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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06화 (106/609)

00106  힘의 축적  =========================================================================

쥐죽은 듯한 정적만이 흘렀다.

백철중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말이 없다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이,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한서진은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그러나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 분의 진짜 모습이 보고 싶다.’

어차피 자신은 백세완의 파멸을 위해서 H그룹을 깨부수기로 결심했다. 백철중 회장과 함께 갈 수는 없는 법, 애초에 그럴 만한 의리도 없었다.

백철중 회장이 자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듯이, 자신 역시 비글을 통해 H반도체에 큰 이익을 안겨 주었으니. 손익비교를 하면 오히려 자신이 준 것이 훨씬 클 것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H그룹 회장이 아닌, 백철중이라는 개인의 본성을. 백세완처럼 더러운 밑바닥을 감추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돌아선다면 내내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자네…….”

백철중 회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시 삼킨다.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 그가 극도로 분노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5nm공정 기술의 가치는…… 10조 원을 줘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네. 특히 우리 H반도체는 그 누구보다도 그 기술이 절실한 입장이지.”

정작 백철중 회장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분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터지기 직전의 분노를 억누르듯이, 그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참는 걸세.”

“…….”

“그렇게 중요한 기술만 아니었으면, 내가 그룹에 얽힌 수십 만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회장만 아니었으면, 지금 절대로 참지 않았을 걸세. 당장이라도 자네를…….”

분노가 토해내는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으면, 백철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동자는 이쪽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사납기 그지없다.

필사적으로 분노를 억누르는 백철중에 비해, 비서실장의 표정은 악귀처럼 험악했다. 오히려 비서실장 쪽이 더 백세완과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감히 회장님께 그런 모욕을 주다니, 하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듯한 기세였다.

백철중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필사적으로 분노를 억눌렀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이윽고 눈을 뜨고 한서진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여전히 분노에 불타고 있었지만, 방금 전보다는 아주 조금 열기가 억눌려 있었다.

“내가 한 번은 참겠네. 못 들은 걸로 하지.”

“…….”

“다시 묻겠네. 원하는 조건을 말해주게. 그 기술을 얻으려면, 내가 무엇을 주면 되겠나?”

한 번은 참겠다. 그 인내를 발휘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어디까지 묶어야 했을까.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를 시험했던 것이 미안했고,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후회는 없어.’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백철중의 안에도, 백세완 같은 더러운 악마가 있는지 없는지를.

사람의 진실한 내면은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송하나라는 역린을 건드렸음에도 이런 놀라운 인내력을 보인다면, 적어도 백세완과는 그릇이 전혀 다르다는 것만큼은 입증된 게 아닐까?

한서진은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 백철중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오르며,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먼저 감히 발칙한 말을 입에 올려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

“하지만 죄송하다는 말씀을 한 번 더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의 뜻은 거절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자네, 대체.”

“죄송합니다.”

한서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백철중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방금 전에는 딸이 언급되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지만,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자네…… 하나를 언급한 이유가 달리 있었군?”

“죄송합니다.”

“말해보게. 뭔가? 뭐 때문에 그러는 거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봐, 한서진이!”

백철중 회장은 비로소 분노의 감정을 터트렸다.

“말해보게! 대체 내가 모르는 뭐가 있는 건가?”

“회장님.”

“무슨 일이 있었군! 그렇지? 하나 이야기는 핑계고, 자네는 지금 날 일부러 자극했어! 그래, 마치…… 이 거래 자체를 파토내고 싶은 것처럼.”

백철중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적어도 자신이 알기로 한서진과 H그룹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그런데 애초에 거래 자체를 무효로 하고 싶다면, 그 이유는?

“진성전자인가, 우리 H그룹인가?”

“…….”

“어느 쪽에 원인이 있느냔 말이야. 진성전자와 계약이 확정된 건가, 아니면 우리 H그룹에 기술을 주기가 싫은 건가? 가만, 형진이가 먼저 자네를 찾았다던데, 혹시 얼토당토않게 후려쳐서 화라도 난 건가? 대체 어느 쪽인가?”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고작 한 마디 사과와 태도에서, 백철중은 자신이 놓치고 있던 점을 근접하게 짚어낸 것이다.

한서진은 몇 번이나 망설였다. 만약 백세완한테 당한 일, 그리고 자신이 백세완한테 품는 증오를 말하면, 백철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어도 방금 시험을 통해, 백철중 회장이 백세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를 믿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아니다.

백철중이란 개인은 믿고 싶지만, H그룹 총수이자 백세완의 큰아버지는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서진은 거짓말을 했다.

“이미 해외기업과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비록 구두이긴 하지만요.”

“…….”

논리적으로 완벽한 명분이다. 그러나 백철중이 얼마나 믿을 것인가.

“자세한 금액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국내 어느 대기업도 이만한 조건을 제시하진 못할 겁니다. 그래서 계약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H그룹은 그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네. 그렇게 단정하지 말고, 말을 하게. 얼마면 되나? 얼마면 자네 기술, 살 수 있나?”

