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힘의 축적 =========================================================================
이제 어느 정도 충격이 가셨겠지 싶어, 백세완은 한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통화음이 가는 것을 기다렸다.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그러나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안내 음성이 나왔다. 백세완은 전화를 끄고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세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안내 음성이 나왔다.
“뭐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인가? 백세완은 내심 불쾌했다.
그렇게나 확실하게 교육을 받았으면, 언제든 자신의 전화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제대로 다시 교육을 해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조심스럽게 부하 직원이 들어섰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주시하며 물었다.
“시킨 건 알아봤나?”
“예, 실장님.”
“말해 봐. 내가 회장님을 부추겼다는 게 무슨 뜻이야?”
며칠 전, 백형진 사장의 말은 내내 불쾌한 거북함으로 가슴을 맴돌았다. 그가 추진하던 일은 무엇이고, 백철중 회장이 가져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왜 자신을 불러다가 그 연유를 캐물었던 것이고.
“그게…… 실은 지금 국내 특허청에 5nm공정 원천기술이 실체심사 중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게 거의 결정이 날 것 같다고 합니다. 시제품까지 완성해서 제출한 기술이라고 하더군요.”
“호오, 그랬었군.”
명석한 백세완은 단숨에 사실관계를 추론해냈다.
백형진 사장이 추진하던 일은 아마도 그 특허기술의 확보 작업이었으리라. 그리고 중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백철중 회장이 직접 나선 것이고.
장남의 공을 가로채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장남이 못 미더워 직접 나선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겠거니 생각하던 백세완은 퍼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큰아버님이 하나를 신경 많이 쓰시니까…….’
그룹 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은 그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확정된 건 없으나 백철중이 막내딸 송하나에게 그룹의 미래를 물려주려 하는 조짐이 조금씩 있었다.
‘5nm공정 원천기술이라.’
사실이라면 대단한 일이다. 그도 반도체공학부 출신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아직 10nm공정기술도 채 개발되지 않은 시기인데, 5nm공정이 벌써 나왔다고?
‘형님과 큰아버님이 움직이신 걸 보면 확실한데.’
장남이 못 미더워서 나선 것일까? 아니면 애지중지하는 막내딸을 챙기기 위해서 견제를 한 것일까?
‘어차피 내가 나서기에는 너무 판이 크다.’
그룹의 총수와 장남이 직접 챙기는 일이다. 방계인 자신이 섣불리 발을 내딛었다가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산산조각 날 수도 있었다.
5nm공정이란 엄청난 기술이 아쉽지만, 백세완은 직접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정리 중인데, 부하 직원이 아직 나가지 않은 채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있나?”
“그게, 특허 출원자가 실장님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백세완은 의아해서 갸웃거리다가 불현듯 백형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 쪽 사람이 얽힌 일이다 보니, 혹시 네가 실적을 탐내서 아버님을 부추긴 건가 했다.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제야 생각이 닿은 것이다.
어지간히 자신과 관련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백형진이 직접 불러다가 그런 말까지 할 리가 없다는 것에.
“그게 누군가?”
“그것이…… 얼마 전에 설계팀에 있다가 독립한 한서진 그 친구인 듯합니다.”
하늘에서 둔탁한 뭔가가 떨어져 머리를 내려치는 느낌이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백세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자네…… 그게 무슨…… 농담이지?”
그럴 리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서진이라고?
직원은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이 건을 직접 챙기시는 것도 사실이고요.”
굵은 힘줄이 튀어나온 손이 우악스럽게 책상을 잡아 비틀었다.
계약금 천억에 순이익 1%.
후한 조건을 제시한 이용무는 내심 머지않아 전화가 올 거라 여기고 있었다. 국내에서 일개 특허권자에게 이만한 대우를 해 줄 수 있는 기업이 진성 말고 어디 있겠는가. 아니, 해외로 나가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개인의 힘이란 그만큼 보잘것없는 것이니까.
헌데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넘어가도록 전혀 연락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회장인 자신이 손수 찾아가 확답을 주고, 명함까지 남겼는데도 말이다.
시간이 더 흐르자 이용무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걸린 판돈이 얼만데.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전화하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그는 비서에게 연락을 시켰다.
헌데 전화를 마친 비서는 송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그룹과 계약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이용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일개 서민이 감히 천억을 집어던져?
“이유는 뭐라고 하던가?”
“해외기업을 생각 중이라고…… 그렇게만 말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약이 오간 건 아닌 듯했습니다.”
“허, 천억을 부르니까 기고만장했군. 역시 좋게 대해주면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이용무는 불쾌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억도 과분하거늘, 더 과욕을 부리다니.
“뻔한 수작이지. 지 몸값 높이려는.”
“제가 보기에도 그런 듯 싶습니다. 어떡할까요?”
이용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발칙한 녀석을 어떻게 처리한다?
“일단 이천억까지 불러.”
“부회장님!”
비서는 기겁했다. 일개 특허권자에게 이천억이나 되는 계약금을 제시하다니? 아무리 그룹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지만, 전례가 없는 거액이 아닌가.
“계약 즉시 입금해주겠다고 해. 단, 이게 마지노선이라고 단단히 일러두게. 더 이상의 흥정은 없다고 말이야.”
이용무는 차갑게 말했다.
비서는 지나치다 싶었지만, 이용무의 표정을 보고 수긍했다.
이천억. 개인으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이다. 또한 이용무가 제시할 의향이 있는, 최대 액수이기도 했다.
제정신이 박힌 자라면 이 최후통첩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H반도체 대주주들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현재 과정은 순조로워. 적어도 전체 지분의 18% 이상은 확보할 수 있을 거다.」
“높은 수치인가요?”
「매우 높지. 그리고 이제 시작일 뿐이야.」
수화기 너머로, 정지원은 차갑게 조소했다.
