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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08화 (108/609)

00108  힘의 축적  =========================================================================

꽤 고민했었다.

다시 백세완을 대한다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정지원이 결정타를 날리기 전까지는 거짓으로 숙이며 뒤에서 칼을 갈 것인가. 아니면 대놓고 적대관계를 선언할 것인가.

한서진이 고른 것은 후자였다. 전자가 효율은 조금 더 높을지 몰라도, 백세완 앞에서 거짓으로나마 고개를 숙이는 건 죽어도 하기 싫었다.

이번에 백세완의 실체를 겪으며, 그는 큰 결심 하나를 세운 게 있었다. 바로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자는 것.

거짓으로나마 그의 앞에서 숙이는 것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짓이다. 무엇보다 그럴 이유도 없지 않은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자네, 미쳤나?」

“아니, 미친 건 너지.”

「하, 교육이 아직 덜 됐나 본데.」

“이봐, 백세완.”

「…….」

반말뿐만 아니라 대놓고 이름까지 불리자 백세완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침묵했다. 하긴, 그가 어디 이런 경우를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재벌가로서 일평생을 떵떵거리며 살아왔을 텐데.

“확실히 말해두지. 우리가 서로 웃을 일은 평생 없어. 만약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난 마지막 남은 시간을 네놈한테 쓸 거니까.”

여전히 말이 없다. 하지만 거칠게 억누르는 호흡 소리가 들린다. 백세완의 얼굴이 얼마나 새빨개져 있을지를 상상하니,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피어오른다.

증오하는 상대에게 마음껏 증오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사소한 행위가 이렇게 넘치는 희열을 가져다 줄 줄이야.

“끊어.”

뚝, 하고 통화가 끊어지자 백세완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칠게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최신기종 핸드폰은 벽에 부딪치며 그대로 박살났다. 그는 책상을 뒤집어엎으려다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눌렀다.

“이, 이놈이 감히……!”

안면근육이 부들부들 떨린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모욕감이고, 분노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지 못했다.

친구들은 언제나 조심스러워했고, 선배나 선생들도 자신을 어려워했다. 이 나라에서 재벌의 이름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 똑똑한 하층민 주제에 감히 자신을 능멸하다니.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천방지축이라지만,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후우, 후우.”

백세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해져야 한다. 분노는 차갑게 담금질할 때 가장 빛을 보는 법, 그 열기에 잡아먹히면 사리분별 못하는 짐승이 될 뿐이니까.

‘녀석이 지금 5nm공정기술을 믿고 저러는 건가?’

과연, 이제야 납득이 된다. 녀석이 그날, 어째서 자신의 앞에서 비글과 회장님을 들먹거렸는지.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감히 자신에게 들이댄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니 녀석의 반항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대학 연구실에서 진성전자를 찌를 칼이 되어달라는 선배의 부탁을 거절할 때부터, 녀석은 이미 준비가 된 것이다.

백세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머리를 식히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자, 그는 자신의 패착을 인정했다.

“큰 실수를 했군.”

본래 무력은 저급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순간에 휘두를 때는 더없이 극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녀석이 정지원 하나만 믿고 기어오르기에, 확실하게 서열 교육을 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했다.

백세완은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은 5nm공정 특허기술이라는, 확실한 무기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없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백철중 회장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녀석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녀석이 백철중 회장을 찾아가 5nm공정기술을 들먹이며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다면?

“그럼 나는 끝장이군.”

백세완은 마치 남의 일처럼 태연히 판단했다.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그는 평소보다 더욱 얼음장 같은 이성을 유지했다.

이대로 무너질 마음은 없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백세완은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따로 수작을 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서진은 방심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더라도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경호원을 두었다.

백철중 회장에게 말을 할까도 생각해보았다. 적어도 지금의 그라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5nm공정기술과 조카, 둘 중 어느 쪽을 택할지는 분명하니까.

그러나 한서진은 그 생각은 접었다. 타인, 그것도 원수의 혈육의 자비심에 기대어 성취하는 복수는 의미가 없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개처럼 사정없이 폭력에 시달린 그날이.

