 번이나 상상하며 이를 갈곤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이건 자신이 원하지 않는 무대였다. 어긋난 무대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자존감에 더욱 흠집을 낼 뿐이다.

“알겠네. 내가 노파심에 지나친 참견을 했군.”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왕 데려다 놓은 김에 사과는 받아두게. 나중에야 다리를 분지르든, 얼굴을 만신창이를 내든.”

한서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백철중은 냉엄한 눈으로 백세완을 돌아봤다.

“사죄하거라.”

“…….”

“어서.”

짧지만 묵직한 한 마디. 그 말에는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백세완은 이를 악물었다. 턱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또렷이 보일 정도다. 그가 얼마나 분해하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벌레 취급하던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은, 대체 얼마나 큰 모멸감일지.

“……미안하다.”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백철중의 눈이 더욱 차가워졌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백세완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그의 표정에서는 모멸감이 완전히 지워지고 없었다. 말끔하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그는 한서진 앞에 대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무슨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

한서진은 말없이 주시했다. 겉으로는 진심 어린 사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사의 숨결을 뿜을 줄 아는 이에게, 그런 외관은 중요하지 않으리라.

백세완의 사과, 이 절차는 오히려 백철중과 자신의 관계를 재설정하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무대 위의 주연들을 위한 조명이었다.

한서진은 백철중을 차분히 주시했다.

“회장님의 얼굴을 봐서 이 자리는 넘어가겠습니다. 개인적인 정산은 나중에 따로 마무리 짓지요.”

“그래도 나는 아직 부족하네. 원하는 걸 말해보게.”

“회장님께 더 원하는 건 없습니다만.”

“아니, 나는 알 수 있네. 자네는 나한테 서운함을 씻었을 뿐, 우리 그룹과 얽힌 감정을 정리하진 않았네.”

“…….”

“자네와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네. 그걸 위해서 원하는 걸 말해주시게.”

말투가 반공대에 가까운 듯 정중하다. 나이는 까마득히 어리지만, 다른 재벌과 대등하게 인정해주는 것일까.

한서진은 백세완을 흘끔 바라봤다.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않았다.

“백세완 실장, 똑똑하고 현명하긴 하나 오만하고 재벌 아닌 사람은 모두 벌레처럼 보는 것 같더군요. 이런 사람이 그룹에 있으면 언젠가 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세완아.”

백세완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썹 끝에 미미하게 매달린 긴장감이 보였다.

“예, 큰아버님.”

그의 목소리는 비에 젖은 새처럼 떨렸지만, 백철중은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앞으로 그룹에 발붙일 생각은 일절 말거라.”

“……예.”

“지금 이 시간부터 어떠한 경우에도 그룹의 이름을 내세우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우리 가문은 물론이고, 그룹 내의 어떤 힘도 빌릴 생각 말거라. 너는 이제부터 H그룹의 사람이 아니다. 알겠느냐?”

완전한 축출. 최후의 선언에 백세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알겠습니다. 누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볼 일이 없을 게다. 그만 일어나거라.”

“백세완 실장님.”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던 백세완은 차가운 존대에 돌아봤다. 한서진이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높인 말투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조롱처럼 들렸다.

“제가 나갈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주었으면 합니다만.”

“들었느냐? 기다리거라.”

“……예.”

백세완은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응접실에는 한서진과 백철중, 둘만 남았다. 백철중이 문득 옆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이 꼴보기 싫은 것들, 이제 그만 치우게.”

가정부 세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서 테이블 위에 놓인 도구들을 정리했다.

백철중은 비로소 후련하다는 얼굴로 한서진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미안했네.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킬 테니, 아무 근심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감사합니다.”

“아닐세. 모든 게 내 불찰이었네.”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게 매듭이라는 것인가. 백세완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맛이 더럽지만, 뭔가 큰 것 하나를 배운 듯한 느낌이다.

백세완은 더러운 마지막을 남겼지만, 그 때문에 백철중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었다.

‘회장님은 그게 목적이셨을까?’

백세완의 처벌보다는,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 그것을 생각하면 조금 그가 무서워진다. 타인인 자신을 위해,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혈육을 내팽개칠 수 있다니.

“다녀왔습니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송하나가 들어섰다.

그녀는 한서진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한 대표님? 이렇게 또 뵙네요.”

“아, 송하나 양. 오랜만입니다.”

“학교에서 이제 오는 거냐?”

“예. 친구들과 잠시 뭐 좀 하다가 왔어요.”

그러면서 송하나는 한서진을 흘끗 살폈다. 불현듯 한서진은 아까 차내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치마 아래로 쭉 뻗은 늘씬한 다리가 생각나자 그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애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설마 약주 하시려는 건 아니죠?”

“왜 아니겠니.”

“아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허어, 일찍 먹어야 과음해도 내일 일찍 일어나지 않겠니.”

“과음을 안 할 순 없는 건가요?”

송하나는 새침한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조금 신선한 느낌, 한서진은 그녀가 비로소 여고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철중은 껄껄 웃었다.

“알았다. 적당히 먹으마.”

“제가 몇 병인지 다 셀 거예요.”

송하나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위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백철중은 피식거리며 한서진을 돌아봤다. 얼굴에는 애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내 보물이라네. 귀엽지 않은가?”

