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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01화 (101/609)

00101  특허 전투  =========================================================================

「내 전화를 기다렸다고?」

또렷한 불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한국을 쥐락펴락하는 재벌 총수가 화를 내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긴장감이 짜릿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있었다.

“예, 전화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네, 정신이 나갔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왜 내 딸한테 접근한 거지? 내 주의가 그리도 우습게 들렸나?」

백철중은 지금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10억짜리 포르쉐도 선물했고, 포옹도 했고, 심지어 사무소를 열었을 때는 남 몰래 찾아와주기까지 했다. 술에 취한 채 술 친구를 해달라며 따로 부르기도 했고.

그러나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한 마리의 화난 범이 되어 있었다.

“따님한테 접근했다니요? 오해이십니다.”

「방금 자네가 하나를 만난 걸 알고 있네!」

“만났습니다만, 그건 단지…….”

「이봐, 한서진이! 너 이놈, 이 백철중이가 그리도 우습게 보이냐! 네놈이랑 소주잔 좀 기울이고, 칭찬 몇 마디 해줬다고 벌컥 내 사위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나! 무엇보다 우리 하나는 아직 열여덟 밖에 안 됐어! 어딜 넘볼 걸 넘봐야지!」

설마 했는데, 그 얼굴로 정말 열여덟이었구나.

잠깐, 그럼 백철중 회장이 60세일 때 태어났다는 뜻이지 않은가? 한서진은 대단하다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당장 여기로 와!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오늘 내가 부러뜨리고 말겠어!」

어지간히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자신의 주의를 어겨서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송하나를 아끼는 마음에서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한서진은 차분히 대답했다.

“싫습니다.”

「…….」

순간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아마 백철중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을 테지. 언제나 떵떵거리기만 한 재벌 총수가,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한테 ‘싫다’라는 대답을 어디 들어보기나 했겠는가.

「……자네, 미쳤나?」

호칭이 ‘네놈’에서 ‘자네’로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지나친 충격이 오히려 이성을 되돌려놓은 모양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냥 싫습니다.”

「……이봐. 한서진이.」

“제가 송하나 학생을 만난 건 사실입니다만, 그건 따로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입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전 별다른 흑심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혼자 오해하시는 겁니다.”

「……그럼 내 전화를 기다렸다는 건 무슨 말인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그걸 전혀 모르시는 듯하군요.”

「말해보게.」

“해야 합니까?”

「…….」

전화기 너머로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한서진은 어쩐지 이 상황이 즐거웠다.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충족감이 느껴졌다.

「설명을 해보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의외였다. 이번에는 ‘미쳤냐?’라고 물어보지 않다니.

한서진은 차분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백형진 사장님 일 때문입니다.”

「……형진이가?」

“네, 그래서 회장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헌데 회장님께서는 송하나 학생 이야기만 하시는군요. 제가 그 학생을 만난 건 다른 확인할 게 있어서였는데, 엉뚱한 오해만 하시면서요.”

백철중 회장으로 하여금 어떤 오해를 품게 하기에는 충분히 교묘한 거짓말이었다. 예상대로 백철중은 바로 걸려들었다.

「형진이가 자네한테 무슨 일로?」

“글쎄요, 전 오히려 회장님께서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신다는 게 의아하기만 할 뿐입니다.」

의뭉스럽게 그지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백철중은 충분히 알아들은 듯했다.

「……내가 모르는 일이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었군.」

“저는 당연히 회장님께서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만났나?」

“비슷합니다만, 송하나 학생에게 물어봐도 만족스러운 대답은 얻지 못하실 겁니다. 제가 워낙 돌려 말했으니까요.”

그렇게 한서진은 교묘하게 사실 관계를 비틀었다. 백철중은 송하나를 추궁해도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말해보게. 어서.」

“어차피 제가 말씀드려도 믿기 어려우실 텐데, 직접 확인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감히 나를…….」

“그만큼 덩치가 큰 이야기라서요.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회장님은 믿지 못하실 겁니다.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훨씬 빠릅니다.”