「그들은 우리의 손길을 거절하지 못해. 위기의식이 극에 달해 있거든.」
H반도체의 주가는 매일같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주주들 사이에서는 슈나우저의 위탁생산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그대로 반도체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SJ인더스트리가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백씨 회장 일가가 가진 H반도체 지분은 다 합쳐봐야 겨우 4%도 채 되지 않아. 대주주만 우리 편으로 만들면 게임은 끝이다.」
“참…… 이렇게 간단할 줄은 몰랐네요.”
「SJ인더스트리에게는 간단한 일이지. 다만 H자동차는 공략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
“상관없어요. 차근차근 진행하셔도 돼요.”
한서진은 백세완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일단 H반도체를 뺏기면 백세완 그 새끼도 타격이 좀 클 테죠. 차근차근 짓밟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아니, 오히려 좋을 것 같아요.”
「타격이 좀 큰 정도가 아니지.」
정지원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만큼 백세완을 잘 알아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일까.
「다만,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어.」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진성전자와 묶어서 함께 처리할 생각이거든.」
“진성전자요?”
혹시 진성전자에 해묵은 감정이 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SJ인더스트리는 개발 능력은 뛰어나지만, 공장 규모가 작아서 생산라인이 부실해. 진성전자와 H반도체의 파운더리 사업을 먹으면 부실했던 생산능력이 커버될 거야. 사실 기업가치가 너무 낮게 매겨진 것에는 생산라인 탓도 있어.」
“전 그것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진성이나 H반도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튼 알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걱정하지 마라.」
정지원은 의미심장하게 강조했다.
「네 각오는, 내가 세완이한테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부탁합니다.”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정지원의 목소리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백세완은 그 적의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할 테지.
전화를 끊자 하정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 실장이랑 무슨 일 있었어?”
“…….”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백세완 개새끼 어쩌고 한 것을 들은 모양이다.
“며칠 전에 백 실장에 관해서 물어보더니,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자세히 말하긴 그렇고요, 전 그 새끼가 싫습니다. 그렇게만 아시면 됩니다.”
“…….”
두 사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골이 패였음을 직감한 하정태는 입을 다물었다.
한때 모시던 상사, 그것도 재벌 대기업의 일원. 사석이라지만 그런 인물을 원색적인 욕설로 지칭할 정도면, 여간한 원한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짐작이 안 갔다. 대체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길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그런데 어딘지 낯이 익었다.
누구더라, 생각하며 그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한 대표. 저 진성그룹의 이용무 부회장님을 모시는 황기백 실장입니다. 접때 한 번 통화드렸죠.」
“아, 네.”
그제야 기억났다. 이용무를 그림자처럼 보필하던 사람 아닌가. 이용무가 다녀가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 번 통화도 했었다. 그때 계약금 천억에 수익 1%의 조건을 거절했었고.
「혹시 찾아봬도 될까요? 지금 사무소에 계십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황기백은 서둘러 약속을 잡았다. 그는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사무소에 도착했다. 거리를 생각하면, 오는 도중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황기백은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만큼 공손했다. 허리를 깍듯이 숙이고, 두 손으로 악수에 응했다. 이용무 부회장의 뒤에서 기세등등하던 것은 전혀 없었다.
“특허기술 때문이라면 전에 통화로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저는 해외를 생각하고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부회장님께 보고드렸더니 조건을 달리 생각해서 제시하라 하셨습니다. 그 전언을 드리기 위해서 온 거고요.”
“다른 조건이요?”
“네, 그렇습니다.”
황기백은 자신만만하게 설명했다.
“이천억입니다.”
“…….”
“한 대표님, 잘 생각해 주십시오. 이천억은 일반 개인으로서는 꿈도 못 꿀 금액입니다. 한 대표의 기술이 특출하긴 하나 해외기업들이라고 무조건 공명정대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오히려 자칫 부당한 계약으로 인해 더 큰 손해만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천억과 로열티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한 대표는 진성그룹과 돈독한 사업파트너가 되는 겁니다. 이 나라에서 진성그룹이 가지는 힘은 한 대표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분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이건 이천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이득입니다.”
박수진은 물론이고, 하정태도 귀를 쫑긋 세운 채 대화를 살짝 듣고 있었다. 수천억이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한 번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이것이 부회장님이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입니다.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황기백은 부드러운 조언 속에 뼈를 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충분히 설득을 했다 생각한 그가 돌아가고, 하정태가 숨이 넘어갈 듯이 물었다.
“저번에 이용무 부회장이 왔던 게, 이 일 때문이었어? 특허 기술이라니, 대체 뭔데?”
“그런 게 있어요. 지금은 말씀 드릴 단계가 아닙니다.”
한서진은 좋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때 박수진이 전화를 받고 잠깐 대화를 하더니, 송화기 부분을 막고 한서진을 돌아봤다.
“사장님, 대학 연구실 선배라는 분이 전화하셨는데요. 바꿔드릴까요?”
“연구실 선배?”
박효산 교수 랩에서 온 전화인가? 무슨 일인가 의아해서 건네받은 한서진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날세. 핸드폰을 영 안 받더군. 그래서 사무소로 전화했네.」
“왜, 무슨 일로 전화했지?”
대뜸 돌아온 반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백세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내뱉었다.
「……뭐?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우리가 웃으면서 대화할 관계는 예전에 끝나지 않았나?”
============================ 작품 후기 ============================
원수를 대할 때 최후의 치명타를 위해 웃는 얼굴로 친근한 가면을 쓸 수도 있고, 애초에 공개 선전포고를 하며 적대시할 수도 있습니다. 한서진은 후자를 택했을 뿐이죠.
무조건 전자만이 옳고 합리적이라는 말은 부디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