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힘의 축적 =========================================================================
졔이크 안슐 빈 지예드 알 나얀.
아랍 자본 국제석유투자회사의 회장인 그는 아부다비 왕가의 왕자이자 UAE 대통령의 동생이기도 했다.
공개된 개인 자산만 1,000억 달러가 넘는 고귀한 왕족이며, 가문 전체의 자산은 1조 5,000억 달러(1,500조 원)가 넘는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공개된 액수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중동 오일 머니의 실력자 중 한 명. 그런 이까지 경매에 참가했다니.
“반도체 특허에 왜 안슐 왕자가…….”
“오일 머니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도 상륙하는 건가.”
500억 달러. 그것도 최고 입찰가의 단숨에 두 배를 불러버린 패기.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에 그저 다들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안슐 왕자는 여유 있게 팔짱을 낀 채 총장을 주시했다. 경매 진행은? 하고 지그시 묻는 듯한 표정이다. 500억 달러란 액수에 넋이 나가 있던 총장은 그 시선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500억 달러에 40%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있을 수가 없다. 이미 전문가들이 책정한 기술 가치를 아득히 뛰어넘은 금액이기도 하거니와, 그만한 거액을 선뜻 부담할 수 있는 기업도 없었다.
총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경매 종료를 선언했다.
“5nm공정 원천기술의 독점 라이센스는 최종적으로 계약금 500억 달러에 순이익 40%의 조건으로 낙찰되었습니다.”
일개 대학생이 초대박을 터트렸다.
무려 기술 하나로 500억 달러, 즉 50조 원의 대박을 낸 것이다. 심지어 아직 특허 결정이 나지도 않은 기술이었다.
한서진은 하루아침에 이공계의 대스타가 되었다. 언론사들은 앞을 다투어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기술 하나로 50조 원을 번 천재 대학생!」
사진이 보도되진 않았지만, 한국대학교 재학생 한서진이라는 이름은 널리 퍼져 나갔다.
4박 5일 간의 우수인재박람회는 끝났다. 그러나 한서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한서진은 포르쉐에서 내리는 순간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이전에도 포르쉐를 끌고 다니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지만, 지금 이건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저 사람이야?”
“응, 저 오빠가 이번에 50조 원 대박 낸 그 사람.”
“와, 50조 원이면 대체 얼마야? 단숨에 우리나라 최고 부자 아니야?”
“완전히 걸어 다니는 재벌 총수네. 그것도 자수성가.”
부러움, 선망, 흠모, 등등 온갖 시선이 쏟아진다.
한서진은 다소 민망했지만, 가슴을 펴고 그런 시선을 즐겼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모두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과대 어딨는지 아는 사람?”
“잠깐 화장실 갔어요. 왜 그러세요?”
어떤 여자애가 얼른 대답했다. 이름이 뭐더라, 생각하면서 한서진은 말을 이었다.
“이 수업 레포트 제출 때문에 그러는데…….”
“아, 그거 과대 책상 위에 두시면 돼요. 저기예요.”
“고마워.”
한서진이 레포트를 내려놓고 돌아서자 여학생이 다시 물었다.
“오빠, 수업은 어떡하시고요?”
“빠지려고. 일이 좀 있거든.”
“아아, 바쁘시구나.”
역시, 하며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진다. 바빠서 수업을 빠지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모양이다. 한서진은 한층 더 민망해져서 재빨리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박효산이 반갑게 맞이했다.
“여, 50조 원의 사나이. 왔구나.”
“놀리지 마세요, 교수님.”
“놀리긴 무슨, 사실인데. 그나저나 차 안 바꾸냐?”
“웬 차요?”
“50조 원이 생겼는데 이제 차도 바꾸고 집도 바꾸고 해야지. 롤스로이스 어때?”
“무슨 롤스로이스예요. 지금 타는 것도 충분히 비싸고 좋은 차인데요.”
“50조 원 재벌들은 그런 차 안 타고 다닌다. 지금 오피스텔 살지? 집도 기왕이면 좋은 걸로 바꿔. 타워팰리스나 뭐 그런 걸로.”
“정말 갑자기 왜 그러세요?”
“왜긴, 네가 대박 난 거 당당하게 누리고 살아야 어린 이공계 학생들이 꿈을 꿀 것 아니냐.”
나름대로 큰 밑그림이 있는 건가.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실은 이사한 지는 좀 됐습니다. 친동생이랑 집도 합쳤고요. 지금은 오피스텔 안 살아요.”
“오, 그래? 좋은 데로 이사했나 보네?”
“단독 주택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조금 찔렸지만, 한서진은 당당히 표정을 관리했다. 사실 단독주택 맞잖아?
박효산이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그나저나 진성그룹과 H그룹에서 원성 좀 듣겠구나. 너 책임은 아니지만, 둘 다 회사 주가 박살났던데.”
“…….”
사실이었다.
5nm공정기술이 국제석유투자회사에 낙찰되자, 진성전자와 H반도체의 주가가 다시 폭락했다. 두 회사의 반도체 사업은 정말 벼랑 끝에 매달린 것이다.
한서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쩔 수 없죠. 애초에 제값을 불렀으면 저도 국내 기업을 고려했을지도 모르죠.”
“이미 이야기 했나 보구나. 얼마를 불렀는데?”
“이천억이요.”
“정신 나갔네. 쯧.”
박효산 교수를 혀를 찼다. 전문가들이 20조 원짜리라 평가한 기술을 겨우 2천억에 사려 했다고?
“로열티는 순이익의 1%고요.”
“이용무 부회장이 완전히 미쳤구나.”
“뭐, 상관없어요. 어쨌든 장사 잘 했으니까.”
