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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00화 (100/609)

00100  특허 전투  =========================================================================

천억에 1%.

이용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후하게 부른 조건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특허권자에게 이만한 계약금을 제시하는 국내 대기업은 없다. 보통은 계약금 몇 억으로 후려칠 뿐이다.

그래서 황 실장도 무척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기준에서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액수였던 것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발명이라 해도, 이런 엄청난 액수를 주고 사들이겠다니.

“1%라고요?”

이용무는 나무라듯이 말을 잘랐다.

“아니지, 퍼센트가 아니라 천억에 집중을 해야지.”

“…….”

“특허 하나로 얼마를 벌든, 그 총액이 천억에는 훨씬 미치지 못할 걸세. 나는 자네의 기술을 높이 사서 무조건 천억은 보전해주겠다는 걸세. 덤으로 상여금 겸 1%의 로열티도 주겠다는 거지.”

“음…… 아무튼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럴 테지. 천억이 어디 일반인이 평생 구경이나 해볼 수 있는 돈인가?”

이용무는 반드시 넘어올 거라 확신했다.

한서진이 비글 개발팀에 있었던 건 확인했다. 당시 개발팀원으로서 그가 받은 것은 연봉 세 배의 증가뿐.

그러나 자그마치 천억이다. 아무리 대단한 특허라 해도 어느 누가 미쳤다고 이 돈을 주고 권리를 사겠는가.

‘오직 진성그룹만이 가능하고, 해줄 수 있는 특혜다.’

그런 자신감으로 충만한 이용무는 당당하게 한서진의 눈을 주시했다.

“국내 어느 기업도 이런 조건을 제시하진 못할 걸세. 해외라고 다를 것 같나? 힘없는 개인의 권리를 후려치는 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다 똑같아. 그나마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이처럼 제값을 주고 사려는 걸세.”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럴 테지. 충분히 생각해보고, 여기로 연락을 주게.”

이런 좋은 조건에 뭘 더 생각하느냐, 라는 불쾌함이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대신 이용무는 끝까지 느긋한 태도를 보이며,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하게.”

용건은 끝났다.

이용무는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사무소를 나섰다.

차량에 올라 출발하자, 조수석의 황 실장이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회장님, 천억은 너무 과분한 조건이 아닐까요.”

“찔끔찔끔 지를 바에는 차라리 강하게 나가는 게 나아요. 평범한 일반인이 어디 천억이라는 돈을 상상이나 해봤겠습니까. 아마 오늘밤 잠도 제대로 못 이룰 겁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공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못 들었습니까? 그 특허에 가장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고. 그것까지 문제 없이 알아내야 하는 겁니다. 일이백억으로는 턱도 없어요.”

이용무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었다.

“써야 할 때는 크게 써야 합니다. 그게 바로 큰 사업가가 지녀야 할 마인드입니다.”

「크게 좀 쓰지, 쩨쩨하게 1%가 뭐냐.」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정지원이 박장대소를 했다. 의자 뒤로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격앙되게 웃어댄다.

「5nm공정 원천기술을 겨우 천억에 1%? 이야, 그 동네는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일단 심사 진행해야죠. 근데 출원하자마자 진성그룹에서 냄새를 맡을 줄은 몰랐네요. 누가 보면 특허청이 진성그룹 계열사인 줄 알겠어요.”

「그 나라가 다 그렇지.」

냉소가 다분한 목소리. 한서진은 그가 얼마나 큰 실망감을 품고 미국으로 떠났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진성에서 냄새를 맡았으니 이제 H반도체도 연락이 오겠네. 그리고 여기저기서 하이에나 떼들처럼 몰려들 테지. 어쩌면 IBM이나 윈텔에서도 연락이 갈 수도 있겠어.」

“그러면 더 좋지요.”

한서진은 상상만으로도 유쾌한 듯이 키득거렸다.

“제대로 축제를 벌일 수 있을 테니까요.”

잠시 침묵하던 정지원이 한 마디 했다.

「너, 은근 사악해졌다.」

한서진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사악하다뇨, 그저 보고 싶은 게 있을 뿐입니다.”

