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송하나 =========================================================================
“예, 한서진입니다.”
한서진은 차분히 전화를 받았다.
「주총은 최악의 결과로 끝났네. 현 경영진은 전부 경질됐고, 신임 대표와 이사진 몇이 새로 선임됐지. 전부 반대측 사람들일세.」
“……그러시군요.”
「자네를 원망하는 건 아닐세. 그냥 자네가 이 때문에 마음의 부담을 가지지 않았으면 해서 전화했네. 언제 한 번 소주나 같이 하세나.」
백철중은 털털하게 말했다.
네가 도와주지 않아 주총에서 졌다는 원망이나, 졌으니 재기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억지도 없었다.
하나를 잃었어도 다른 하나까지 잃을 마음은 없다는 것인가. 한서진은 마음이 편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정말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여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세완이는 곧 사죄시키러 보내겠네.」
“…….”
잠깐 입술이 말랐다.
지금이라도 백철중에게 폭력 행사를 털어놓으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백세완은 실장이다. 그 말은 이번 경영진 해임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본래라면 사모펀드 S드론이 밀어 넣은 신임 경영진이 그를 회사에서 내쫓을 예정이었다.
불현듯 정지원의 말이 생각났다.
―약은 매를 휘두른 후에 줘야 고마워한다. 매를 때리기 전에 미리 주는 게 아니라.
채찍은 이미 휘둘러졌고, 상대는 아파서 끙끙거리고 있다.
지금 사실을 털어놓으면, 백철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도 백세완을 보호하려고 할까?
“회장님은 정말로 제가 도왔다면 이번 주총에서 승리하셨을 거라고 믿으십니까?”
「물론이지. IPIC의 파트너인 자네와 제휴를 할 수 있다면, 주주들은 한 번 더 믿어줬을 걸세. 자네가 그리 섭섭한 게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
“백세완도 염치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회장님한테 자기가 한 일을 제대로 고하지 않은 걸 보면.”
「그게 무슨 소린가?」
백철중 회장의 목소리가 대번에 변했다. 어떤 강한 불길함에 사로잡힌 목소리, 한서진은 어쩌면 그가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예감이 스쳤다.
과연 백철중은 백세완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한서진은 짜릿한 궁금증을 누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백세완, 예전에 조금 놀았다고 하더군요.”
「…….」
“사실 제가 회장님의 부탁을 거절한 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되네.」
백철중이 말을 잘랐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혈육이라고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가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 난 그냥 조금 부딪친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자네가 내 부탁에도 그렇게…… 허어, 설마 하니 그렇게까지 일을 벌였을 줄이야. 내가 정말 미안하네.」
“회장님.”
「집안 간수를 못한 내 책임일세. 미안하네.」
백철중의 목소리에서는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노기가 느껴졌다.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하는지는, 너무나 또렷했다.
한참 후 백철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소주나 대작할 수 있겠나?」
“제가 시간이 될지는…….”
「내가 변변찮은 술친구 하나 없어서 그런다네. 부탁하네.」
설마 정말 술친구가 없어서 그럴까. 마음 편히 소주를 나눌 친구가 없을 뿐이겠지. 그는 재벌 총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찾아뵙지요.”
공항 게이트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백세완은 머릿속에서 고민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미 글렀다.’
분하지만, 한서진이 순식간에 높은 곳으로 뛰어오른 것은 사실이다. 재벌 방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리고 자신이 한 짓이 알려지면? 큰아버지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룹에서 영원히 내쳐질 수 있다.
‘차라리…….’
백세완은 입술을 깨물며 잔인한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다.
‘가능성이 없어.’
사람 하나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라지만, 그것도 상대방 나름 아닌가. 이미 무너진 댐이었고, 자신의 손에 들린 건 삽 한 자루뿐이었다. 범람하는 저수지를 무슨 재주로 막는단 말인가.
그때 백철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예, 큰아버지.”
「지금 한국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난 지금 집에 있다. 잠깐 들리고 가거라.」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백세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철중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고 엄했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중을 나온 기사가 차를 대기시켜 두고 있었다. 뒷좌석에 오른 백세완은 차갑게 지시했다.
“한남동으로.”
“예.”
기사는 더 말 않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차창을 흐르는 풍경을 보며, 백세완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큰아버지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을까. 그냥 잡담이나 떨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
‘그래…… 큰아버지도 설마 나를 내치시진 않을 거야.’
혼잡한 서울 도로를 달려 백철중의 사택에 도착했다. 언제 봐도 웅장한 저택이다.
응접실에는 편안한 옷을 입은 백철중이 신문을 읽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아버님. 저 왔습니다.”
“앉거라.”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 백세완은 흠칫 굳었다. 백철중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주시했다.
“왜 그리 놀라느냐?”
“이, 이건…….”
낮은 테이블 위에 즐비한 도구들을 보고 백세완은 아연실색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클, 금속배트, 소형 구타봉, 체인, 포승줄 등이 널려 있었다. 문제는 그 도구들을 그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박 실장 시켜서 네 사무실과 차에서 가져왔다. 옛날에 다 버린 줄 알았더니, 새로 마련한 모양이구나.”
“…….”
백철중의 시선은 차가웠다.
“아직도 네가 스무살인 줄 아는 게냐?”
‘조금 놀았다’는 말을 꺼냈을 뿐인데, 백철중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눈치가 빠른 것도 있겠지만, 백세완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리라.
부당한 일을 고발한 희열은 없었다.
오히려 차분한 호기심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 백철중이 어디까지 칼을 댈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마치 자신이 재판의 피해자가 아닌 방청자가 된 기분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한서진은 백철중의 사택으로 향했다.