“그나저나 스코브리아늄 반도체가 상용화 되면 5nm공정 기술도 가치가 많이 하락할 텐데, 안슐 왕자가 너무 무리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게 어느 세월에 상용화되나요. 그리고 스코브리아늄 반도체가 나와도 극미세공정 기술이 사장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서로 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죠.”
“하긴, 그렇다만.”
한서진은 혹시나 백세완이 수작을 부릴까 싶어, 최수한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경호에 좀 더 주의해달라고 말이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후가 되자 한서진은 연구실을 나섰다. 복도는 물론이고 캠퍼스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자신을 쳐다본다. 이미 온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전혀 없을 정도로 쫙 퍼진 모양이다.
한서진은 포르쉐를 타고 집으로 출발했다. 네 명의 경호원도 두 개의 차량에 나눠 탄 채,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저녁에는 본채 앞뜰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패드컴퓨터로 한가하게 기사를 검색했다.
귀가한 한지혜가 그를 보고 다가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살짝 흥분한 얼굴이었다.
“오빠,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오빠네 학교, 이번에 1학년 하나가 엄청 대박 터트렸대! 무슨 기술인가를 개발했는데 그걸 중동 왕족이 50조 원이나 주고 사갔다는데? 못 들었어?”
그렇게나 온 나라가 떠들썩했는데, 한지혜라고 모를 리가 없다. 다만 이름까지는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다.
한서진은 조금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실대로 털어놓으려니 영 쑥스러웠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야.”
“응? 뭐가?”
“그거 나라고.”
“그거라니…… 뭐? 설마?”
“그 대박 낸 1학년이 나라고.”
한지혜는 잠시 굳어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녀는 후다닥 스마트폰을 꺼내 기사를 검색했다.
한국대학교 반도체공학부 1학년 한서진. 그 이름을 확인한 그녀는 표정이 얼어붙은 채로 돌아봤다.
“……오빠?”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오빠야?”
“어, 그거 나야.”
“그럼 이제…… 오빠 50조 원 가진 부자야?”
“입금이 되면.”
“하, 하하, 하하하…….”
한지혜는 기운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몸이 축 늘어졌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래서 2억 달러쯤은 그냥 꽂아주는 지인도 막 있고 그런 거구나. 그래서였어……. 역시.”
“아니, 그거랑은 별 상관없고.”
한지혜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기쁜 건지,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표정만 봐서는 그녀의 감정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한지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정말 잘 됐다. 축하해, 오빠.”
“이제 누구도 집안 가지고 너 무시하지 못할 거야.”
“그거…… 신경 쓰고 있었구나. 난 이제 괜찮은데.”
“술이나 한 잔 할까?”
“응.”
한서진은 최수한을 불러 술과 요리를 부탁했다.
그날 밤 여동생과 독한 보드카를 몇 병이나 비웠는지 몰랐다. 흉금에 쌓인 이야기도 터놓으며, 오랜만에 우애를 다졌다.
백철중은 아무 말 없이 기사를 보고 있었다. 한 1학년 대학생이 500억 달러짜리 초대박을 터트렸다는 기사였다. 요즘 재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바로 그 사건.
좌불안석의 심정으로 기다리던 비서는 백철중이 자신을 쳐다보자 가슴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국제석유투자회사가 왜 반도체 특허를?”
국제 석유 카르텔이 왜 반도체 사업에 손을 뻗었는가. 백철중은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비서가 얼른 말했다.
“졔이크 안슐 왕자는 평소부터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일 머니를 기반으로 UAE를 첨단 산업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큰 사람입니다.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자 마음먹은 지도 벌써 3년째라고 합니다.”
“허어.”
백철중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불현듯 한서진의 말이 생각났다.
‘제가 원하는 것은 막내따님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눈 딱 감고 오케이를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비로서 실격이지만, 그룹 총수로서는 그런 미련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한서진이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기에, 어차피 성사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부질없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는 지금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회장님, 백세완 실장이 찾아왔습니다.」
인터폰으로 들어온 보고에 백철중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들어오라 하고, 자네는 나가 있게. 그리고 아무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해.”
“예, 회장님.”
비서가 나가고 잠시 후 백세완이 들어섰다. 백철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지금은 큰아버지라 불러도 좋다.”
“……큰아버지.”
“거두절미하고 물으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백세완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지금 백철중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찔러보기 식으로 물어본 게 아니었다.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을까?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한서진이가 H반도체 사옥으로 널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다음 날, 네가 부리던 경호원 네 명이 입원했더구나.”
“…….”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친 게냐?”
백세완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정도까지 알고 있다면, 전후 인과관계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잡아뗐다.
“큰아버지께서 보셨는지 모르지만, 한서진 그 친구 얼굴과 몸, 매우 멀쩡합니다.”
“나는 네가 예전 버릇 나온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방황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제가 지금 나이가 서른셋입니다.”
“아니라면 다행이고.”
말과 표정이 전혀 다르다. 백철중은 전혀 믿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불신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백세완은 턱이 떨리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큰아버지의 한 마디면 자신은 그룹에서 내쳐지게 된다.
“한서진이가 500억 달러 계약을 따낸 것은 알고 있겠지?”
“……예.”
“이제는 네가 건드릴 그릇이 아니다.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마라.”
백철중은 한서진과 백세완의 사이를 의심했지만, 설마 폭력을 휘둘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 전 봤던 한서진은 누구에게 얻어맞았다고 하기에는 몹시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네가 잘못한 게 있으면 빨리 사과해라.”
“…….”
“왜 대답이 없어?”
백세완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게 부르르 경련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모멸감이, 숨을 막았다.
============================ 작품 후기 ============================
그분을 까메오로 섭외하느라 제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연재가 늦은 겁니다.
정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