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힘의 축적 =========================================================================
저릿한 통증이 군데군데에서 느껴진다. 얼굴, 팔, 다리, 복부와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통증은 바닥에 잠겨 있던 이성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린 백세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사무실에 혼자 우뚝 서 있음을 깨달았다.
“후욱, 후욱…….”
격렬히 몸을 움직인 것처럼 숨이 찬다. 백세완은 문득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에 낀 너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걸 보자 형광등이 켜진 것처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서진.’
감히 비글 건을 백철중 회장님, 큰아버지에게 일러바치겠다는 녀석의 협박. 그래서 친절하게 교육을 시켜주었다. 누가 하늘이고, 누가 벌레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녀석이 기절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상하게 그 뒤로 기억이 없다.
멍하니 생각을 곱씹던 백세완은 등을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였던 것이다.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네 명의 경호원들은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얼굴과 옷이 온통 엉망으로 되어 있었고, 핏자국은 바닥을 따라 자신까지 이어져 있었다.
백세완은 멍한 눈으로 너클을 바라봤다.
“……내가?”
퍼뜩 불길한 생각이 든 백세완은 서둘러 너클을 벗어두고 책상 서랍을 뒤졌다. 이중으로 된 서랍의 잠금장치를 열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조그만 박스에 일괄적으로 정리된 수십 알의 캡슐. 그는 한 알도 남김없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약은 그대로인데.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정말 내가 저놈들을 팼나?”
그리고 또 한서진은 왜 없지? 돌려보냈나?
백세완은 골치 아프게 됐다며 머리를 짚었다. 아직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몸을 심하게 움직여서라기보다는, 누군가한테 좀 맞은 것 같은 통증이다.
비틀거리며 다가간 그는 경호원들의 숨결을 확인했다. 다행히 모두 숨은 붙어 있었다. 심하게 맞은 것을 제외하면 불구가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봐, 다들 일어나.”
포르쉐가 정문을 통과했다. 집사, 최수한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중을 나왔다. 본채 앞에 정차한 포르쉐에서 내린 한서진을 보고 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대표님, 어쩌다가 이렇게……?”
“아아, 그런 일이 좀 있었어요. 지혜한테는 비밀로 해줘요.”
“비밀로 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괜찮으니까 비밀로 해줘요.”
비틀거리며 본채에 들어서려던 한서진은 멈칫하고 최수한을 돌아보았다.
“참, 그리고 경호원이 있으면 좋겠네요.”
“경호원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오늘처럼 엿 같은 일 안 당하겠죠. 전혀 안 그럴 줄 알았던 사람도 난동을 부리는 세상인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 지혜한테도 붙여주고요.”
“알겠습니다.”
“지혜한테는 내가 미리 말해둘게요.”
최수한은 끄덕이고는 재차 확인했다.
“혹시 경호 체제에 생각해두신 점은 있으신지?”
“이 저택을 벗어날 땐 24시간 상시 체제로, 가능하면 주변 사람 모르게 경호해주면 좋겠고요. 경호도 중요하지만 사고가 터지면 즉각 신고하고 증거 수집도 할 수 있게끔 해주세요. 특히 증거 수집,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한서진은 잠시 최수한을 주시했다. 크렘 회장이 이 저택을 선물하면서 붙여준 사람. 문득 그는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최 소장님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혹시 아시나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리고 모시는 분에 관해서 함부로 파악하려 들지 않는 게 집사의 본분입니다. 다만, 크렘 회장님이 소중히 예우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최수한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크렘 회장님이 소중히 대하는 인맥,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신분이시지요.”
한서진은 문득 최수한의 경력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호기심을 채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편히 쉬십시오.”
비틀거리며 본채를 걷는데, 다행히 한지혜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불이 꺼진 것으로 보아 자고 있는 듯했다.
방에 들어가 거칠게 문을 닫은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온몸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백세완, 그 개새끼.’
이를 바드득 갈던 한서진은 깊은 곳에 숨겨둔 금고를 찾았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금고를 열자, 세 개의 용기에 각각 나눠 담겨져 있는 액체가 나타났다. 엘릭서를 제조하기 위한 혼합물이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투명한 용기에 아주 조금만 남아 있는, 신비한 푸른 색상의 반투명한 액체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엘릭서를 마셔버렸다.
“크윽!”
불을 삼킨 듯이 온몸이 뜨거웠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땀방울이 비처럼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서진은 온몸이 개운해진 것을 느꼈다. 욱신거리던 통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옷을 걷어 올리며 피부를 확인했다. 사방에 새겨져 있던 피멍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혹시 모르니까 1인분은 제조해두자.”
한서진은 세 가지의 엘릭서 재료와 자신의 피를 소량 섞어서 1인분의 엘릭서를 만들었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딱 1인분만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는 세 가지 재료의 남은 용량을 확인했다.
“얼마 안 남았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작년, 그는 통찰안의 힘을 빌려서 엘릭서를 만들었다. 덕분에 말기암을 치유하고 건강해질 수 있었다.
그 뒤로 그는 추가적으로 엘릭서를 제조하지 않았다. 엘릭서 재료를 더 확보하지도 않았다.
