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힘의 축적 =========================================================================
볼만 한 얼굴이라는 게, 아마 저런 것이리라.
백세완은 물론이고, 최태규 등 선배들도 일제히 얼어붙어 있었다. 심지어 박효산 교수조차도.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백세완은 떨리는 안면 근육을 간신히 억누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한서진. 왜 장난을…….”
“너 나 아냐고. 난 너 모르는데?”
한서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큰 결심을 하고 뽑은 칼. 휘두르지 않을 거면 애초에 뽑지도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안홍철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서진아. 너 왜 그래…….”
“안 선배님, 저 이거 모르는데요. 근데 왜 이게 저한테 아는 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심지어 ‘이 사람’도 아니고 ‘이거’란다. 분위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험악해졌다. 백세완은 표정을 관리할 최소한의 힘마저 잃었다.
이쯤 되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백세완과 한서진 사이에 뭔가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최태규 등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박효산을 바라봤다. 두 제자의 냉랭한 분위기에 당황해하고 있던 그가 결국 나섰다.
“너희 둘, 무슨 일 있었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승 앞에서까지 대립각 세우냐?”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교수님.”
한서진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백세완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한서진은 다시 얼굴을 들었다. 은사에 대한 죄송한 감정을 품고 있지만, 전혀 굽히지는 않는 눈빛이었다.
“근데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교수님 앞에서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웬만한 게 아니라는 거.”
“…….”
아무도 그 말에는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한서진은 평소 나름 예의를 중시해왔다. 절대로 이유 없이 뒤엎을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박효산도, 그리고 연구실 선배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결국 백세완에게 향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서진이가 이렇게까지 나오냐, 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의문이 담긴 시선은 그 자체로 백세완에게 커다란 모욕이었다. 그는 마치 발가벗겨진 채 광장에 내던져진 듯한 치욕감을 느꼈다. 입술을 바르르 떨던 그는, 치열하게 쌓아올린 미소로 겨우 박효산을 돌아보았다.
“서진이가 저한테 서운한 게 좀 있나 봐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라.”
박효산은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였지만, 더 파고들지 않고 끄덕였다.
백세완은 흘끗 한서진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래도 뭐라도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자존심을 이기지는 못한 것이다.
백세완이 연구실에서 사라지자 안홍철이 그제야 참았던 호흡을 내뱉었다.
“야, 한서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교수님 앞에서 이게 뭐야? 대체 백세완 선배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교수님, 정말 죄송합니다.”
한서진은 안홍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박효산에게 고개를 숙였다. 박효산은 조금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내 앞에서까지 대놓고 쌩깔 정도면…… 정말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구나.”
“저도 교수님 체면 봐서, 교수님 앞에서만큼은 어떻게 연기해보려고 했습니다.”
한서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근데 안 되더라고요. 도저히 못하겠어요.”
“…….”
“선배 대접, 아니 사람 대접 해주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백세완 실장은 저한테 그런 사람, 아니 그런 존재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웬만한 일이면 둘이서 잘 풀라고 한 마디 하던가, 하다못해 화해 주선이라도 할 텐데…….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모양이구나.”
“예, 죄송합니다.”
“알았다. 어쩐지, 느닷없이 H반도체에서 너 빼고 프로젝트 하라고 이상한 요구를 한다 싶었다. 뭔가 갈등이 있구나 싶었는데, 이 정도까지일 줄은.”
박효산은 자세한 내막은 묻지 않았다. 굳이 물을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것이다.
어떤 과정으로 둘 사이가 파탄에 이르렀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탄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김현진이 조금 아쉬워했다.
“아, 그럼 H반도체에서 준 프로젝트 자칫 엎어질 수도 있겠네. 안 그래도 진성전자가 수작 부려서 요즘 연구실 힘든데.”
“만약 일 잘못되면 제가 라이센스를 팔아서라도 연구 프로젝트 드릴게요. 로열티로 어떻게든 되겠죠.”
“어, 정말?”
“그럼요. 그 정도 도의는 있습니다.”
박효산이 피식거리며 물었다.