「…….」

백철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한서진은 문득 그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일개 사원 출신이 이렇게 반항한다고 분개하고 있을까, 아니면 진지하게 그룹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까.

「근시일 내에 다시 전화하지.」

“늦은 걸로 저를 타박하셔서는 안 됩니다. 벌써 저는 천억을 제안 받았거든요.”

천억.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제 백철중의 의중에 달렸다.

다음 날.

연구실에 들른 한서진은 분위기가 술렁이는 걸 느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영 어수선했다. 그는 안홍철을 붙잡고 물었다.

“선배님,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따라 랩 분위기가 영 왜 이럽니까?”

“아, 너 못 들었냐?”

“무슨 일인데요?”

“진성그룹이랑 문제가 좀 생겼어.”

“진성그룹이요?”

한서진은 빠르게 이용무 부회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천억에 1%, 그에 대한 대답을 아직 안 줬다고 벌써부터 수작질이 들어온 건가? 하지만 왜 자신이 아닌 연구실에?

“EPR 프로젝트 기억하지?”

“당연하죠.”

자신의 힘으로 완수시킨 프로젝트인데 기억을 못할 리가. 물론 안홍철도 그의 기억력을 확인하기 위해 물은 게 아니었다.

“그때 진성그룹에서 원래 연구에 책정했던 지원금이 1조 원이었거든. 근데 우리가 조기종결하면서, 남은 5,000억도 학술 연구 목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을 했었단 말이지.”

“그랬지요. 아, 설마?”

“얘들이 갑자기 말을 번복했어.”

한서진은 주먹을 꾸깃 쥐었다.

당시 진성전자는 남은 연구 지원금 5,000억을 장기 분할로 연구실에 지급하기로 약속을 했다. 심지어 공증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걸 번복했다고?

“공증까지 했는데 번복이 가능해요?”

“무슨 소리야? 공증을 했든 안 했든 돈 쥐고 있는 놈이 안 주면 그만인걸.”

안홍철은 오히려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반문했다.

“몰랐어? 안 주면 그만이야.”

“…….”

“그래서 지금 교수님이 펄펄 뛰고 있잖아. 소송 건다 뭐다 하면서 화 엄청 내고 계셔.”

“소송 걸면 받을 수 있나요?”

“그야 이기면 받을 수 있지. 지면 못 받는 거고.”

“공증까지 했는데도 질 수 있어요?”

“적어도 재판을 질질 끌 순 있지.”

한서진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였다. 그는 얼른 박효산 교수를 찾았다.

“교수님.”

“왔냐.”

생각했던 것보다 박효산은 평온해 보였다. 이미 충분히 분노를 터트린 모양이었다. 구석에 던져진 채 박살난 전화기를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더러운 싸움에 또 말렸다.”

“……더러운 싸움이요?”

한서진은 의아했다. 더러운 수작이 아닌, 더러운 싸움이라니. 왠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에 한서진은 퍼뜩 생각났다. EPR 프로젝트 당시 감사팀에서 일일이 연구비 지출 내역을 확인했던 일이.

“이서나 사장 쪽 라인이 수작을 부렸어.”

“교수님, 그럼?”

“이용무 회장 짓은 아니다. 조금 전에 최만재 이사가 전화 와서 사죄했다. 이서나 사장 파벌이 지금 잔존 연구비 오천억 지원을 가지고 분탕을 치고 있다고.”

어쩐지. 특허에 관해서 그 뒤로 이렇다 할 연락이 없다 했더니, 이런 일이 있었구나. 조금 납득이 되었다.

“이서나 사장이 작정하고 이용무 부회장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남동생인데, 누나가 봐주는 게 일절 없네. 하여간 재벌들이란…….”

박효산 교수는 혀를 끌끌 찼다.

한서진은 불현듯 생각난 게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서나 사장과 백세완 실장이 친하지 않았나?’

연구실 내부에서 진성전자를 찌를 칼이 되어달라고 백세완이 자신에게 부탁했던 일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그 날 이서나와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나.

그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백세완 실장님, 기어코 이러시겠다는 겁니까?’