만약 백세완 일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줄 수 있느냐고 오히려 되물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H그룹 회장에게는 미안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철중이란 개인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그런 양극 된 감정을 차분히 정리하며, 한서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

“이미 결정이 난 사항입니다.”

“위약금이라면, 그것도 우리가…….”

“죄송합니다. 저는 신용을 잃을 수 없습니다.”

“……신용. 그래, 신용.”

백철중은 안타까운 듯이 눈을 감았다. 악귀와도 같았던 비서실장의 표정은 어느새 감정이 사라졌다. 대화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일단은 알겠네. 오늘은 이만 일어나지.”

백철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서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철중은 섭섭함을 느끼지 않는 눈으로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하나는…… 내가 정말 미안한 게 많은 아이라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지.”

“……죄송합니다.”

“아까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서 크게 흥분했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네와 하나가 굳이 못 엮일 관계는 아니더군. 어차피 정략혼이야 이 바닥에 비일비재한 것을……. 아까의 추태는 어린 막내딸을 둔 늙은 아비의 본능이라 이해해주게. 그래도 우리 하나는 아직 성인이 아니잖은가.”

백철중은 오히려 자신이 사과했다. 지금 그는 아까의 분노한 송하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깨에 짊어진 게 많은 H그룹의 회장이었다.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제가 경박했습니다.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지금 생각하니, 차라리 자네가 정말 하나한테 반해서 그랬으면 하는 마음까지 드는구만. 이건 아비로서 실격이지, 쯧쯧…….”

“…….”

“이만 가보겠네. 자네도…… 혹시 생각이 바뀌면 다시 연락을 주게.”

“…….”

한서진은 대답하지 않았고, 백철중은 가만히 한숨을 쉬다가 등을 돌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백철중의 역린을 찌른 시험, 그것은 입맛이 씁쓸할 여운만 잔뜩 남겼다.

백세완과는 전혀 다른 그릇임을 확인했지만, 무언가 커다란 것 하나를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상관없어.’

그러나 한서진은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H반도체, 나아가 H그룹 전체를 흔들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나. 이미 계획은 시작되었고, 돌릴 마음은 없었다.

백철중에게 인간적인 끌림을 느꼈었지만, 어차피 그는 타인.

송하나에게 호기심을 느꼈지만, 어차피 쳐다보면 안 될 나무.

‘원래 인연이 아니었어. 그러니…… 내가 정한 길로 간다.’

그저 백철중이란 개인에게 조금 미안했을 뿐이다. 너무 아프게 그의 마음을 찔렀던 것이.

H반도체 사장, 백형진.

공장에서 근무 중이던 백세완은 그의 호출을 받고 사옥으로 올라왔다.

사장실 앞에 잠시 선 그는 긴장감을 다독거렸다. 단독 호출은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형님이 무슨 일로?’

올해 50세가 되는 백형진은 백철중의 장남이자, 사적으로는 그의 사촌형님이 된다.

나이 차이가 17살이나 나지만, 귀여움을 받은 적은 없다. 사촌형님의 눈에 자신은 잘라내야 할 경쟁자이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니.

사장실에 들어서자 차분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백형진은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백세완은 공손히 다가가서 살짝 머리를 숙였다.

“사장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사적으로는 사촌형님이지만, 회사에서 실수로라도 그리 불렀다가는 큰 역정이 돌아온다.

백형진은 백철중 회장의 장남, 즉 그룹의 직계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방계에 불과했다. 같은 백씨 혈통이지만, 그 순혈도가 다른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늘 속으로 가는 칼을 감추며, 백세완은 겉으로는 공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형진이 힐끗 그를 보고는 손을 멈췄다.

“앉거라.”

“예.”

백세완은 응접 소파에 딱딱한 자세로 앉았다. 백형진은 사장 책상에 앉은 그대로, 몸을 의자에 깊이 묻었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얼마 전에 추진하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아버님이 그새 아시고 가져가셨더구나. 혹시 네가 아버님을 부추긴 거냐?”

“예?”

백세완은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해했다는 듯이 백형진이 끄덕였다.

“넌 아니구나. 네 쪽 사람이 얽힌 일이다 보니, 혹시 네가 실적을 탐내서 아버님을 부추긴 건가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면 됐다. 가서 일 봐라.”

백형진은 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백세완은 보이지 않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일어섰다.

그가 나가고, 백형진은 안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 몰래 주주들한테 어필할 만한 실적이었는데…… 참 귀신같이 냄새를 맡으시는군. 그나저나 저놈이 아니라면, 대체 아버님은 어떻게 한서진이 그 일을 아신 거지?”

============================ 작품 후기 ============================

"머리 식히고 생각해보니 사윗감으로 나쁘진 않은 것 같기도.... 하여간 이놈의 욱하는 게 문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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