그때 산산이 부서진 자존감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아야 했다. 백철중 회장의 자비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정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임시주총 일정이 잡혔다.」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한서진은 두근거림을 느끼며 물었다.

“구체적인 안건은요?”

「경영진에서 백형진 회장을 비롯한 백씨 일가의 사임이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높은 확률로 통과시킬 수 있을 거야.」

“저도 한손 거들어야겠군요.”

「발표할 생각이냐?」

“네, 그럼요. 마침 학교에서 좋은 자리가 있거든요. 시기도 딱 맞네요.”

한서진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정지원이 작게 웃더니 물었다.

「뭔지 알 것 같은데. 우리 회사도 참가해도 되지?」

“……안 됩니다. 그럼 내부 거래가 되잖아요.”

「내부 거래는 무슨.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어.」

“그래도 안 돼요. 모양새가 이상하잖아요.”

「……쳇.」

우수인재박람회.

한국대 이공계 전체 행사로, 국내외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퍼포먼스다. 학생들이 기업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발명품, 기발한 아이디어, 사업 아이템 등을 선보이는 자리로, 매년 2학기에 개최하는 대행사다.

주로 국내 기업들이 참석하지만, 해외에서도 내로라하는 기업들도 꽤 많이 찾아온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국내 최고 명문대 이공계의 행사, 그들로서는 우수인재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이공계 인재들이 내가 이렇게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다.

행사는 대부분 3학년 이상이 주축으로 참가한다. 그러나 한서진은 단독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

물론 아무도 염려하진 않았다. 다만 궁금하게 여겼다.

“오빠, 무슨 아이템으로 참가하시려고요?”

“당연히 반도체지.”

“엑? 반도체요?”

나이 어린 동기나 선배들은 반도체라는 말에 의아하게 여겼다. 반도체공학부니 반도체가 주제인 건 이상하지 않지만, 부연설명 없이 ‘반도체’ 그 자체라니.

“연구실을 빌린다고?”

“네, 공정설비를 대강당에 가져갈 순 없잖아요.”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행사에서 규모로는 네가 역대급이겠구나. 연구실 설비까지 쓰겠다니.”

박효산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선선히 허락했다.

“근데 뭘 하려고?”

“당연히 반도체입니다.”

궁금했던 박효산은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한서진은 비밀이라며 끝내 입을 닫았다.

그리고 드디어 행사 첫날, 월요일이 찾아왔다. 오늘부터 4박 5일 동안 국내외 기업가들을 상대로 이공계 전체의 퍼포먼스가 열리는 것이다.

주요 행사장인 대강당에 자리를 낸 팀도 있었고, 따로 천막을 치거나 혹은 강의실을 빌린 팀도 있었다.

국내에서 50대 안에 들어가는 기업들은 대부분 한국대를 찾아왔다. 제조업, 통신, 유통 등 그 분야도 다양했다. 그들은 쓸 만한 인재를 선점하기 위해 나름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실제로 컴퓨터 공학과의 어떤 팀은 국내 대형 통신업체가 현재 서비스하고 있는 통신 시스템을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내놓았다.

마침 해당 팀을 방문한 통신업체의 사장은 그 자리에서 아이디어 값으로 1억을 투척했다. 즉석에서 수표를 발급해 아이디어를 산 것이다.

“들었어? 컴공 애들이 첫날부터 1억 땄대.”

“젠장, 질 수 없지.”

매년 한 번씩 있는 일이었고, 그 소식이 알려지자 행사는 더욱 불타올랐다.

한편 평소보다 많은 기업이 몰려 신이 나 있던 학교 측은 참석 기업의 명단을 확인하고 뒤집어졌다.

“이, 이 회사들이 정말 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총장님.”

본래 이 행사에는 해외기업들도 심심치 않게 온다. 그러나 국내기업에 비하면 그 수는 적은 편이다. 헌데 이번에는 유명한 다국적 기업들까지 참석했다.

“IBM, 윈텔, 아몬드, 록히드마틴, 제너럴 모터스…….”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대형 기업들이 떼거지로 참석하다니. 총장은 이번 행사를 더욱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 참석 기업들이 넌 안 보러 오는 거냐?”

