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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14화 (114/609)

00114  송하나  =========================================================================

정지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냉엄한 사회의 법칙에 입맛이 조금 썼을 뿐이다.

“짓밟고 싶은 건 백세완 하나였는데…….”

「너도 그 수단으로 H그룹을 정한 거잖아?」

“……맞습니다.”

「H그룹을 공격하면, 휘말리는 건 백세완 하나가 아니다. 물론 녀석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겠지만. 너도 알고 있었을 테고.」

“…….”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이제라도 멈출까? 손해는 있겠지만, 발을 빼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한서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망설임을 완전히 지운 채였다.

“아니오, 진행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매부터 휘두르고 약을 주면 오히려 고마워한다는 말씀, 그걸 믿으니까요.”

한서진은 백철중을 떠올렸다.

그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고, 고마운 마음도 있다. 대학 합격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며 소주를 대작했던 걸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반대로 비글과 백세완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는 닿지 않는 사과로,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H반도체는 H그룹 소유이되, H그룹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백씨 일가가 H반도체 경영진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상 백씨 일가가 보유한 지분은 얼마 되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전체 지분에서 4%도 채 되지 않는다.

해임안을 골자로 한 임시주총이 코앞에 닥쳐왔지만, 사장 백형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든든한 우호 지분, 백기사들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는 백철중이 임시주총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이제 늙으셨어. 별 거 아닌 주총 하나에 저렇게 마음을 쓰시고 말이야.”

임시주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차에 탄 백형진은 태연히 중얼거렸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게 얼만데, 설마 저들이 우리를 내칠 수가 있겠나.”

그 어느 때보다 회사가 어려운 시기지만, 반대로 위기는 극복이라는 말이 있다. 백형진은 이참에 회사 내의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굳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한서진, 그 친구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까지 했다던데, 뭐 들은 거 있나?”

조수석에 앉은 비서가 대답했다.

“임시주총에 한손 거들어달라고 부탁하신 듯한데, 그 친구가 수락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친구가 무슨 재주로? 지분이 있나, 뭐가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아버님도 이제 판단력이 떨어지셨어. H반도체에 애착이 크신 건 알지만, 5nm공정 특허권자 하나가 이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

겨우 기술 하나로 주주들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게 잡아보겠다? 백형진은 부친의 그런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50조 원에 팔린 대단한 기술인 건 인정하지만, 이미 해외 기업에 넘어간 기술이 아닌가. 그런 국부 유출자에 기대서 이 판도를 어찌 바꾼다는 것인지.

“회장님도 일선에서 너무 오래 물러나셨습니다. 그래서 판단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비서의 공손한 태도가 백형진의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했다.

“우리 우호 지분이 어떻게 되지?”

“발의측이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닌 듯하지만…… 적어도 10% 이상의 차이로 이길 겁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쯧쯧,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거는군. 그러고 보니 발의측이 미국 기업이었던가?”

“예, S드론이라는 사모펀드입니다. 해외 기업 사냥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곳입니다만, 간만 보고 물러나는 경우도 많더군요. 아마 이번 임시주총도 그런 맥락으로 보시면 될 듯 합니다.”

“하여튼 사모펀드란 것들은, 쯧쯧.”

백철중은 무거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K호텔, 오늘 H반도체의 미래가 결정되는 장소다.

한서진이 H반도체와 손을 잡을 듯한 리액션만 취해줘도 주주들은 우호적인 표를 던져줄 것이다. 주주들이 당장 바라는 것은 기업의 비전이었으니까.

SJ인더스트리 때문에 매출이 급격히 줄었으나, H반도체가 세계 1, 2위의 파운더리 업체인 것도 사실. 5nm공정이라는 비전이 한 줄기 비추기만 해도, 주주들은 경영진을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한서진에게 부탁을 했으나, 그는 결국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IPIC가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철중은 한서진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그마치 50조 원짜리 계약이 걸려있지 않은가. 비즈니스 파트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룹에 꽁꽁 묶어두는 건데 그랬나.”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유망하고 매사에 열심인 청년인 건 알고 있었다. 자기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한 동질감을 느꼈고, 그래서 후하게 대해주었다. 포르쉐도 선물했다.

하지만 그뿐, 결국 한계를 넘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송하나와 부딪칠 듯한 접점이 생기자마자 냉정히 선을 그었다.

속물적인 생각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후회된다. 어차피 딸을 천년만년 끼고 살 것도 아닌데.

“예상 판도는?”

“우리 측이 최소 10% 이상의 차이로 이길 것 같습니다만…… 조금 이상한 낌새가 있습니다.”

“이상한 낌새?”

백철중은 멈칫해서 비서를 돌아봤다. 하필 이 중요한 때에 저런 불길한 이야기라니. 비서는 주저하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쪽 백기사 중에서 S드론으로 넘어간 측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지분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P보험은 아니겠지? 그쪽 지분이 가장 큰데.”

“P보험은 아닐 겁니다. 조금 전에 제가 통화했고, 안수현 사장이 직접 주총에 참석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다른 백기사 중 하나란 건데…… 애매하군. 자칫하면 아슬아슬할 수도 있겠어.”

