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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13화 (113/609)

00113  송하나  =========================================================================

꿈속에 가까스로 개입한 이후, 왕은 실의에 빠져 지냈다.

하필이면 의식이 개입한 시기가 좋지 않아, 제대로 된 메시지 전달도 하지 못한 채 현실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그런 왕을 걱정한 노신하는 수행 시녀들에게 성심을 다해서 모시라고 당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적합한 여성을 만났소.”

“그게 정말이옵니까?”

왕의 말에 노신하는 크게 놀랐다. 왕은 본인도 자신이 없는지, 다소 설명을 주저했다.

“분명히 확인했소. 통찰안이 적합이라고 하더군.”

“설마……. 레노지안에도 몇 명 되지 않는 왕비감이 거짓된 세상에 존재하다니요.”

레노지안의 왕비는 매우 엄격하게 선별된다.

먼저 육체적인 결점이 없어야 한다. 이는 미모와 몸매는 물론이고, 건강에도 일절 문제가 없어야 함을 뜻했다.

외모는 누구나 우러러 볼 정도로 아름다워야 하고, 신체의 비율은 남자라면 감탄이 나올 만큼 조화로워야 한다. 그리고 건강해야 한다.

다음으로 성정이 왕비에 적합해야 한다. 군주의 반려란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 동시에 모든 이의 어머니여야 한다. 그런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고우면서도 단단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또한 애정에는 진심이 있어야 한다.

이건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만을 뜻하지 않는다. 왕비라는 지위를 출세, 이익, 혹은 다른 목적으로 바라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왕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할 필요까진 없지만, 적어도 왕을 왕이 아닌 남자로서 순수하게 바라봐야 한다.

대륙에 왕비 적합자가 지독히 적었던 이유는 바로 이 마지막 조건에 있었다.

미모가 뛰어나고, 몸매가 발군이며, 건강하고, 심지어 심성이 뛰어난 여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서를 왕의 지위와 별개로 놓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서는 멋진 남자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지배자였으니까.

왕의 지위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운 채, 의식하지 않으며 바라본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말한다.

“그동안은 한 번도 적합이 뜨지 않아서 짐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소만……. 기이한 일이오.”

“진정으로 왕비로서 적합하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꿈속 폐하의 반려로서 적합하다는 것일까요.”

아서에게 어울리는 왕비. 그리고 ‘한서진’에게 어울리는 반려. 이 둘은 엄밀히 말해서 다르다. 그릇의 크기에서 이미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소. 하지만 흥미가 생기는군. 앞으로 주의 깊게 관찰해야겠소.”

왕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꿈에 개입할 수만 있다면, 말이오.”

“잘 되실 것이옵니다, 폐하.”

“아참, 그런데 말이오……. 레노지안의 기준으로 성년이 17세였던가?”

만 17세. 그것이 레노지안에서 성년의 조건이다. 모든 권리와 의무에 있어, 연령의 제한이 완벽히 사라지는 출발선.

“그렇습니다. 헌데 폐하께서 그걸 모르셔서 하문하시는 것은 아닐 텐데요…….”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하필 그 시기가 공교로워서 말이오. 어쩌면 그동안 통찰안이 쭉 적합이라고 판단하지 않은 게 그런 이유에서였나 싶기도 하고.”

“너희들은 누구냐!”

어디에 있었는지, 위층에서 경호실장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백철중 앞을 가로막았다.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넷이나 갑자기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왔으니 기겁을 한 것이다.

한편 경호원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광경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한서진은 백철중과 나란히 마주앉아 있었고, 그 분위기는 진지했다. 도저히 구조 버튼을 누를 틈도 없이 겁박 당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실례했습니다. 위험에 처하신 줄 알고 그만.”

경호원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백철중이 의아한 눈으로 한서진을 바라봤다.

“혹시 자네……?”

“죄송합니다. 제 경호원들입니다.”

“허어, 그랬군.”

“어떻게 된 건가요?”

경호 책임자가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심박수가 갑자기 최대치로 증가해서…… 무슨 다급한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송하나를 바라봤다가 눈이 마주쳤다. 젠장, 거울이 어디 있지? 얼굴색을 확인해야 하는데!

‘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비에 홀딱 젖은 여고생의 라인을 보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고. 발각되었다가는 두고두고 망신감이다.

“……저는 올라갈게요.”

송하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한서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일부러 시선을 피한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경호원이 있었구만. 자네들도 거기 앉게.”

“……저희는.”

“괜찮으니까 앉으시게. 기왕이면 바로 옆에서 경호하는 게 더 낫지 않겠나?”

불법으로 담을 넘어서 저택까지 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철중은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었다.

“경호원이 있으면 데리고 들어오지 그랬나.”

“외출 시에 동행하는 분들입니다. 회장님 사택까지 데리고 들어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난 괜찮네. 그리고 자네는 이제 당연히 경호원을 데리고 다녀야 할 몸이야.”

백철중은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자꾸만 송하나의 몸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쁜 건 알고 있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옷이 감추고 있는 것과, 비에 젖은 블라우스를 통해 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아찔 그 자체였던 것이다. 도저히 여자가 아닌 존재로 바라보기가 힘들 만큼.

“그나저나 요즘 고등학교는 늦게 끝나나 봅니다. 이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니…….”

“아아, 오늘 생일이라서 친구들하고 파티하고 온 걸세.”

“생일이었나요?”

“벌써 17번째 생일이군. 꼬물꼬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조금 있으면 민증도 나오겠군. 다 컸어.”