박효산의 물음에 한서진은 난처한 듯이 대답했다.

“연구실이 아무래도 대강당과 멀어서 그런가 봐요. 이상하다, 애들이 거기서 크게 홍보해주고 있는데…….”

무리를 해서라도 대강당에 공정설비를 설치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불가능하지만.

“서진아, 행사장 손님 왔다. 외국 회사 같은데?”

“아, 그래요?”

한서진은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선배들을 돌아봤다.

“저 영어 못해요. 저기, 선배님들.”

“알았어, 내가 대충 통역해줄게.”

최태규가 믿음직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연구실을 찾은 손님들을 능숙하게 안내했다. 그들은 대강당에서 홍보를 보고 이곳을 찾은 기업인들이었다.

‘죄다 외국인들이네. 더 잘 됐어.’

한서진은 만족스러워했다.

특허는 아직 실체심사 중이지만, 오늘 5nm공정으로 만들어진 반도체를 공개할 것이다. 기업들이 대거 모인 자리이니만큼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다.

5nm공정기술이 알려지면, H반도체의 주가는 지금보다 더 빠르게 추락할 것이다. 슈나우저의 공세로 힘들어하는 H반도체에 회심의 결정타를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학교 행사는 5nm공정 특허를 세상에 선보이기에 충분히 훌륭한 무대였다. 정지원의 공작에 한 손을 보탠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릴 것은 현재 심사 중인 특허기술입니다. 바로 5nm공정기술입니다!”

한서진은 자신 있게 소개했다. 그러나 말끔한 양복을 빼입은 백인들은 덤덤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혹시 최태규가 통역을 이상하게 했나?

오히려 5nm공정기술이란 소개에 최태규가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이 왜 저래?’

그는 당황한 감정을 내심 감추고, 공정설비를 작동하면서 기술 설명에 들어갔다.

“이 공정에는 스코브리아늄의 반응력을 이용합니다. 보신 바와 같이, 일정한 가공 처리를 한 스코브리아늄을 포토 마스크에 덧씌운 후 극자외선을 조사하는 방식으로…….”

한서진은 그들의 눈앞에서 직접 제조를 시작했다. 그들은 유리창 너머로, 완벽히 방진 처리된 공정실에서 작동하는 공정과정을 심각한 눈으로 주시했다. 한서진은 제어컴퓨터를 조작하면서 그들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왜 이렇게 다들 조용하지?’

5nm공정은 단순히 미스릴을 공정설비에 추가한 것이 아니다. 특수한 가공 처리를 한 미스릴만이 공정을 가능케 한다.

그 특수한 가공 처리란, 바로 미스릴에 새긴 언어를 말한다. 통찰안이 보여준, 에테르를 제어하는 일종의 명령어. 미스릴을 통해 에테르를 제어함으로써 5nm라는 극미세공정이 가능해지는 원리다.

당연히 이 부분은 특허를 낼 수도 없다. 에테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힘이고, 미지의 언어 역시 세상에 공표할 순 없으니.

“완성됐습니다.”

마침내 시제품이 찍혀 나오자 한서진은 다시금 그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최태규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들의 호응을 끌어내려 하지만, 여전히 다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그럼 성능 및 스펙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이번 시제품에는 공개된 설계도를 이용했다. 다만 극미세공정이니만큼 크기가 더 작아졌다.

시제품은 테스트 과정에서 원본 제품과 동일한 성능을 냈다. 한서진은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절단면을 화면으로 보여주며, 5nm공정으로 만들어졌음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조용했다. 한서진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그때였다. 한 백인 신사가 뭐라고 입을 열었다. 최태규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에게 반문했고, 한서진은 어리둥절했다.

“선배, 왜 그러는 거예요?”

“어……. 이, 이분이 갑자기 10억에 30%를 불렀는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다.”

“네?”

10억에 30%?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다른 흑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짧은 영어, 그것은 한서진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Two billion. Thirty five.”

============================ 작품 후기 ============================

"저기, 님들? 여기 경매 아니고 그냥 제가 그저 특허권 하나 좀 자랑하려고..."

"Shut up! And take my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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