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09화 (109/609)

00109  힘의 축적  =========================================================================

차에서 내린 최만재 이사는 불편한 안색으로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캠퍼스에는 젊음의 활기가 가득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우수인재박람회 때문이리라.

“확실한 거지?”

“예, 제출 명단에서 확인했습니다. 한서진 그 친구도 틀림없이 나온답니다.”

“박효산 교수는 모르는 눈치였는데…….”

이미 통화는 해보았다. 그러나 박효산은 한서진이 박람회에서 무엇을 할지 크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요즘 연구 때문에 바쁘니까, 그만 끊으시오!’

EPR-2 프로젝트 이후, 박효산이 진성전자를 대하는 태도가 영 냉담해졌다. 저번에는 이용무 부회장이 직접 찾아와서 떠맡듯이 프로젝트를 맡기긴 했지만, 착실히 수행 중인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가보세.”

최만재 이사는 수행원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대강당에서 그는 한서진의 부스를 찾았다. 수행원 한 명이 안내 팜플렛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친구는 이곳 대강당이 아닌, 반도체공학 연구소에 부스를 차렸답니다.”

“왜 연구소에?”

“글쎄요,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요.”

“일단 가보세.”

최만재는 교내 지도를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곧 차를 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반도체공학 연구소,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나도 참, 그새 까먹었네. 졸업한 지 이제 겨우 20년 조금 넘었는데.’

아무튼 숨을 헐떡이며 겨우 연구소에 도착했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고급 정장을 빼입은 외국인 기업가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

“이 행사에 요즘 들어 해외기업 참가가 부쩍 늘긴 했습니다만, 저 숫자는……. 마치 행사를 찾은 해외기업은 전부 몰린 듯한 느낌인데요?”

“반도체 부스라서 그런가 보지.”

최만재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반도체는 첨단산업의 꽃, 여기까지 찾은 해외기업들이 한 번쯤은 보고 갈 것이다.

‘어? 가만.’

외국 기업인들을 힐끔거리며 살피던 최만재의 얼굴이 어느 순간 굳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저 사람은…… 윈텔의 카르타고 이사?’

아니, 윈텔이 왜 여기에?

아무리 최근 SJ인더스트리의 공세로 수세에 몰렸다지만, 그래도 윈텔은 윈텔이다. CPU의 강자로 오랫동안 군림해온 그들이 이 먼 나라까지 인재를 살피러 온단 말인가?

‘저 사람은 아몬드의 제인 부사장?’

익숙한 얼굴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올 때마다 최만재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수행원도 참가 리스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이사님. 이거 기업 명단이 범상치가 않은데요. 포브스 단골 기업들은 죄다 참가한 것 같습니다.”

“나도 느끼고 있어.”

“저 기업들이 한데 모였다는 것도 영 이상한데요. 뭔가 알고 찾아온 게 아닐까요?”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우리 그룹도 재단 장학생 라인 통해 겨우 알아낸 거잖아. 양놈들이 알 수가 없다고.”

한서진이 출원한 5nm공정기술? 하지만 외국기업이 그걸 무슨 재주로 알아낸단 말인가. 애초에 소식통이 없는데.

그때 다른 수행원이 속삭였다.

“이사님. H반도체에서도 왔습니다. 백세완 실장입니다.”

“H그룹에서도?”

최만재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과연, 두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백세완 실장이 연구소에 들어서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최만재는 먼저 다가갔다. 상대는 실장이고 자신은 이사지만, 자신은 월급쟁이인데 비해 상대는 재벌의 일가이지 않은가.

“오랜만입니다, 백 실장.”

“아, 최 이사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박람회 부스 하나가 이곳에 열린다고 해서요. 그러는 백 실장은 어쩐 일입니까? 저와 같은 용무인가요?”

“제가 여기 반도체공학부 출신이잖습니까. 중요한 학교 행사니 선배로서 격려차 방문한 거지요.”