S드론.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사모펀드. 해외 기업합병을 전문으로 하는 듯하나,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고 제대로 성공한 사례도 많지 않았다. 때문에 현 일선 경영진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백철중은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주들은 최근 급락한 주가, 그리고 H반도체의 열세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불만을 어떻게든 현 경영진, 그리고 백씨 일가에 표출하고 싶을 것이다.

만약 그런 불만이 모이고 모여 이번 주총에서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그룹에 있어 악몽이 되리라.

“가세나.”

백철중은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결의에 찬 얼굴로 발을 내딛었다.

“잘 부탁합니다.”

“허허, 별 일 있겠습니까. 염려 마시지요. 우리가 어디 한두 해 인연입니까.”

“그렇지요.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백 사장님, 걱정은 내려놓으세요. 어디 조그만 해외 사모펀드가 주가 조작으로 돈 좀 벌자고 분탕을 치는 모양인데, 우리 국내 시장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백형진은 웃는 얼굴로 우호 주주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 누가 보면 주주총회가 아니라 H그룹 기념행사 자리로 오해할 듯한 분위기였다.

현 경영진은 시종일관 밝은 표정이었고, 해임안이 거론되는 총회라고 하기에 분위기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총회 시작을 앞두고 자리에 착석을 하려는데, 비서가 다가왔다. 태연히 돌아보던 백형진은 심각한 비서의 얼굴에 의아함을 느꼈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러지?”

“사장님, 이상합니다. P보험 안수현 사장의 모습이 안 보입니다.”

“뭐? 직접 참가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늦나 싶어 연락을 했습니다만,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문자를 보내도 답변이 없고요. 이제 곧 총회가 시작하는데…….”

백형진의 얼굴이 굳었다.

총회 결과는 10% 이상의 차이로 너끈히 이길 거라 생각되지만, 그것은 우호 지분을 고려한 수치다.

그중 P보험의 보유 지분은 6.5%.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그것이 고스란히 적에게 넘어간다면, -13%의 타격을 입는 거나 마찬가지다.

“젠장.”

백형진은 급히 전화기를 꺼냈다. 그러나 안수현 사장은 자신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혹시 사고?’

차라리 그랬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불길한 느낌은 그게 아닐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주주총회가 열렸고, 안건이 발표되었다. 참석자들은 각자 의결권을 행사했고, 드디어 개표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개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상으로, H반도체 현 경영진 전원의 해임이 결정되었음을 선언합니다.”

3%의 차이로 인한 패배. 믿을 수 없는 결과에 현 경영진과 그 우호 주주들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백형진의 표정이 볼만 했다. 3%의 차이, 이는 P보험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총회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고, 여기저기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의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총회는 이미 끝났다.

“안수현, 그 새끼가! 감히 뒤통수를 쳐!”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백형진은 분을 참지 못하고 집기를 던졌다. 비서는 좌불안석의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의 분노를 지켜보았다.

“정황을 보면 P보험이 S드론 측에 위임장을 써준 게 사실인 듯합니다. 그래서 3%의 차이로 저희가 패배를…….”

“그 새끼! 지금 바로 찾아와! 어서!”

“찾아와서 뭘 어떡하겠다는 거냐?”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백형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7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정한 노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형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아, 아버님.”

“설마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거냐? 내가 방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누누이 일렀거늘.”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어른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하는 짓이 아이 같구나.”

“…….”

싸늘한 질책에 백형진은 입술을 더욱 깨물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백철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원 해임안이 결정 났으니, 어쩔 수 없지. 너도 이제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거라.”

“아버님. 하지만 H반도체는 아버님의 숙원 사업이 아닙니까?”

H반도체는 H그룹에서 가장 큰 계열사는 아니다. 순서로 따지면 3, 4번째쯤 될까.

그러나 첨단산업을 이끌겠다는 백철중의 야심과 꿈이 담긴, 그야말로 그룹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중요도와 상징성은 다른 어떤 계열사도 따를 수 없다.

“물론 이대로 물러날 마음은 없다. 총회에서는 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H반도체의 주주고 또 우호주주도 많이 있다. 신임 이사에 우리 쪽 사람들을 밀어 넣을 준비도 해야 하고, 앞으로 더욱 바빠질 것이다.”

“…….”

“그러나 너한테 그 소임을 맡길 수는 없구나.”

“아버님!”

“조만간 옮길 자리를 마련해주마. 당분간 다른 계열사에서 머리를 식히며 반성하거라.”

백철중은 차갑게 통보하고는, 사장실을 나섰다. 수행원 서넛이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문득 비서에게 물었다.

“세완이는 언제 귀국하지?”

“열흘 일정 출정이니, 오늘 귀국합니다.”

백세완은 얼마 전에 해외 출장을 명분으로 국외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백철중은 그 점이 괘씸했다.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오라고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차에 오른 백철중은 한서진의 전화번호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결국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에 대한 원망은 없다. 그 역시 자신의 입장이 있을 테니.

‘졌다고 끝이 아닌 것, 이제부터 시작이다.’

결국 실망한 주주들에 의해 경영진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그것이 누군가의 선동으로 촉발된 것이든 어쨌든, 주주들은 최근 H반도체의 부진에 가졌던 불만을 이번에 드러낸 것이다.

패배는 또 다른 시작이다. 여전히 H반도체는 그룹의 계열사였고, 자신과 백기사들은 상당량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결심을 굳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날세.”

============================ 작품 후기 ============================

그럼 이건 기습인가여?

치명타 떴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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