H반도체에서 연락이 온 건 생각보다 빨랐다. 이용무 부회장이 방문한 다음 날 바로 연락이 온 것이다. 특허청 내부 기밀이 이렇게 쉽게 공유되는 것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의외로 연락을 취한 이는 백세완이 아니었다. 한서진도 이름만 들어본, H반도체 사장 백형진측이었다.

백형진, 올해 50세로 백철중 회장의 장남이 된다. 그야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 다만 연락을 취한 것은 백형진 본인이 아니라 그의 측근이었다.

「실장 하진우라고 합니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하진우는 곧장 약속을 잡고 부랴부랴 한서진을 찾아왔다. 그는 40이 갓 넘은, 샤프한 느낌의 비즈니스맨이었다.

“귀하가 출원한 특허의 독점 사용권을 설정 받고 싶습니다. 기간은 10년, 계약금 100억에 로열티는 매출의 1%를 드리겠습니다.”

H반도체의 조건은 진성전자와는 많이 달랐다. 특허권 양도가 아닌 독점 사용권 설정이었고, 계약금과 수익 배분의 비율도 상이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H반도체의 조건이 조금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한서진은 의뭉스럽게 반응했다.

“아직 특허가 결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렇게 후한 대가를 제시하시는 게 이상하네요.”

“다른 오해는 마십시오. 저희 회사는 귀하의 특허가 반도체 시장에 혁신을 불러올 거라 믿습니다. 부디 저희와 함께 윈윈하지 않겠습니까?”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보아하니 아직 H반도체는 이용무 부회장이 이미 다녀갔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만약 알았다면 실장급 인물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지.’

결국 근시일 내에 알게 될 것이다. 특허에 관해서 자사만이 알고 있는 게 아님을. 그럼 경쟁이 붙을까, 아니면 담합을 할까?

오후에는 대학 연구실을 들렀다. 현진국, 박효산 교수와 함께 미스릴과 미지의 언어에 관한 논의를 하고, 학과 사무실에 들러 학교 돌아가는 소식을 들었다.

“과 배당 예산을 늘린다고? 잘 됐네.”

“지금 반도체 시장이 붐이잖아요. 제대로 밀어주려나 봐요. 근데 형, 요즘 왜 이렇게 수업도 안 나오세요? 이러다가 출석 부족으로 F 맞으면 어쩌시려고요?”

“지금 일 때문에 여러모로 바빠. 유급하면 하는 거지, 뭐.”

“와, 대박 여유. 역시 사회인은 달라.”

“먼저 간다. 수고들 해라.”

한서진은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학과 사무실을 나섰다.

포르쉐에 탄 그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저장하지 않은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며 몇 번이고 망설였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섯 번 정도 신호가 울린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어서 그럴 테지. 왜 자신이 전화를 걸었는지 당황해서 생각하느라 말이 없는 것이리라.

“송하나 학생?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서진 대표님이시죠?」

“대표라는 호칭은 너무 거창하네요.”

「어쩐 일이세요? 회장님이 연락 못하게 막으셨을 텐데.」

“알고 있었나요?”

「제가 한 대표님을 만난 걸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럼 당연히 한 대표님한테 한소리 하셨을 테니까요.」

차분한 목소리에서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볼 거 없는 놈팽이가 막내딸한테 들러붙는 것을 용납 못할 테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저를요?」

아까보다 조금 커진 음색. 상대가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곤란한가요? 아니면 싫은가요?”

「……좋아요. 마침 학교도 끝났어요.」

“학교가 어디죠? 내가 거기로 갈게요.”

「그러실 필요는 없고요. 사당동 xx사거리에서 봐요.」

“그러죠.”

사당동이라면 여기서 가깝다. 전화를 끊자마자 한서진은 곧바로 엑셀을 밟았다.

약속장소인 사거리에 도착한 한서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막 전화를 걸려는 순간 조수석 유리창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났다. 옆을 돌아보니 문이 열리며 자연스럽게 송하나가 탔다.

“안녕하세요.”

“먼저 와 있었네요.”

“네.”

송하나는 차분히 돌아보며 끄덕였다. 그녀는 붉은 체크무늬 치마에, 흰 블라우스 위로 고동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어느 학교인지는 몰라도 교복 센스가 제법 좋다고 생각했다.

“조심하세요. 기사님한테 둘러대긴 했는데, 회장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따님 사랑이 극진하시군요.”

