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송하나 =========================================================================
「축하합니다, 한 교수.」
한서진은 뜻밖에도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스탠포드의 니트론 교수가 기사를 보고 직접 전화를 한 것이다.
「5nm공정이라니, 참으로 대단해요. 역시 한 교수다운 실력입니다.」
“감사합…… 어, 그런데 원래 한국어를 할 줄 아셨나요?”
「허허, 제가 요즘 한국어를 좀 배웠습니다. 어때요, 들어줄 만한 가요?」
“정말 놀랐습니다.”
발음이 조금 불안정하긴 하지만, 어휘나 문장을 보면 외국인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다. 가만,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본 게 겨우 몇 달 밖에 안 됐는데?
‘그 몇 달 동안 이만큼 한국어를 배워?’
가볍게 소름이 돋는다. 이런 사람을 천재라 하는 것인가.
「실리콘 반도체만 너무 연구하지 마시고 스코브리아늄 반도체도 같이 연구 좀 하시죠.」
“제가 스코브리아늄은 아직 잘 몰라서요. 그리고 저는 회로 설계자일 뿐입니다.”
「아무튼 축하합니다. 내가 조만간 다시 연락할게요. 그때는 좋은 결과를 전할 수 있을 겁니다.」
“뭔가 진척이 있으시군요.”
「허허, 정리되면 다시 전화 드리리다.」
안슐 왕자의 대리인이 계약 체결을 위해 찾아왔다. 영어와 한국어로 된 계약서는 아무 수작 없이 깔끔했다. 통찰안으로 살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
사실 5nm공정기술 특허에는 빠진 게 있었다. 바로 공정에 필요한 특수 가공된 스코브리아늄의 제조법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한서진도 그 부분 때문에 계약에 영향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전권 대리인은 무척 쿨했다.
“향후 10년 간 5nm공정기술을 우리 IPIC가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 보장하시면 됩니다. 그 내용이 이 계약서에 들어 있습니다.”
석유 재벌들이란 원래 다들 이렇게 시원스러운가. 한서진은 조금 문화 충격을 느끼며,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대금 지불에 관해서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것인가요?”
“앞으로 제가 지정하는 외국 회사에 지불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비밀을 유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북유럽의 어느 국가에 본적을 두고 있는 페이퍼 컴퍼니, 에스코너의 이름을 확인한 대리인은 흠칫했다. 그는 눈치가 몹시 빠른 자였다.
“과연, 어쩐지 SJ인더스트리가 경매에 참여하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왜 안 보이나 했더니, 경매 자체가 사실상 SJ인더스트리에 의해 주관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조금 이해가 어렵군요. SJ인더스트리를 통해 특허를 직접 운용하면 좀 더 큰 이익을 취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SJ인더스트리는 공장이 아직 작아 이 기술까지 운용하기에는 버겁습니다. 그리고 사업 확장을 위해서 현금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고요.”
“과연, 그래서 매각한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대리인은 오히려 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화가 힘든 기술을 매각하는 게 사업적인 측면에서 더 이익을 볼 때도 있는 법이니.
물론 한서진의 속마음은 달랐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정 팀장님한테 많이 혼났는데…….’
기술을 공개하는 선에서 끝내야 했다고, 즉석 경매는 지나친 오버였다고 정지원이 나중에 많이 나무랐다.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리지 못했지만.
“SJ인더스트리의 기술이라면 더욱 신용이 가는군요. 더욱이 기술 협력도 기대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리인이 소리 없이 웃는 걸 보니, 왠지 조금 실수한 기분이 드는데?
페이퍼 컴퍼니 ‘에스코너’를 통해 특허 대금을 받은 것은 정지원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절세가 돼.’
에스코너가 본적을 둔 국가는 북유럽에서 해외 기업에 관대했다. 해외 기업이 국외에서 낸 이익에 관해서는 최대 10%의 세율만 책정한다.
덕분에 많은 국제 투자 자본들이 조세회피처로 애용하고 있어,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돈 좀 있다는 기업들은 어차피 다 해. 그리고 정확히 따지면 불법도, 탈세도 아니야.’
덕분에 처음에는 다소 죄책감을 느꼈던 한서진도 요즘에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는 중이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드디어 백철중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IPIC와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한서진은 처음에는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백철중은 체면까지 내려놓고 간곡히 부탁했다. 칠십 넘은 노인, 그것도 가지지 못한 게 없는 재벌 총수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청하다니.
결국 한서진은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요즘 세간에서 자네에 쏠린 주목이 심해서 외부에서 보기는 조금 부담스럽군. 혹시 내 사택에서 보는 건 어떤가?」
“회장님 사택이요?”
「어려운가?」
“그건 아니지만…… 알겠습니다.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경호원을 데리고 들어가야 할까. 한서진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접었다.
‘백철중 회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백세완처럼 그릇된 수작을 부리기에, 그는 너무나 큰 사람이었다.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는 안 그래도 무너진 자존심에 더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밖에서 대기할 테니, 이것을 팔목에 착용하고 계십시오. 그리고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옆의 조그만 버튼을 누르십시오.”
사정을 설명하니 경호원이 조그만 시계 같은 것을 주었다.
“이게 뭔가요?”
“구조 요청을 보내는 장치입니다. 저희 측에서 심박수 측정도 실시간으로 가능하니, 혹시라도 구조 요청을 못하는 급박한 사태에도 대비할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마 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한서진은 포르쉐를 몰고 한남동으로 향했다. 백철중 회장의 저택은 부유층이 몰려 사는 동네에서도 제일 높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지면적만 무려 천 평이 넘어가는, 호화로운 대저택이었다.