한때는 재벌이나 부자들을 상대로 엘릭서 장사를 해볼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곧 포기했었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신뢰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믿는다 해도 끝까지 보물을 지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적어도 지킬 수 있는 힘은 낼 수 있다. 그리고 엘릭서라는 더 큰 힘을 갖춰둬야 할 이유도 있지 않은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한서진은 메일을 확인했다. 정지원으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H그룹을 쓰러뜨리기 위한 개요.」
하룻밤 만에 벌써? 정지원의 신속함에 한서진은 피식 실소가 나왔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음이 든든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메일 내용을 확인했다.
“H반도체가 H그룹의 중심이 아니었구나.”
H반도체는 H그룹의 주요 계열사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룹의 가장 큰 기둥은 따로 있었다. 바로 H자동차였다.
‘하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차들 보면 대부분 H자동차이긴 했지.’
H반도체는 백철중 회장이 오래 전부터 그룹의 자금을 투자하여, 미래를 선도할 핵심 사업으로 키우려던 회사였다. 실제로 몇 몇 분야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고, 세계에서 파운더리 업종으로는 1, 2위를 다투는 자리까지 올라섰다.
본래라면 맥플과의 합작을 통해, 진성전자에 버금가는 초대형 반도체 제조회사로 거듭날 계획이었다.
슈나우저와 SJ인더스트리만 등장하지 않았어도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와도 참 질긴 인연이네.’
또다시 실소가 나온다. 백세완, 백철중 등의 당사자들은 정작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게 웃겼다.
메일 내용을 차분히 확인한 한서진은 정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쪽은 지금 오후 4시 정도쯤 되었으려나?
“팀장님, 메일은 확인했습니다.”
「H반도체를 뺏는 것은 사실 매우 쉬워. 백철중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큰 애착을 갖고 있다지만, 주주와 내부 반대를 끝까지 무시하기는 버겁지. 반대로 H자동차를 뺏는 것은 조금 까다로워. 우리가 사업적인 측면에서 약점을 공격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우리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건 아니잖아?」
“H반도체를 뺏으면, 백세완 그 새끼가 얼마나 난처해질까요?”
「당장 일자리는 잃고 질책은 받겠지만, 그래도 재벌 방계니 다른 자리를 금방 구하겠지. 그전보다는 운신 폭이 줄겠지만.」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지는 않겠네요?”
「그렇지.」
“제가 보고 싶은 건 그 새끼가 파멸하는 겁니다.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합니다.”
「H자동차와, H반도체를 같이 공략하는 쪽으로 갈게.」
정지원은 차분히 덧붙였다.
「물론 이건 시작일 뿐이다.」
“당연히 그래야죠.”
백세완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에서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오른다. H그룹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지혜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오빠, 최 집사님이 웬 여자 경호원 두 명 붙여줬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오빠 지시라는데?」
“아, 너한테 말해둔다고 했는데 깜박했네. 당분간, 아니 앞으로 경호원 달고 다녀.”
「무슨 일인데?」
“내가 이제는 잃을 게 많아져서 몸 사리려고 그런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까, 괜히 귀찮다고 투덜대지 말고 달고 다녀.”
「……알았어. 한지혜도 참 팔자 폈네. 경호원도 달고 다니고 말이야.」
그렇게 전화를 끊으며, 한서진은 가볍게 감탄했다.
“최 소장님 대단하시네. 벌써 사람을 구했단 말이야?”
경호 부탁을 한 건 어제 밤늦은 시간이었고, 지금은 아침 8시다. 그런데 그 사이에 쓸 만한 경호 인력을 구했단 말인가?
행동력이나 능력만큼은 자신의 상상 이상이었다. 세계 최고의 금융 재벌이 괜히 붙여준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한서진은 밖으로 나섰다. 일층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최수한이 그를 보고 인사하다가, 말끔해진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그럴 수밖에, 어젯밤만 해도 만신창이었던 사람이 하루 만에 말끔해졌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네 명의 남녀를 소개해주었다.
“대표님이 앞으로 데리고 다니실 경호원들입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경호할 겁니다. 연인으로 위장할 수 있게 일부러 남녀로 구성했습니다.”
“음, 고맙습니다. 근데 정말 빠르시네요.”
“감사합니다.”
경호원들은 허리를 숙이며 한서진에게 인사했다. 아마 그들도 한서진의 정체를 놓고, 머릿속은 대단히 복잡할 것이다. 일단 공원을 개조한 이 대저택부터 범상치 않으니. 단독 주택으로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가 아닐까.
한서진은 포르쉐에 올랐다. 시동을 거는데, 문득 어젯밤의 그 종이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소리를 내어 읽었다.
“기억해라. 나는 한서진이 아니고, 이곳의 모든 것은 꿈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적힌, 저주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하지만 그것은 끊어져 있었다.
‘분명히 내 필체야. 하지만…….’
자신은 이런 글귀를 쓴 적이 없다.
한서진은 불현듯 그 신비한 꿈을 생각했다. 이 종이에 적힌 글귀도 어쩌면 그 꿈과 연결된 것은 아닐까?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종이의 글귀가 몹시 신경 쓰이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는 전화를 꺼냈다. 메모 어플을 뒤져 어떤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진성제약 차장 박현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다. 그는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며 거듭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사람을 찾아도 되지만…… 떠들 입이 많아지는 건 좋지 않지.’
결심을 굳힌 그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두 번을 채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박현준 차장입니다.」
몹시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그리고 이쪽을 기억하는 듯한 목소리다.
하긴 15억이라는 거금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행운이었겠지.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박 차장님.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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