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05화 (105/609)

00105  힘의 축적  =========================================================================

작년, 박현준은 일확천금의 횡재를 했다.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고 15억이라는 거금을 얻은 것이다. 그것도 세금 한 푼 없이.

부탁이라고 해봐야 별 거 아니었다. 제약설비를 이용해 어떤 화합물을 소량 만들어달라는 것. 특별히 위험한 화합물도 아니었거니와, 그 양도 얼마 되지 않았다. 제약회사 차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하면, 그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건 대체 뭐에 쓰려고 한 걸까?’

극약이나 마약류는 아니다. 화학 구조식을 알고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세 가지 화합물을 혼합했을 때 비로소 진짜 목적이 나타나는 건가 싶어, 배율을 달리 하고 섞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세 화합물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쓸모도 없는 것에 15억이나 쓰지는 않을 텐데.’

분명히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매우 비밀스러운 것일 테지. 그렇지 않고서야 15억이나 되는 거금을 쓸 리가 있겠는가.

벌써 작년 일이다.

하지만 박현준은 아직도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 뒤로 한 번도 연락이 없지만, 혹시나 해서 번호를 지우지 않고 남겨두었다. 언제 어느 때든 전화가 울리면 받기 위해서.

자녀 둘을 키우는 40대 가장으로 한 달에 저축 가능한 액수는 겨우 150만 원 남짓, 15억을 모으기 위해서는 약 83년을 저축해야 한다. 인생을 바꾼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아파트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다 갚고, 자녀 교육비와 노후 보장까지 완벽하게 끝났으니까. 박현준은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다.

그런 기회가 또 오기만을, 그는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도 평소처럼 가뿐한 마음으로 출근을 하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진동했다. 흘끗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정수리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때 그 사람!’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박 차장님.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변함이 없는 목소리다. 박현준은 터질 듯한 가슴을 누르며 대답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 뵙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어디서 뵐까요? 제가 즉시 찾아가겠습니다.”

「xx동 k빌딩으로 오시지요. 1층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xx동이라면 멀지 않은 곳이다. 출근길이지만 박현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승낙했다. 지금 뭣이 중한가?

회사에 연락을 한 그는 외근을 핑계로 댄 후, 곧바로 약속장소로 차를 돌렸다.

약속장소는 번화가의 평범한 카페였다. 박현준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먼저 와 계셨군요.”

“아, 예. 반갑습니다.”

박현준은 서둘러 일어나서 인사했다. 일 년 만에 다시 보는 한서진의 모습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다만 개인적인 감인지는 몰라도, 저번보다는 한결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저번에 드린 사례에 문제는 없었는지요?”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보자고 한 이유는…… 짐작하시겠지요?”

한서진은 두둑한 현금 봉투를 올려놓았다. 얼핏 수표 뭉치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박현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20억입니다. 제 요구는 전과 같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엔 최대한 많이 제조해주셨으면 하네요.”

“최대한 많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지?”

“말 그대로입니다. 박 차장님의 능력 한도에서 최대한 많은 양을 제조해주시면 좋겠군요. 거듭 말하지만 이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해주셔야 합니다.”

무리한 요구는 아니구나. 박현준은 안심했다. 자신의 능력 한도에서 최대한 많은 양이라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화학 구조식은…….”

“아직 기억하고 있으실 텐데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저것 실험해보지 않았느냐.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박현준은 내심 찔렸다.

한서진은 수표 다발을 회수하고, 시원스럽게 일어섰다.

“대가는 그때 지불하지요. 그럼 잘 부탁합니다.”

백세완은 네 명의 경호원을 닦달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도 한서진을 죽도록 팬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뒤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비교를 해보니 기억이 사라진 시점이 비슷한 듯했다.

‘설마 한서진이 무슨 수작이라도?’

자그마한 의심이 생겨났으나, 곧 지워버렸다. 떡이 되도록 맞은 녀석이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H반도체의 자기 사무실에서.

“내가 약을 한 건 분명 아닌데…….”

백세완은 약이 보관된 서랍 안의 금고를 흘끗 보며 중얼거렸다.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가끔 사용하는 가벼운 약, 그나마도 본인에게는 투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은 약을 완전히 끊은 지 오래 되었으니까. 저것은 단지 여성 파트너를 위한 것이다.