“참견이 심한 편이시죠.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한서진은 픽 웃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누가 따라오는 듯한 느낌은 아직까지 없었다.

운전을 하면서 한서진은 힐끔 송하나를 살폈다. 그녀는 턱을 괸 채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흰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볼륨감과 치마 밖으로 길게 뻗은 다리는 시선을 빼앗는 매력이 있었다.

“놀랐죠?”

“……조금요. 저한테 연락하실 줄은 몰랐어요. 저어, 그런데.”

송하나는 똑바로 그를 돌아보다가 물었다.

“저 아직 미성년자인 건 알고 계시죠?”

“네?”

그걸 왜 몰라?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한서진은 이내 말뜻을 깨닫고 속으로 폭소했다.

겨우 웃음을 참으며 그가 말했다.

“송하나 학생 예쁘긴 한데, 나도 백철중 회장님한테 맞아 죽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다행이네요.”

그녀는 전혀 창피해하지도 않았다. 차분한 것일까 감정이 없는 것일까.

그런 고요함이 한서진은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송하나를 빤히 주시했다.

통찰안이 발동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

의외의 결과에 한서진은 조금 당황했다. 통찰안이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던 것이다. 적합, 부적합, 반적합, 어느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통찰안이 사라졌나 놀란 그는 서둘러 다른 물건에 확인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통찰안은 제대로 작동했다.

“왜 그러시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직 말씀 안 하셨어요. 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여기서 할까요? 아니면 어디 카페 같은 곳이라도?”

“여기서 해주세요. 오래 끌면 저도 곤란해요.”

송하나는 핸드폰을 꺼내 살짝 흔들며 액정에 잔뜩 찍힌 부재중전화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전화에 불이 나고 있거든요.”

“그 전에 잠깐, 송하나 학생은 왜 내가 보자는 말에 군말 없이 나왔는지 물어도 돼요?”

“지금 제가 그런 질문을 받을 입장은 아니잖아요?”

“아아, 그런가.”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핸들을 옆으로 꺾었다. 차가 크게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요즘 제가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이 몇 있어요.”

“혹시 저도 그 중 하나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되게 능숙하시네요.”

“설마 그럴 리가. 그냥 갑자기 어떤 사람의 어떤 얼굴이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불러낸 거예요.”

“……제 얼굴이 보고 싶었다는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송하나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부끄러움인지, 아니면 당혹스러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서진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송하나 학생을 불러내면 회장님이 어떤 얼굴을 할까, 갑자기 그게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

“내가 그분한테 참 감정이 복잡해서요.”

“……아빠를 싫어하세요?”

“나도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회장님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아니면 넘어서고 싶은지.”

송하나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한서진은 일부러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난 송하나 학생한테 별 관심은 없어요. 미성년자고, 재벌 외동딸이잖아? 애초에 쳐다봐서는 안 될 나무지.”

“…….”

“근데 굳이 회장님이 날 불러다가 경고를 주시더라고. 그래서인가, 내내 머릿속이 복잡하더라고요. 나도 처음 알았어요. 나한테도 내세우고 싶은 자존심이 있었구나, 하고.”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를…….”

“H그룹은 머지않아 H반도체를 뺏길 거예요.”

“……네?”

송하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평소의 차분함을 벗어던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 한서진은 자문했다. 저게 내가 보고 싶었던 얼굴인가.

“누가요? 설마…….”

“나라고는 안 했습니다, 송하나 학생.”

“…….”

“살짝 말해주는 거예요. 뭐, 회장님한테 말해도 좋고, 혼자만 알고 있어도 좋고. 어차피 회장님은 믿지 않으실 테지만.”

“…….”

“내 할 말은 이제 끝인데, 어디에 내려줄까요?”

“지금 내려주세요.”

송하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한서진은 차를 세웠고, 송하나는 지체 없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서진은 대답 없이 그녀를 배웅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왜 통찰안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나를 생각했다.

‘왜 송하나만 다른 거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백철중 회장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자네, 왜 내 주의를 무시한 건가?」

송하나와 단둘이 차에 있을 때도 잔잔했던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역동적인 두근거림을 차분히 누르며,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전화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의 가크성을 다루는 것은 언제나 어렵슴미당.

그래봐야 국왕 전하께서 강신하시면 다 끝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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