신호등에 걸린 그는 하품을 하며 밖을 내다보다가 멈칫했다.
무리를 지어 웃고 떠들며 걷고 있는 여고생들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송하나?’
가슴이 갑자기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리에 섞여 있음에도 그녀는 강렬한 존재감을 빛내고 있었다. 아니, 여러 사람과 함께 있으니, 그녀의 특별함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근처 학교에 다니나 보군.’
친구들과 소탈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비서처럼 정갈한 정장 차림과 겹쳐져 낯선 느낌을 자아낸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송하나의 모습, 불현듯 며칠 전 비에 젖은 모습이 떠오르자 심장의 고동이 더욱 빨라졌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한서진은 유턴해서 돌아와 송하나 일행에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차 천장을 오픈하며 다가갔다.
“송하나 학생.”
짤막하게 불렀을 뿐인데, 갑자기 그녀가 멈췄다. 뒤를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
오히려 주변 친구들이 포르쉐를 보고 난리였다.
“꺅! 하나야, 이 오빠 누구야?”
“와, 너 이런 멋진 오빠가 있었어? 말 좀 해주지! 기집애, 평소 그렇게 앙큼하게 굴더니!”
“아, 그게 아니라…….”
송하나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한서진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혹시 친구들은 송하나가 재벌 딸인 걸 모르나?
당황함을 추스르고 송하나가 얼른 물었다.
“이 근처에는 무슨 일이세요?”
“회장님이 보자고 하셔서 찾아뵙던 중이에요. 근데 마침 송하나 학생이 보여서…….”
“회장님? 하나야, 너네 아빠 회장님이셔?”
“아, 응! 이, 입대위 회장님이셔! 우리 아파트에서 제일 오지랖이 넓으시거든.”
“아아, 난 또 뭐라고.”
“미안, 나 먼저 갈게.”
송하나는 얼른 조수석을 열고 탔다. 평소 차분했던 그녀는 귀밑까지 빨개져 있었다.
“어, 어서 가요.”
“아, 네.”
한서진은 얼른 액셀을 밟았다. 멀어지는 친구들이 잘 가라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내가 실수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송하나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가늘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풋풋해 보인다.
“친구들은…….”
“몰라요.”
무슨 말인지 대번에 눈치챈 송하나는 자르듯이 대답했다.
“학교는 제가 H그룹 회장 딸인 거 전혀 몰라요. 그냥 적당히 사는 집 딸로 알고 있어요.”
“…….”
“도로 하나 차이로 동네가 달라지거든요. 여기는.”
차안은 조용했다. 송하나는 내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 자리가 불편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탄 거야?
“저는 저기 내려주세요.”
저택이 가까워지자 송하나는 차에서 내렸다. 같이 들어갈 순 없으니,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따로 들어온다고 덧붙였다.
“그럼 먼저 갈게요, 송하나 학생.”
“예. 나중에 또 봬요.”
나중에 보자는 말이 왜 이리 기분 좋게 들릴까.
한서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저택에 들어섰다. 저번처럼 직원이 나와서 주차와 안내를 맡았다.
“경호원 분들도 들어오라 하시지요. 따로 쉴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괜찮다고 사양하려 했지만 백철중의 배려라고 했다. 좁은 차 안에 마냥 대기시키는 것도 미안해서, 한서진은 그들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한서진은 우뚝 멈췄다. 예상치 못한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한서진.”
그를 발견한 백세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서진도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대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백철중을 응시했다.
“회장님, 이건…….”
“아아, 자네 왔군.”
자리에서 일어난 백철중은 크게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백세완을 맞이할 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환영의 몸짓이었다.
“어서 앉게.”
백철중은 한서진을 자신의 바로 측면에 앉혔다. 백세완은 꽉 쥔 주먹을 무릎에 올린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또렷이 보일 정도다. 신기했다. 그 독사의 숨결을 내뱉던 이가 저렇게 떨고 있다니.
‘잠깐.’
그제야 한서진은 테이블 위에 시선이 닿았다. 거기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폭력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너클, 금속배트 등등…….
백철중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내 물건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아무렴 이런 것과 친해 보이는 사람인가?”
“…….”
“실은 집안에 말썽꾸러기가 하나 있었네. 아버지를 너무 어린 시절 잃어 내가 가엾게 돌봤지. 그런데 그게 녀석을 더 엇나가게 한 모양이야.”
“…….”
“그래도 어린 나이에 큰일을 겪은 거니, 방황할 수 있다 생각하고 넘어가줬네. 언젠가부터 기특하게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떡하니 명문대도 가더군. 그래서 참 기뻤다네. 죽은 동생한테도 체신이 섰지.”
“…….”
“그런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게야.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을 경시한 거지. 아니, 사람 천성은 본래 타고 나는 것을…… 그걸 변했다고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그것은 넋두리처럼 들렸고, 고해성사로 느껴지기도 했으며, 사죄의 말로도 다가왔다. 질책이자, 분노였으며, 매듭이었다.
백철중은 백세완에게 내내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차분히 한서진을 주시하다가,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참 간단한 세상 이치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 중, 눈에 익은 게 있나?”
============================ 작품 후기 ============================
송하나 팬아트를 받았습니다. 감사의 의미로 당분간 표지에 걸겠습니다.
표지는 나중에 정식 표지가 나오면 다시 변경됩니다.(정식 표지는 왕/한서진의 2중 구도)
송하나 팬아트 풀버전은 작품설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체 사이즈 : 170cm에 75F
연령 : 만 1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