포르쉐를 타고 길을 올라가는데, 하늘이 무척 어두웠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자, 한서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뚜껑을 닫았다.
“많이 쏟아지겠네.”
저택에 들어서자, 관리 직원이 직접 나서서 그를 안내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놓고, 한서진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개인 주택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아, 집은 내 쪽이 더 좋은가.’
크렘 회장으로부터 받은 대저택을 떠올리자 쓴웃음이 났다. 아마 규모로만 보면, 이 나라에서 그걸 넘어서는 저택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도심 공원을 송두리째 저택으로 활용한 것이니.
“어서 와요.”
한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나이는 서른 초반쯤 되었을까?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그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의 얼굴은 송하나를 무척 닮았다.
‘송하나의 언니?’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언니를 두고 있구나, 생각하는데 위에서 백철중 회장이 내려왔다. 그는 검은 바지에 편안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왔군. 어서 오게.”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한서진은 일단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백철중은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내 안사람, 하나 엄마라네.”
“……예?”
순간 한서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장남인 백형진 회장의 나이가 50줄이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아무리 봐도 서른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송하나 모친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사교적인 웃음을 띠고 인사했다.
“반가워요, 송지현이라고 해요. 하나 친엄마입니다.”
불현듯 떠올랐다. 송하나는 자기 엄마 성을 따랐다고. 혹시 재혼인가?
“하, 하지만 하나 어머님이라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시는데요. 아무리 봐도 서른하나, 둘 정도…….”
“어머, 그렇게 봐주니 고맙네요. 하지만 사실은 저, 마흔이 넘었어요.”
“그, 그러시군요.”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까? 저 얼굴로 마흔이 넘었다는 것? 송하나 언니인 줄 알았는데 엄마였다는 것?
“뭐, 보다시피 내가 좀 늦게 재혼을 했다네. 그러니 너무 놀라진 말아주게.”
“아,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 앉지.”
백철중이 앉기를 권했고, 송지현이 마실 것을 가져왔다. 그녀는 간단한 몸짓 하나하나에도 기품이 배여 있었다.
‘하나가 엄마를 참 많이 닮았구나…….’
얼굴 생김새가 완전히 빼다 박았다. 그리고 저 살인적인 동안을 보라. 그럼 송하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지금 얼굴 그대로라는 것일까?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송지현이 자리를 비켜주고, 잠시간의 침묵 후 백철중 회장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IPIC와 계약했다는 건 들었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해외기업과 이야기가 끝났다는 건 혹시 IPIC를 말한 것이었나? 애초에 낙찰자가 정해져 있던 게임이었군.”
“…….”
한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철중도 크게 따져 묻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듯이 넌지시 던지는 물음이다.
백철중은 뭔가를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몇 번이고 한숨을 참았다 뱉었다를 반복하던 그는 무겁게 이야기를 꺼냈다.
“세완이와 틀어졌다는 건 알고 있네.”
“……!”
순간 한서진의 표정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백세완, 그 이름이 나온 것만으로 얼어붙은 것이다.
백철중도 그 낌새를 알아차렸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네. 하지만 둘 사이가 틀어졌다는 건 짐작하고 있네. 혹 세완이가 큰 잘못을 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고, 배상하겠네. 조만간 자네 앞에 그 아이도 데려가서 사과시키겠네.”
“…….”
“말해줄 수 있겠나? 자네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한서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요동치는 심장을 힘들게 달랬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는 눈을 떴다.
“곧 열리는 H반도체 임시주총 안건이 백형진 사장 등 오너 경영진 해임이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지금 저한테 이러시는 게 그것 때문입니까?”
“……맞네.”
백철중 회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미안한 눈으로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그룹이 몹시 난처한 지경에 처했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네한테 매달리고 싶네.”
“…….”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건 웃어른인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그 아이의 잘못은 내 책임이니.”
“…….”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전부 내가 책임을 지겠네. 이 늙은이의 사과를 받고 그만 마음을 풀어주게. 그리고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이번 한 번만 도와주게.”
H그룹의 총수가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채 사죄를 하고 있다. 한서진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했다.
‘난…….’
지금 이 작은 행동이 그에게는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보통 큰 결심이 아니고서는, 그룹 총수인 그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이렇게 고개를 숙이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는 임시주총 해임안과 한서진은 무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겠지.
‘나는, 정말…….’
이미 일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백철중이란 개인에게 좋은 사감을 품고 있지만, 이제 뒤로 물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리 하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찔리고 말 것이다.
고개를 숙인 백철중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씨, 비 진짜 엄청 많이 오네. 엄마! 나 다 젖었어! 옷 좀 갖다 줘!”
익숙한 목소리, 바로 송하나였다. 헌데 차분하기만 한 평소와는 달리 소녀처럼 활발했다.
한서진은 무심코 그녀를 돌아봤다. 우산이 없었는지, 그녀는 온몸이 홀딱 젖어 있었다.
붉은 체크무늬 치마, 얇은 교복 블라우스는 흠뻑 젖은 채 아찔한 몸의 라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투명한 피부와 녹색 속옷이 고스란히 비친다.
완전히 젖은 옷은 그녀의 라인을 조금도 가려주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자극적인 곡선을 뽐내듯이 드러냈다.
한서진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귀밑까지 빨개진 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를 뚫어져라 주시하기만 했다.
「적합.」
통찰안이 보여주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대표님! 어디 계십니까!”
경호원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통찰안 씨, 적합으로 바뀐 이유는?"
-작가가 이미 마지막 부분에 서술을 했습니다.ㅋ 비에 젖... 웁웁!
"제대로 말 안 해!"
-사실은 그전에는 몸매 확인을 철저히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