“미치겠군.”

사무실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한서진을 구타하기 전 일부러 꺼두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경호원 네 명을 팬 것은 정황상 자신이 확실한 터라, 그는 입원료 및 위로금을 주면서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그는 한서진을 떠올렸다. 엉망이 된 얼굴을 상기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벌레는 벌레일 뿐이지.”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벌레를 짓밟을 때의 희열이란. 아마 지금쯤 집에서 꼼짝도 못한 채 누워서 온갖 망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며칠 후, 조금 기력을 되찾을 때쯤에 다시 불러서 재교육을 하면 되리라.

「실장님, 오후에 이서나 대표님과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

“알겠어요. 차질 없이 준비해줘요.”

백세완은 시간을 흘끗 확인한 뒤, 폴더를 열어서 보고 자료를 불러왔다. 블랙커피를 마시며 복잡한 수치를 빠르게 확인해 내려갔다.

어제의 무자비한 흉폭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바람직한 엘리트 재벌 후계자다운 모습이었다.

한서진은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백세완의 귀에 흘러들어갈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물론 경호원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폭력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학교를 하루 빠진 것이다.

멀쩡한 모습으로 학교에 나왔다는 것을 알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대비를 할 테니까.

사무소에 출근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백철중 회장이었다.

“…….”

그는 요란하게 진동하는 전화기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10번이 넘게 울리다가 소리샘으로 넘어갔다. 전화가 끊어지고,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소리샘으로 넘어갈 때까지 신호가 걸렸다.

그렇게 부재중전화만 8통이 찍혔다. 전부 백철중 회장의 본인 번호였다.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군.”

그는 무감정하게 중얼거렸다.

백철중을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본래 혈육은 닮는 것이라고 했다. 백철중은 백세완과 과연 근본적으로 다를까?

‘한번 시험해볼까.’

H반도체는 비글이라는 보물을 뺏은 과거가 있기에, 그는 H반도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백철중이란 개인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호감이 컸다.

그는 비글에 얽힌 갈등을 몰랐고, 또 자신을 한 명의 사원으로서 이것저것 후하게 챙겨주었다. 어느 재벌 총수가 일개 사원의 독립에 몰래 찾아와 축하를 전할까.

그러나 백세완의 진면목을 본 지금은, 백철중의 진심에도 큰 의심을 품었다.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전화가 시끄럽게 진동했음에도, 끝끝내 받지 않았다.

“먼저 퇴근들 하세요.”

아직 오후 4시 30분.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한서진의 말에 하정태와 박수진은 퇴근 준비를 했다.

“아, 그리고 선배님.”

“응?”

“다음 달부터는 H반도체 있을 때 급여 수준으로 맞춰드릴게요. 진작 격상해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야 고맙지, 뭐.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별로 하는 게 없긴요. 큰 도움이 되십니다.”

뜻밖의 행운에 하정태는 좋아라 했다. 아마 그는 한서진을 따라 H반도체를 퇴사한 걸 신의 한수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참, 근데 선배님. 혹시 백세완 실장에 관해서 뭐 아시는 바 없나요?”

“어떤 거?”

“젊었을 적에 조금 놀았다거나, 무슨 스캔들이 있다거나…….”

“그런 거 전혀 없는데? 백세완 실장이야말로 유능하고 현명한 리더잖아? 학벌 좋아, 집안 좋아, 조금 오만한 면은 있지만 매사에 합리적이고. 재벌가 출신이 그 정도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지.”

“그렇군요.”

하정태는 백세완의 실체에 관해서 전혀 짐작도 못하는 듯했다. 과연, 평소에 주변 관리는 철저했다 이건가.

하정태와 박수진이 퇴근하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무소 벨이 울렸다. 한서진은 방문자를 확인했다.

“누구십니까?”

「날세.」

백철중 회장이었다. 사원 둘이 퇴근하고 바로 들어온 걸 보면, 아마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던 게 틀림없으리라.

경호원 네 명은 이미 사무소 근처에서 대기 중이다. 언제든지 사무소에 들어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 한서진은 든든한 마음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백철중 회장이 씩씩거리며 들어섰다.

“자네, 왜 내 전화를 안 받나? 지금 이 백철중이 전화를 일부러 무시한 건가?”