「덕분에 용무 쪽 이사들 발언권이 쏙 들어갔어. 오랜만에 기분이 통쾌해졌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선배님.”

「전부 백 실장 조언 덕분이야. 고마워.」

“아닙니다. 제 조언이 아니었어도 선배님이 거느린 사람들이 생각해냈을 방법입니다.”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창 너머 거리를 내려다보며, 백세완은 비릿하게 웃었다.

“이미 끝난 프로젝트에 잔존 연구비를 지원하겠다니요, 그게 경영자가 해도 될 약속입니까?”

「그러게 말이야. 용무가 왜 그런 악수를 뒀는지 몰라. 오천 억이 무슨 푼돈도 아니고.」

수화기 너머 이서나는 혀를 끌끌 찼다. 애석해하는 말투와 달리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백세완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덕분에 용무한테 타격을 좀 줬네. 이런 거 한두 건만 더 터지면 주주들 신임을 완전히 잃게 할 수도 있을 텐데.」

“저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선배님.”

「고마워. 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백 실장.」

전화가 끊어졌다.

백세완은 한껏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울 도심의 야경을 내려다 봤다.

칼같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던 한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이가 갈리곤 했지만, 지금은 즐거운 감정만이 피어오른다.

매출 0원인 설계 사무소가 당장 기댈 곳이라고는 박효산 연구실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구비 지원을 보기 좋게 끊어놓았으니, 녀석이 얼마나 당황해하고 있을지 눈에 선하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짜릿했다. 그는 테이블에 따라놓은 와인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맛이 제법 짜릿했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흘끗 발신인을 확인하니, 예상 외로 한서진이었다.

“이렇게 벌써?”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엉덩이가 뜨거웠으면, 일이 벌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연락을 한단 말인가.

“자존심 한 점조차 없는 친구군.”

백세완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신호가 울리는 것을 느긋하게 즐겼다. 길어지는 신호음을 들으며, 지금 녀석은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죄고 있을 것인가.

그걸 상상하니 가슴을 찬물로 씻은 듯이 청량했다. 그는 몇 번 더 신호가 울리기를 기다렸다가,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날세. 무슨 일인가?”

「……몹시 늦게 받으시는군요.」

“내가 자네 전화를 바로 받아야 할 사람인가?”

「…….」

잠시 말이 없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아마 분함을 참느라 입술을 씹고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흡족했다.

「진성전자가 박효산 교수님 연구실에 지원해주기로 한 연구비가 지급 중지됐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근데 왜 그걸 나한테 말하지?”

백세완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는 H그룹이지, 진성그룹이 아닌데 말이야.”

「실장님은 진성물산 이서나 사장님과 친하지 않습니까.」

“그게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되나?”

「됩니다.」

슬슬 불쾌해진다. 백세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한 대표.”

한 대표. 그것은 조그만 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는 그를 향한 명백한 조롱을 담은 호칭이었다.

“자네가 지금 누구와 통화 중인 걸 아나? 나, 백세완이야. H그룹의 일가란 말이야. 자네 같은 사람이 감히 함부로 올려다볼 사람이 아니란 말일세.”

「선배님.」

“그런 버릇은 대관절 어디서 배웠지? 내가 분명히 실장님이라고 부르라 했을 텐데.”

「선배님, 지금 봬야겠습니다.」

“하, 미쳤군. 내가 자네가 원하면 바로 만나주는 그럼 사람인 줄 아나?”

「제 말을 들으셔야 할 겁니다, 선배님. 그렇지 않으면 백형진 사장님께서 선배님을 쳐낼지도 모르니까요.」

“……형님께서?”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백세완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곧 표정이 차가워졌다.

“자네, 지금 누구를 농락하려 드는 건가? 정녕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은 건가?”

「한 시간 후, H반도체 사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일정을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이 미친……!”

분노에 찬 백세완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한서진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때 뵙겠습니다, 선배님.」

============================ 작품 후기 ============================

"내가 니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주는 사람인 줄 알아?!"

"응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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