“아, 그렇군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은 연구소에 들어섰다.

방진 공정실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이 넘는 해외기업인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IBM, 미크로소프트, 제너럴 모터스, 록히드마틴까지 찾아왔습니다.”

“록히드마틴? 걔들이 왜?”

“전투기에 쓸 반도체 부품 찾나 보죠.”

수행원은 애써 농담처럼 말했지만 전혀 농담으로 안 들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국적 대형 기업들이 일개 학교 행사에 한 자리에 모이다니, 국내 언론이 알면 난리가 날 것이다.

최만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백세완을 힐끔 바라봤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모교 학부가 잘 되고 있는 중인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릴 것은 현재 심사 중인 특허기술입니다. 바로 5nm공정기술입니다!”

쿨럭! 최만재는 사례가 들릴 뻔했다.

‘저, 저! 저걸 말하면 어떡해!’

이용무 부회장이 이 일을 알면 노발대발하리라. 아니, 그 중요한 걸 해외기업들 앞에서 발설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이 공정에는 스코브리아늄의 반응력을 이용합니다…….”

최만재의 타들어가는 마음도 모른 채, 한서진은 설명과 공정 시연을 시작했다. 공정을 마친 후에는 각종 테스트 및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절단면까지 공개했다.

틀림없는 5nm공정기술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매우 간단했다. 대대적인 설비 개선 없이 바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다.

최만재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를 입력했다. 지금 이 사실을 이용무 부회장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10억에 30%.”

“20억. 35.”

“30억. 35.”

“40억. 35.”

아몬드의 제인 부사장이 입을 연 것을 시작으로, 기업인들이 일제히 즉석 경매를 시작한 것이다. 최만재 이사는 그만 입을 쩍 벌렸다.

‘계약금 40억 달러에 로열티 35%라고?’

갑자기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성전자가 제시한 조건이 2천억 원(2억 달러)에 1%였는데…….

처음 한서진측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쩔쩔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한서진은 영어를 몰라서 분위기 파악이 늦었고, 최태규는 설마 그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고 믿어지지 않아서 파악이 느렸다.

안홍철이 냉큼 끼어들었다.

“선배, 경매 시작했지 말입니다.”

“겨, 경매라고? 지금?”

“보면 모르십니까? 박람회에서 기업들이 우리 학생들 아이디어나 기술 그 자리에서 사가는 거야 종종 있는 일이지 말입니다. 아무튼 서진아, 경매 시작됐다. 이야, 박람회에서 경매 이벤트는 참 간만이네.”

“경매라니요, 이게 무슨…….”

“그럼 내가 경매사 노릇 좀 잠깐 해줄까?”

“네?”

한서진이 미처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안홍철은 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시원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 40억에 35% 나왔습니다. 계약금 40억 원에 순이익 35%입니다. 다른 분 또 없으십니까?”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박효산이 한 마디 했다.

“내 생각에는 단위가 원이 아니라 달러인 거 같은데. 저 사람들 한국인 아니다.”

“네? 그럼 40억 원이 아니라 4조 원…….”

무심코 말을 흘리던 안홍철은 새파랗게 질려서 물러났다.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지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해외기업인들의 경쟁은 불이 붙고 있었다.

“80억에 35%.”

“100억에 36%.”

“120억에 36%.”

소유권자는 경매를 붙일 생각이 없고, 경매를 능숙하게 주도하는 경매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연스럽고 질서 있게 경매를 진행했다.

단, 눈빛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활활 튀고 있었지만.

“150억에 36%.”

드디어 15조 원까지 나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한서진은 어떻게든 해명을 하고 싶어 나섰다.

“저, 여러분. 이 자리는 제가 이런 공정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자리일 뿐입니다. 특허권 양도나 라이센스를 설정하는 자리가 아니고요.”

최태규가 빠르게 통역해주었고,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바라는 건 독점 라이센스입니다.”