그는 비서실장 한 명만 거느린 채였다. 따로 거느리고 온 인물은 없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요.”

“원하는 조건을 말하게.”

의외로 백철중은 더 이상 그에 관해 화를 내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일반적인 재벌 총수라면 감히 전화를 수십 번이나 무시한 것에 대해 어떻게든 노여움을 드러낼 텐데.

“무슨 조건을 말씀하시는지요?”

“다 알고 왔네. 5nm공정기술 특허, 자네가 출원자라며?”

“…….”

“그래서 이틀 전 나한테 천억 운운한 게 아니었나? 우리 하나한테 알아볼 게 있다는 것도 아마 그거였을 테고.”

백철중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하면 충분히 어필했네. 나도 잘 알아들었고. 그러니 우리 이제 거래를 하세.”

“거래, 말씀하십니까?”

“그래, 비즈니스.”

백철중 회장은 어딘지 대견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서진은 그 점이 의아했다. 왜 저런 얼굴로 날 바라보지?

“벌써 이 백철중이와 직접 비즈니스를 할 정도라니, 회사를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세 그만큼 컸는가. 참 대단하고, 대견스럽네.”

“…….”

한서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건 자신이 상상한 그 어떤 반응에도 속하지 않았다. 백철중 회장이 이렇게 부드럽게, 신사적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

얼굴을 보자마자 시원스럽게 거래를 청하다니. 원하는 조건을 말해보라니.

“진성전자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조건이 뭔가? 그 놈들이 얼마를 불렀든, 내가 그보다 훨씬 높이 쳐주지. 자, 원하는 조건을 말하게.”

“진성전자는 계약금 천억에 로열티로 순수익의 1%를 제시했었습니다만.”

“허, 겨우 그 정도에?”

백철중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5nm공정기술이 얼마나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기술인데, 그걸 겨우 천억에 날름 먹겠다? 미친놈들이군. 하여간 진성전자 실무진 놈들은 그저 실적에만 목을 매느라고 큰 그림을 전혀 보질 못한단 말이야.”

“……이용무 부회장이 직접 제시한 조건입니다만.”

“용무가 직접? 진성도 말세로군. 창용이가 오늘내일 한다던데 용무가 지휘봉 잡으면 진성그룹도 시들어지겠어. 쯧쯧, 그 집도 자식농사 잘못 지었다니까.”

“…….”

한서진은 백철중의 반응에 혼란스러웠다. 이건 자신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그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 좋게 굴던 백세완이 악마처럼 변하던 광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회장님도 똑같지 않을까?’

그저 가면을 쓰고 있는 것뿐, 본질은 같지 않을까?

그는 눈을 떴다. 결심을 굳힌 눈으로 백철중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어서 말하라는 듯 힘차게 끄덕인다.

“제가 원하는 조건은…….”

백철중 회장의 신임. 그것은 백세완의 역린이었다. 그것을 건드리자 그는 꽁꽁 감추었던 본색을 드러냈다.

백철중 회장은 어떨까? 역린을 찔리고도 과연 본색을 감출 수 있을까?

“막내따님입니다.”

한서진은 흔들림 없이, 그의 역린을 찔렀다.

============================ 작품 후기 ============================

백세완은 유능하고 이성적인, 주변에서 인정하는 엘리트 후계자이지만 본성은 오만합니다. 신분의식도 확실하고요. 다만 그걸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최근에 보여준 폭력성은 본래부터 제가 설정한 그의 특성이고, 소설 초반부터 구상했던 장면이었습니다. 한서진이 그에게 학을 떼게 되고, 정신적인 충격을 통해 성숙하게 되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정지원은 기본적인 신뢰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거짓보다는 정당한 거래를 통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타입, 어떤 성인군자도 아닙니다. 구두약속이라 해도 그것이 신용에 관계된 거라면 틀림없이 지키는, 단지 그런 사람일 뿐이죠.

왕의 강신은 언제고 실현해야 할 소설적 장치였고, 사실 100화가 넘어서 강신한 것도 조금 늦은 면이 있습니다. 그것도 힘을 거의 못쓰고 잠깐만에 사라졌고요. 왕의 스펙 자체가 사기라서 왕이 그대로 현실에 강신하면 그 순간 소설 완결납니다.

뭐 그렇다구요.

자, 이제 딱지 주세여.(굽신굽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