“라이센스 팔 생각은 있고?”
“팔아야죠. 150억 준다는데, 왜 안 팔아요?”
아득한 숫자에 연구생들은 다시 한 번 멍해졌다.
최태규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 정도면 H그룹 들이받을 만도 하지.”
윈텔, IBM 등 포브스 단골 기업들이 이번 박람회에 우르르 몰려왔다는 소식은 곧 알려졌다. 더불어 그들의 참가 목적이 반도체 연구소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에 국내 기업 중에도 궁금증을 느끼는 기업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도체와 전혀 무관한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들도 반도체 연구소에 마련된 부스를 찾았다.
그리고 드러난, 5nm공정기술의 존재에 그들은 전율했다. 반도체와 유관하든 무관하든, 그 기술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남은 기간 동안, 한서진의 부스에는 매일같이 기업들이 몰렸다. 교내 기자단에서도 찾아와서 심층 취재를 원했다.
심지어 메이저 매스컴에도 관련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실렸다.
「실리콘 반도체 5nm공정기술, 한국대 1학년 재학생이 개발!」
이제는 세상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기자들은 특허청까지 찾아 인터뷰를 했다. 심사관장은 현재 심사 중이라며, 자세한 코멘트를 할 수 없다고 일체 취재를 거절했다.
진성물산 대표 이서나도 자세한 내역을 확인했다. 기사를 다 읽고 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비서를 바라봤다.
“용무가 이천억 원에 1%를 불렀었다며?”
“예. 한국대 박람회에 공개되기 전의 일입니다.”
“근데 그 친구는 왜 거절했대?”
“자세한 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첫날 박람회에 참가해서 기술 시연을 본 외국 기업가 중에 그 열 배 이상을 부른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흠, 한 마디로 이천억 원은 헐값이라는 거구나.”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서나는 지그시 기사를 주시했다. 5nm공정, 그것이 진성전자에 넘어가면 동생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진다. 그녀는 이용무의 제안을 거절한 ‘후배’가 참으로 고마워졌다. 그리고 한 명 더.
“백 실장이 잘해주고 있나 보네.”
현재 진성전자는 10nm공정과 7nm공정을 동시에 개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것만이 SJ인더스트리에 밀린 위상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개 대학생이 5nm공정기술을 개발해버린 상황이다. 7nm와 10nm 기술개발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지만, 시간도 돈도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용무는 이에 대한 질책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것만 생각해도 이서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백 실장한테 연락해. 언제 한 번 셋이 보자고.”
“예, 알겠습니다.”
박람회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한서진은 나름 백철중 회장이 신경 쓰였다. 이미 그가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일이 커졌다. 심지어 메이저 언론사에 한 번 실리기까지 했다. 정확한 실명과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한 번쯤 연락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백철중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한서진은 자신이 그를 의식하고 있음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연락 오면 뭐가 달라지나? 어차피 H그룹과 난 이미 끝났는데.’
이번 이벤트가 끝나는 대로, 정지원이 H그룹을 향해 칼을 들고 움직일 것이다.
백철중이라는 개인에게는 미안한 게 많지만, H그룹 회장에게는 그 이상으로 서운한 게 많다. 송하나가 은근 신경 쓰이지만, 그 이상으로 백세완을 경멸한다.
다만 작은 미련일 뿐이다. 백철중의 연락 없음에 마음이 쓰이는 건.
“드디어 마지막 날이구나. 그동안 고생했다.”
금요일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온 한서진은 연구실에서 시연 준비에 열심이었다. 박효산이 그에게 격려를 건넸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 SJ인더스트리 사주가 너라는 것도 확 밝혀버리지 그러냐?”
“뭐 하러요.”
“왜 그렇게 꽁꽁 숨기고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너도 참.”
“소란스러운 거 싫어하거든요. 애초에 5nm공정 기술도 이런 식으로 공개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냥 조용히 가명으로 팔아먹고 싶었는데.”
“혹시 세완이 때문이냐? 걔 엿 먹이려고?”
“……네. 그것도 좀 있고요.”