딸 이야기를 담자 백철중은 어느새 흐뭇해졌다. 나이 차이로 보면 딸이 아니라 손녀뻘이지만……. 그러고 보니 백철중과 송지현의 나이 차이도 엄청 났던 것 같던데?

송하나의 귀가, 그리고 경호원의 난입으로 분위기가 어정쩡해졌다. 백철중 회장도 어색함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룹 총수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비장하게 사과했는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변죽만 실컷 울리다가 그친 셈이다.

“아무쪼록 세완이 잘못은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하지. 부디 내 사과를 받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게.”

“주주총회에서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H그룹 주식은 하나도 없는데요.”

“자네가 약간의 제스처, 반도체 사업에서 제휴를 할 듯한 모양새만 취해도 주주총회 분위기를 뒤집을 수 있다네. 5nm공정 기술의 특허권자 아닌가.”

“하지만 그건 이미 계약이 됐습니다.”

“계약을 파기하라는 게 아니라, 제스처만 취해달라는 말일세.”

한서진은 고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백철중이 건넨 사죄의 무거움을 이해하지만, 이미 주주총회는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기에.

그러나 어째서일까. 지금 그런 마음이 몹시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송하나.’

부끄럽지만, 방금 전 보았던 그녀의 아찔한 자태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한눈에 반했다기보다는, 무턱대고 백철중의 부탁을 거절하기에 부담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어렵사리 대답했다.

“회장님의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도움 부탁은…… 생각은 해보겠습니다만, 긍정적인 대답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부탁하네.”

마지막까지, 백철중의 눈빛은 간절했다.

“늦었구나.”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은 송하나는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로 내려왔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아빠, 그 분은 가셨나요?”

“갔지, 그럼. 왜 그러냐?”

“……그냥요. 아빠가 누구를 집에 초대하는 건 처음 봐서. 누구랑 소주 대작하는 것도 오랜만에 봤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빠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드나 봐요?”

“좋은 청년이지.”

백철중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어리석었다.”

“왜요?”

“누구보다 녀석을 높이 평가했다 여겼는데, 실상 녀석의 백분지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백철중이 눈도 참 많이 죽었어…….”

“엄청 똑똑하다면서요? 신문에서 봤어요.”

“신문에서?”

“네, 회사 다니면서 공부해서 한국대 수석 입학했다면서요? 공부에만 매진해도 어려운 일인데, 대단한 것 같아요. 아빠도 그래서 관심 보인 거 아닌가요?”

“그냥 단순히 똑똑한 정도가 아니다. 그 기사는 아직 안 본 모양이구나.”

“……어떤 기사요?”

“몰라도 된다. 근데 너, 아까 그 꼴이 대체 뭐냐? 우산은 어쩌고? 최 기사는?”

“혜선이 집에서 생일파티 했는데, 언제 끝날지 몰라서 최 기사님은 먼저 보냈어요. 우산 빌려서 오다가 바람이 너무 세서 우산 잃어버린 거구요.”

“조심하지 그랬냐.”

송하나는 가볍게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철중은 문득 송하나가 한서진에 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한 점이 신경 쓰였으나,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계단을 오르며, 송하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얼굴, 되게 빨갛던데.”

한서진은 경호원들과 함께 귀가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빗속을 달리며, 그는 내내 송하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우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나가질 않는다.

‘설마 반했나? 말도 안 돼!’

상대는 미성년자라고!

‘그래도 2년이면……. 아니야, 내가 미쳤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의 상념을 떨쳐냈다. 번뇌를 지우기 위해 애써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백철중 회장님, 역시 재벌 치고는 괜찮은 분이야. 자존심도 내려놓을 줄 알고…… 그러고 보니 내가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도 학교 다니라며 이 차까지 내주셨잖아?’

백철중에 관해서는 그도 여러 번 알아봤다. 호탕하고 카리스마 넘치며, 부하 직원을 아낄 줄 아는 자수성가형 1세대 재벌. 그것이 세간이 그를 대하는 평가다.

고민을 하던 그는 정지원에게 전화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거기는 많이 늦었을 텐데.」

“저기, 다름이 아니라요. 백철중 회장님이 마음에 걸려서요.”

뭔가를 느낀 것인지, 정지원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철중 회장이 왜?」

“……사실 그분한테 마음의 빚이 좀 있어서요. 그래도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잘 해주셨잖아요. 비글이나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르시고요.”

「재벌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인 건 나도 인정해.」

“실은 오늘 그 분을 만났는데…….”

한서진은 그간 백철중과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송하나에 관한 것은 쏙 뺐다. 여자 상담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설명을 마친 후, 한서진은 다시 말했다.

“백세완 그 새끼를 봐줄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그 새끼 때문에 백철중 회장님과 아예 틀어지는 것도 꺼려집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차라리 회장님한테 사실대로 털어놓고, 백세완 하나만 족쳐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백철중 회장이 걸리는 네 마음은 알겠어. 이해해. 하지만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뭔데요?”

「H그룹을 궁지에 몰아넣고 활로를 마련해주는 대가로 백세완의 철저한 처벌을 요구하면, 백철중 회장은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정지원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백세완의 처벌을 조건으로 활로를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하면, 백철중 회장은 겉으로는 수락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쾌한 마음을 품을 거야.」

“…….”

「매를 먼저 휘두르고 약을 주면 고마워하지만, 약부터 주고 매를 휘두르면 이를 갈지. 그게 사람이다.」

============================ 작품 후기 ============================

대신섹

시한송

하나를

드리겠

습니다

이 시간에 불시기습 당할 줄은 몰랐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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