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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02화 (102/609)

00102  특허 전투  =========================================================================

“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왕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에 섰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미스릴과 오리할콘을 긁어모아 구축한 마법진이었다.

저번과 다른 점은, 의식을 보조할 마법사와 사제들이 일절 없다는 것. 오직 지팡이를 든 노신하만이 함께 했다.

지팡이에 박힌 수정이 빛을 내뿜자 공명하듯이 마법진이 떨리기 시작했다.

“Ciaruuda!”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왕을 집어삼켰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던 왕은 불현듯 눈을 번쩍 떴다.

의식은 또렷했다. 고통도 일절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캔버스의 그림에서 떨어져 나가는 물감처럼, 세상이 조각조각 파편 나고 있었다.

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뭐라고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외침마저 부서져 떨어졌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의식을 빨아 들였다. 왕의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한서진은 H반도체 사옥에 도착했다. 주차장을 통과하기 전, 잠시 차창을 내려서 빌딩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빌딩. 신기하게도 오늘따라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두 손으로 언제든 주저앉힐 수 있을 듯한 자신감마저 든다.

주차장 입구를 유유히 통과한 한서진은 로비에서 당직 직원을 찾았다.

“지금은 영업시간이 모두 끝났는데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백세완 실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마 실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 확인되었습니다. 저쪽으로 가셔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한서진은 성큼성큼 걸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투명한 엘리베이터 벽을 통해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봤다.

마치 두 발 아래에 서울 전역을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층수를 확인했다.

「31층입니다.」

간접등이 켜진 복도는 살짝 어두운 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서진은 곧바로 실장실을 찾았다.

“……기어이 왔군.”

책상에 앉아 있던 백세완이 팔짱을 끼고 지그시 바라봤다. 어딘지 삐딱한 시선이다. 표정 가득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다행히 기다려주셨군요.”

“그 발칙한 얼굴을 한 번 봐야겠어서 말이야. 그래, 이제 만족스러운가?”

“만족은 제가 원하는 대답을 들어야 얻겠지요.”

“저런, 어쩌나? 그건 진성그룹에 가서 찾아야 할 텐데.”

백세완은 차갑게 웃었다.

“진성그룹의 연구비 문제를 왜 여기 와서 따지고 있나?”

한서진도 지지 않고 그를 쏘아 보았다.

“어쩌죠? 저는 선배님한테 따져 묻고 싶은데요.”

“참 발칙하군.”

“왜 랩에 손을 댔습니까? 어쨌거나 선배님도 박효산 교수님 제자 아닙니까?”

“학창 시절 잠깐 수업 몇 개 들었다고 어떻게 제자가 되나? 애초에 혈통부터 다른데.”

백세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한 냉소가 깔보듯이 바라본다.

“한서진. 네놈이 어려서 아직 잘 모르나 본데.”

“…….”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 지배하는 인간, 지배당하는 인간. 설마 네가 지배하는 쪽이라고 생각하나?”

한서진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럼 선배님은 지배하는 쪽입니까?”

“적어도 네놈이 지배당하는 벌레인 건 확실하지. 그래도 나름 쓸모가 있어 귀여워해줬더니, 감히 맞먹으려 들어?”

한서진은 코웃음을 쳤다. 은근한 겁박, 하지만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큰 사람들을 만났던 경험 덕분이다. 니트론, 크렘,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백세완의 그릇은 한없이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더욱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었다.

“선배님은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실수? 네놈이 아니라?”

“회사 경영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올바르고 공정하게 경쟁을 해야지, 남을 짓밟고 뺏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지금 즉시 연구실 방해공작을 그만 두십시오.”

“이봐, 한서진.”

백세완은 한 걸음 내딛으며, 싸늘한 조소를 보냈다.

“네가 착각하고 있는데, 누가 너를 밟고 있다면 그놈의 발목을 잘라버리든가, 아니면 비굴하게 사정을 하는 거야. 지금처럼 네가 뭐라도 된 것 마냥 지껄이는 게 아니라. 네놈이 지금 나와 마주보고 있을 자격이 된다 생각하나?”

“적어도 전화 한 통이면 선배님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죠.”

“네놈이?”

“아시잖습니까. 제가 회장님과 직통으로 연결 가능하다는 거.”

회장님이란 말에 백세완은 잠시 흠칫했지만, 곧 어이없다는 듯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회장님께 전화해서 뭘 하려고? 회장님이 내 큰아버지 되시는 걸 그새 잊었나? 그분이 네놈 편을 들어줄 것 같아?”

“지금 SJ인더스트리 때문에 H반도체가 꽤 곤란에 처했죠, 아마?”

SJ인더스트리 이야기가 나오자 백세완은 또다시 흠칫했다. 이번에는 얼굴이 조금 더 심각해졌다.

“너, 설마…….”

“SJ인더스트리와 협상이 잘 되지 않고 있잖아요? 그 원인이 선배님께 있다는 걸 알면, 그분 표정이 참 볼만 하지 않을까요?”

“헛소리 마, 비글 건은 이미 회장님도 알고 계신다.”

“정 팀장님이 선배님한테 강탈당하듯이 뺏겨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미국으로 떠났다는 것까지는 모르시는 것 같던데. 그리고 정 팀장님이 이를 가는 게 회사가 아니라 선배님이라는 것도.”

백세완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눈빛에서부터 드러나는 감정의 동요, 제대로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백철중은 비글에 얽힌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정지원이 백세완에게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SJ인더스트리와 타협이 어려워 회사가 휘청거리는데, 그 원인이 백세완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백철중 회장이 어떻게 나올까?

