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98화 (98/609)

00098  특허 전투  =========================================================================

사무소에 출근을 했는데, 정지원이 귀신같이 먼저 알고 연락을 취했다.

「어떻게 된 거야? 5nm공정기술 특허를 신청했다며?」

그가 따지고 든 건 특허를 신청한 이유나, 자기에게 미리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에도 동시에 신청했어야지. 한국에만 신청하면 어떡해?」

“괜찮아요. 정작 중요한 내용은 빠져 있으니까.”

「……무슨 말이야?」

뭔가 느낀 것인지, 정지원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참 똑똑하고 감이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한서진은 그와 이야기할 때 참으로 편안했다. 한 마디만 툭 던지면 알아서 나머지 열 마디를 추론해내니까.

“그 기술, 스코브리아늄의 물질 반응력을 이용해서 실리콘을 가공하는 게 핵심이에요. 하지만 스코브리아늄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그 내용은 빠져 있죠.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

「……미끼구나. 이유가 뭐냐?」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천하의 정지원도 그건 짐작이 가지 않는지 바로 되물었다.

한서진은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사무소 밖의 풍경, 자동차로 복잡한 도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SJ인더스트리 사주라는 걸 알게 되면, 경쟁사 회장들이 어떤 얼굴을 할까 갑자기 궁금하더라고요.”

「굳이 밝혀서 좋을 건 없을 텐데. 평화로운 네 생활이 끝날 수도 있어.」

SJ인더스트리의 최대주주인 페이퍼 컴퍼니, ‘에스코너’는 세금에서 자유로운 북유럽에 본적을 두고 있다. 대기업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에스코너의 소유자가 한서진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도 SJ인더스트리가 제 거라는 걸 굳이 공개하고픈 마음은 없어요.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에 만족하니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은 집에 살고, 귀찮게 구는 사람 없고, 돈도 마음껏 쓰고, 지금이 딱 좋아요.”

「…….」

정지원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고, 한서진은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가끔 궁금하더라고요. 솔직히 진성그룹이나 H그룹이나 정말 대단한 회사들이잖아요? 제가 SJ인더스트리 오너라는 거 알면 그 사람들이 어떤 얼굴로 바라볼까, 하고요.”

「속물적인 생각이다.」

“조금 그렇죠? 저도 이런 제가 살짝 우스워요.”

「하지만 나쁘지 않지. 욕망에 충실할 줄 안다는 것도 좋은 거라고 생각해. 다시 말하지만, 속물적인 게 나쁜 것은 아니야.」

정지원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묻어 있었다.

「그런 욕망이 사람을 갈, 아니 발전시켜주기도 하니까.」

“잠깐, 지금 분명히 갈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혹시 갈려나간다고 할 때 그 갈인가요?”

「실수로 발음이 샜을 뿐이야. 아무튼.」

정지원은 당황한 목소리로 얼른 대화를 수습했다.

「조금 맛보고 싶다는 거지? 그게 어떤 기분인지.」

“네.”

「그럼 해외 특허는 출원할 필요가 없구나. 어차피 알맹이가 빠진 특허니 그들이 매달릴 수밖에 없겠군.」

“아, 지금 생각해보니 이거 잘하면 팀장님이 H반도체를 인수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안 그래도 지금 그 생각 중이었어. 이 상황을 어떡하면 인수합병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까, 하고.」

“역시. 전 팀장님을 믿었습니다.”

「난 오히려 H반도체보다는 진성전자를 한 방 먹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죠?”

「한국 사회에는 진성 장학생이 도처에 널려 있어. 특허청에 내가 아는 진성 장학생만 30명이 넘어. 특허청장도 어려서부터 진성의 후원 장학금을 받고 공부해서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지.」

정지원의 음색은 묘한 기대감과 냉정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아마 H반도체보다는 진성전자가 더 발 빠르게 움직일 거다. 정보력에서 진성그룹을 능가할 수 없으니.」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SJ인더스트리의 오너, 그런 지위를 재벌 기업이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조금은 느껴볼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팀장님은 이곳에 여러 모로 크게 실망하신 것 같던데요. 그래서 미국까지 가시고, 전혀 미련 없이 국적도 바꿔버리시고.”