박효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으쓱했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아무튼 5nm 기술로 너도 이번에 돈 좀 만지겠구나.”
이미 첫날에 15조 원 이상의 배팅이 나왔다. 아마 다들 그 이상의 가격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의외로 박효산은 거액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덤덤했다. 연구실 선배들이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다.
이 날은 일정이 좀 달랐다. 한서진을 제외한 다른 팀은 일제히 부스를 접었다. 대신 교내의 모든 시선이 한서진의 부스에 집중했다.
우수인재박람회, 한국대 이공계 최대 행사의 피날레가 오로지 한서진만을 위해 열린 것이다.
첫날에 영미 위주의 IT기업들이 참가한 것과 달리, 마지막 날에는 반도체에 조금이라도 발을 얹고 있다 싶은 해외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어, 아예 반도체 연구소 앞의 공터에 임시 천막을 마련하고, 모니터로 생중계를 하기도 했다.
학교 측에서는 총장이 직접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성공적인 경매 성사를 위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이상입니다.」
한서진이 특허 기술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이미 천여 명이 넘은 기업가들 사이에서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중국, 대만 등 국적도 다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 마음처럼 긴장감이 흘렀다.
총장이 직접 기업가들 앞으로 나섰다.
“아직 특허권 설정이 되지 않은 기술이지만, 보다시피 이미 기술의 실체는 존재합니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고, 눈앞에는 5nm공정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버젓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지금 기술에 대한 권리를 구매하는 것이 기업으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비즈니스일 것입니다. 이에 해당 기술의 개발자는, 바이어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글로벌 독점 라이센스를 발급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오직 단 한 명의 입찰자만이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저기 라이센스를 발급했다가 나중에 관리할 게 귀찮았던 한서진은, 수익이 다소 줄어들더라도 간단한 권리관계를 설정하기로 했다.
최태규 일행은 두근거림을 안고 기다렸다. 첫날에만 최고가가 무려 150억 불이 나왔다. 과연 최종 낙찰가는 얼마나 될까?
“20조 원짜리 기술이다. 작게는 18조 원, 크게는 23조 원, 아마 그 언저리에서 낙찰이 될 거야.”
모니터를 통해 기업가들의 표정을 지켜보던 박효산 교수는 그렇게 분석을 내렸다. 한서진도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다.
“23조 원이라, 그렇게만 되면 좋겠네요.”
“서진이가 재벌의 길로 떠나는구나. 부럽다아.”
“가만, 경매 시작한다.”
드디어 경매가 시작되었다. 총장이 시작가를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150억 불에 36%.”
곧바로 튀어나온 호가에 총장만 머쓱해졌다. 이에 질세라 여기저기서 호가가 튀어나왔다.
“160억 불에 36%.”
“160억 불에 37%.”
정신없이 호가가 올라갔다. 경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순식간에 호가는 200억 불을 찍었다. 한국 돈으로 무려 20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눈이 튀어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에 이미 관람하던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대 캠퍼스에 새로 쓰이는 역사의 현장에 있음에 감격해했다.
“250억 불에 37% 나왔습니다. 더 입찰하실 분 안 계십니까?”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미 전문가들이 예상한 기술 가치의 최대치를 넘어선 가격, 그들이 아무리 다국적 공룡 기업이라 해도 그 이상은 부담스러웠으리라.
총장이 경매 종료를 선언하려는 순간이었다.
“500억 불에 40%.”
고풍스러운 아랍식 터번을 두른, 한 젊은 남자의 입찰에 장내가 고요해졌다. 250억 불에서 순식간에 두 배로 뛴 것이다.
“와, 미친 가격이다.”
“아니, 그냥 300억 불만 불러도 될 텐데 왜 500억 불을 부르지?”
“잠깐, 저 사람은?”
입찰자를 알아본 어떤 이가 비명처럼 외쳤다.
“국제석유투자회사 회장이잖아!”
============================ 작품 후기 ============================
"오일머니식 매너 입찰."
힘들게 그분을 섭외한 끝에 까메오로 모셔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