“연구실은 그만 건드리시고, 교수님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사과하세요. 그럼 저도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네놈…… 협박을 하려고 찾아온 거냐.”

“대화와 협상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선배님이 그동안 몸소 가르쳐 주셨잖아요.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백세완은 말이 없었다. 짜릿한 승리감에 도취한 한서진은 등을 돌렸다.

백철중 회장의 눈에서 벗어나기 싫다면, 백세완은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이제 여기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잠깐.”

“더 할 말이 있나요?”

한서진은 왜 그러냐는 듯이 돌아보다가 흠칫했다. 백세완의 표정이 진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그런 더러운 말을 지껄여놓고, 마음대로 가시겠다?”

백세완은 인터폰의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덩치 좋은 네 명의 경호원이 들어섰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한서진의 얼굴이 굳었다.

두 명은 문을 잠그고 막아섰으며, 두 명은 한서진의 옆에 서서 팔을 강제로 잡았다. 그는 반항했으나 장정 둘이서 옆에서 붙들고 있으니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지원이가 이건 안 알려주던가?”

백세완은 천천히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탄탄한 팔 근육이 드러났다.

서랍에서 금속 너클을 꺼낸 그는 오른쪽 주먹에 끼고 능숙하게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촉감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던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입에서 독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내가 예전에 좀 놀았다고 말이야.”

퍽, 하고 주먹이 쏜살처럼 날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한서진은 축 늘어진 채,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본인 스스로도 헷갈렸다. 여전히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양쪽의 팔뚝, 그리고 얼굴과 흉부,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만이 또렷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잘 견딘다 했더니, 겨우 이 정도네. 후배님, 아무래도 맷집을 좀 더 키워야겠어.”

“…….”

고개가 축 늘어진 터라,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그래도 비굴하진 않아서 멋지군. 알고 있나? 난 후배님처럼 끝까지 빌지 않는 친구들이 참 좋아. 때리는 손맛이 난단 말이지.”

“…….”

“아, 혹시 죽는 거 아닌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내가 범죄자도 아니고, 설마 후배님을 죽이기야 하겠는가? 집까지 별 탈 없이 보내줄 테니, 아무 염려 말게.”

독사의 숨결이 또다시 느껴진다. 그가 다시 바짝 붙은 것이다.

“교육만 제대로 시킨 다음, 말이야.”

너클을 낀 주먹이 또다시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너덜너덜해졌을지, 얼굴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비글, 아니 슈나우저 개발자라고 말하면 이 폭력을 멈출까? SJ인더스트리가 내 거라고 말하면 놀라서 무릎을 꿇으며 사죄할까?

그러나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돼버린 이상, 백세완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곳은 엄연한 그의 소굴이고, 지금 자신은 그저 무력하기만 할뿐이지 않은가.

“비명을 지르지 않아서 참 좋네. 난 후배님 같은 친구가 정말 마음에 든다네.”

육체에 새겨지는 원초적인 폭력.

그것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두려움을 불러왔다. 두려움은 곧 수치심으로 변했다. 수치심은 다시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왜 이런 부당한 억압을 뒤집어써야 하는가?

주먹과 발길질이 온몸을 뒤덮는다. 양쪽에서 붙들고 있던 경호원들은 팔을 놓아버렸고, 한서진은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백세완은 집요하게 구둣발로 짓밟으며, 폭력을 즐겼다.

진득한 구타를 잠깐 멈추고, 그가 조롱했다.

“이제 좀 알겠나? 지배당하는 벌레가, 지배하는 인간에게 기어오르면 어떻게 되는지?”

“…….”

아무 말도 뱉을 수 없었다. 숨을 달싹이는 것조차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힘들었다.

두려움은 수치심으로, 수치심은 분노로, 그리고 분노는 텅 빈 공허로 변해갔다.

바닥에 엎어진 채 짓밟히고 있는데, 문득 벽 쪽에 있는 대형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대형 거울에 자신과 백세완의 모습이 생생하게 비치고 있었다.

짓밟히고 있는 자신, 그리고 짓밟고 있는 그의 모습이.

‘……!’

불현듯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내면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거울 속의 눈동자, 아니 그 안에 똬리를 튼 심연이 빤히 자신을 주시했다. 그 차가운 조소가 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무엇하고 있는 거냐고.

순간,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경련이 일어났다. 의식이 부서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질 듯이 펄떡거렸다.

“이 친구, 이제 좀 힘든가 보군.”

백세완은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폭력을 멈췄다.

바로 그때,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이 터져 나왔다. 백세완과 경호원들은 당황해서 눈을 가리며 물러났다.

“뭐, 뭐야! 갑자기 웬 빛이?”

섬광이 멎었지만, 순간적으로 잃은 시력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백세완은 눈을 감은 채로 당황해서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불쑥하고 뻗어 올라온 손이 그의 목을 잡았다. 켁, 하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손은 가볍게 그를 높이 들어올렸다. 78kg가 넘는 건장한 남자를 한손으로 거뜬히 들어 올린 것이다.

그제야 잃은 시력이 돌아왔고, 백세완은 건방지게 자신을 들어 올린 이를 볼 수 있었다.

‘하, 한서진?’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녀석이 어떻게?

남자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을 쥐어뜯듯이 우악스럽게 파고들었다.

“지금 감히, 짐의 몸에 손을 댄 것이냐?”

============================ 작품 후기 ============================

여기서 멈추면 상도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다음편을 어떻게 이어 써야할지 생각이 안 나서요.ㅠㅠ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후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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