“이 박람회, 발표 기술이 마음에 든 기업은 즉석에서 구매할 수도 있다고 안내를 받았는데요?”

“그, 그건 그렇지만.”

한서진은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문득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바로 백세완이었다.

“…….”

백세완은 묵묵히 팔짱을 끼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을 확인한 순간, 한서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가슴을 메우고 있던 당황함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럼 오늘부터 4일 동안은 제가 시연하는 기술과 그 원리 자체에 집중해 주십시오. 라이센스 권리설정에 관한 것은 마지막 날,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기업가들은 웅성거리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곧 다 같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특정 기업과 비밀리에 계약을 진행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경매 이벤트는 대강 정리했고, 기업가들은 다시금 5nm공정기술 그 자체에 집중했다. 반도체 시장의 새로운 개막을 열 놀라운 기술에 다들 한 마음으로 찬사를 보냈다.

어느 누군가 말했다.

“만약 5nm공정기술과 슈나우저가 결합한다면…….”

그 중얼거림에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 대다수는, 이 자리에 SJ인더스트리가 참석하지 않은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정신없었던 첫날이 끝났다.

최태규 등 연구생들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듯한 얼굴이었다.

“150억 달러에 36%라니.”

“미쳤어, 미쳤어. 그걸 그 자리에서 팔았어야지, 저 사람들 마음이라도 변하면 어쩌려고?”

“단숨에 재벌이 될 수 있는 길을 차버리는구나.”

간이 작은 그들은 한서진이 그자리에서 선뜻 승낙하지 않은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박효산이 혀를 끌끌 차며 나섰다.

“서진이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리고 마지막 날에 다시 경매한다잖냐.”

“교수님, 저는 경매를 한다고 한 건 아니었고.”

“아무튼. 근데 5nm공정기술은 언제 개발했냐?”

한서진은 난처한 듯이 말을 흐렸다.

“그게, 밥 먹다가 그냥 생각나서…….”

“…….”

최태규 등 연구생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안홍철이 중얼거렸다.

“클라스가 다르네, 클라스.”

그들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후배가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았으니, 어찌 사람으로서 그런 마음이 안 들까.

반면 박효산은 의외로 덤덤했다. 한서진이 SJ인더스트리의 사주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매는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였다.

“교수님, 저 왔습니다.”

백세완이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박효산은 그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왔구나. 설마 인재박람회라고 온 거냐?”

“네, 모교 대행사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그동안 코빼기 한 번 비치지 않았으면서, 무슨…….”

투박하면서도 박효산은 나름 반가운 눈치였다. 옛날에 가르치던 제자였으니 당연한 반응인지도 몰랐다.

최태규와 연구생들도 백세완의 방문에 반가운 태도를 보였다. 어찌 되었든 연구실 선배이자, 재벌기업 H반도체의 사람이니까. 잘 보여 두면 나중에 좋다.

“선배님, 오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그래, 다들 별 일 없었고?”

“네, 그럼요. 아, 혹시 오늘 서진이 부스 행사 보셨습니까? 완전 대박이었어요!”

“아, 멀리서 봤다. 반응 좋은 것 같던데.”

백세완은 미소를 지으며 한서진을 주시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연한 표정이다.

한서진은 팔짱을 낀 채 지그시 그를 노려보았다. 하필 이 자리에는 교수님도 있다.

그래서 그는 깊이 고민했다. 박효산 앞에서 제자 둘이 서로 치고 박는 원수라는 것을 보여드려도 될 것인가? 그것은 은사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텐데.

“축하한다, 서진아. 잘 됐구나.”

폭력을 휘두르던 때의 표정은 없다. 통화할 때 목소리에 실린 분노도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다.

그러나 그때 맡았던, 독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숨결.

한서진은 마음속으로 절실히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교수님.’

“너, 나 아냐?”

============================ 작품 후기 ============================

“SJ인더스트리가 이 자리에 참가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한서진이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ps : 백세완의 트라우마는... 상시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 감안하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