“그렇군요.”

“자네도 딸을 낳으면 내 심정 이해할 거야.”

손녀 같은 딸을 낳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한서진은 그 말은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가정부가 술과 요리를 가져와서 테이블 위에 차렸다. 상다리가 휘어질 듯한 진수성찬에 소주였다. 뭔가 안주와 술의 격이 차이가 심한 듯했다.

“자, 드세나.”

백철중은 격의 없이 술잔을 나누었다. 한서진은 잔을 부딪치며, 그의 흥취에 어울려 주었다.

술맛이 쓰지도, 달지도 않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렇게 쉬웠나?’

백세완에게 복수하기 위해 H그룹을 무너뜨리겠다고 정지원에게 피를 토한 것.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이 바보짓처럼 느껴졌다.

‘아니, 일을 마치고 나니 간단하게 느껴지는 걸 수도.’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백철중에게 더 이상 유감은 없다. 지금 생각하니 백세완도 그저 하찮게만 느껴진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모든 것을 덮고 없던 일로 하고 싶을 정도다.

얼마 전의 자신이라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쯤에서 만족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뭔가…… 그건 내키지 않아.’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백세완을 처리했고, 백철중에게 더 이상 유감도 없지만, 이쯤에서 일을 털어버리고 싶진 않았다.

보복심과 별개로, H반도체의 파운더리 능력은 현재 SJ인더스트리에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본래 TX인더스트리 시절부터 규모가 작았던 SJ인더스트리로서는 H반도체의 생산라인이 절실히 필요했다.

얼큰하게 술이 취하고, 백철중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자네에게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지만, 하나 말하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IPIC의 자회사인 ADSC(Abu Dhabi semiconductor company : 아부다비 반도체 회사) 이야기일세. 졔이크 안슐 왕자의 단기 목적은 반도체 분야 기술 축적일세. 하지만 ADSC의 생산라인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지. 그에 비해 우리는 파운더리 생산 능력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네.”

“제게 중개를 바라시는 겁니까?”

“염치없지만 그룹 사정이 급하다네. 자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니, 한 번 고려는 해주게나.”

재벌 총수나 되는 사람과 대적을 하며, 그의 정중한 부탁을 받고 있다. 언제 인생이 이리 바뀌었나 생각하니, 조금 실소가 새어나온다.

술잔을 입에 갖다 대던 한서진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흘끗 눈을 들었다. 위층 계단 난간에서 후다닥 사라지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몇 시간을 마신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백철중은 집요하게 붙들고 놔주지를 않았다. 자손들의 부족한 경영 능력에 애를 먹는다며 하소연을 했다. 다행히 요리가 무척 맛있었던 터라 술자리는 그런대로 즐거웠다.

한서진은 꽤나 취한 채로 저택을 나섰다. 경호원들이 다가와서 부축했다.

정문을 나서는데, 어둑어둑한 그늘 아래 사람이 보였다. 누군가 하고 살피던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백세완이었다.

“안 갔네? 간 줄 알았더니?”

“…….”

백세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서진은 키득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백철중 회장님이 어지간히 무섭긴 한 모양이야. 이미 내쳐진 주제에, 몇 시간 동안 꼼짝 않고 기다리고 말이야.”

백세완은 시선을 피했다. 옅은 독사의 숨결이 맡아지지만, 그것은 다 죽어가는 뱀의 단말마였다.

한서진은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신기하게도 취기가 싹 가시고 있었다.

“예전엔 참 크게 보였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참 작아 보이네. 선배.”

“…….”

“어차피 그룹에서 쫓겨났고, 나도 마음 좀 시들해졌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 정산할 건 해야지?”

한서진은 발을 들어 백세완의 배를 힘차게 걷어찼다. 백세완은 퍽 하고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굴렀다. 그 볼품없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서진은 등을 돌렸다.

“더 패기도 귀찮네. 나 간다.”

죽어가는 독사의 나지막한 숨결이 들린다.

“다신 내 눈에 띄지 말고.”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원래 함무라비 법전을 숭배하는 저로서는 너클에는 너클로! 라는 마무리를 구상하고 있었거든요.

백세완이 한 것과 똑같이, 너클 끼고 한 대 치고 사람 속 후벼파는 멘트 한 마디 날리고, 또 한 대 치고 멘트 날리고, 그렇게 하려고 했었는데...

저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너무 한서진에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나오지 않을까-_-

제가 이런 걱정이 먼저 들 정도면 아무래도 다른 분들은 더 심할 것 같아서... 그래서 편집자분과 의논을 한 끝에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했습니다.ㅠ

사이다를 기대하신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어요.ㅠ

백세완은 원래 한서진의 중간 성격 변화를 주기 위해 기획한 캐릭터로, 너클 이벤트는 제가 초기부터 구상한 것입니다. 다만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았네요. 제 초기 구상으로는 80편쯤에서 퇴장할 몸이었는데....

참, 녹색 동네 마감이 다음주나 다다음주면 영원히 끝날 것 같습니다. 야x의 지x가 곧 완결됩니다. 그럼 리미트리스 드림에 할애할 시간이 좀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기쁜 소식이니까 추천 좀...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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