「그 편이 여기서 사업하기 편해서일 뿐이야.」

“팀장님은 백철중 회장님이 어떤 분이라 생각하시나요?”

「……거인이지. 내가 재벌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그분이 거인이라는 것은 인정해.」

“다른 건 인정을 못하시는군요.”

「족벌경영 의식이 확고한 분이니까. 가족 외에 일원이 경영에 참가하는 것을 용납 못하시지. 그런 면에서는 옛날 사람이야.」

“……그런가요.”

「재벌 총수 중에선 가장 깨끗하고. 그 점만 아니라면 충분히 존경할 만한 분이지.」

정지원의 음색에 조소가 섞였다.

「물론 그 점이 가장 치명적이지.」

“그럼 진성그룹 이용무 부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글쎄, 직접 겪어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네. 욕심이 많지만, 아버지만한 능력은 못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한서진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팀장님에게 백세완 실장님은 어떤 사람이죠?”

「…….」

잠시 말이 없던 정지원은 무겁게 대답했다.

「친구였지. 그게 다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대답이었다.

한서진은 차분히 물었다.

“이 일로 저도 조금은 느껴볼 수 있을까요? 팀장님이 어떤 눈으로 회사를 보고 있었는지.”

예전에는 알 듯 말 듯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느끼고 있다. 정지원이 H반도체를 정말 싫어한다는 것을. 그러나 정지원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또 변했구나.」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정지원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좋은 거지.」

진성전자 연구팀은 곧바로 관련기술의 방어특허 개발에 들어갔다. 곧 수십, 수백 개의 응용기술이 특허로 만들어져 특허청에 접수될 것이다. 원천특허권자의 사지를 결박시키기 위해서.

원천기술이 개발돼도, 그걸 운용하기 위한 관련기술을 전부 선점하면 오히려 이쪽이 유리하다.

‘분명 귀에 익은 이름인데.’

이용무 부회장은 아버지, 이창용 회장이 입원 중인 진성의료원을 향하는 도중에도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는 잠시 생각을 지웠다.

“아버지. 몸은 좀 어떠신지요.”

“견딜 만하다. 회사는?”

“조금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회사 걱정은 마시고 건강 회복에 힘쓰세요.”

“D램 시장에만 매달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렇다고 SJ인더스트리와 지금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은 더 미련한 짓이다. 그 점을 잊지 마라.”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있으면서도, 이창용 회장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시장을 꿰뚫어보는 눈도 날카로웠다.

“걱정 마세요. 반도체 사업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

이창용은 그에 관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용무는 그 점이 궁금했다.

‘반도체는 우리 진성그룹의 자존심이자 전부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메모리 시장의 패권은 아직 쥐고 있다. SJ인더스트리가 메모리 개발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아직 실체는 없다. 메모리 시장을 기반으로 지금은 힘을 축적해야 할 때다.

병문안을 마치고 회사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아!”

머리를 강하게 치듯 불현듯 생각났다. 한서진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를.

‘워낙 실력 있는 친구라 내가 아끼는 제자입니다.’

‘저 녀석이 그럴 의지만 있으면 아마 최연소 교수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반도체 영역의 최고 과학자, 박효산 교수가 침을 튀겨가면서 자랑했던 학생.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반도체공학부 1학년입니다.’

차분하게 응시하던 그 눈빛이 생각났다. 이용무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그는 곧바로 최만재에게 전화했다.

“최 이사.”

「예, 부회장님. 지금 한서진이란 친구…….」

“그 친구, 한국대학교 반도체공학부에 다니지 않나요?”

「엇,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용무의 눈빛은 차가웠다.

“예전에 박효산 교수 연구실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납니다. 박효산 교수가 그 친구 없으면 연구 자체가 안 된다고, 최연소 교수도 될 수 있을 거라고 소개를 했어요.”

「대강 조사를 해본 결과 매우 실력이 뛰어난 천재적인 학생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H반도체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거군요.”

「예, 본래 회사 장학생으로 온갖 특혜를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번에 독립을 했다고 합니다. 작은 설계 사무소를 운용하면서 재학 중입니다.」

“회사 장학생? 실력은 확실하다는 거군요.”

「올해 반도체공학부 수석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신문에도 대서특필 됐었죠.」

“잠깐, 그럼 학부생이란 말입니까?”

이용무는 조금 당황했다. 1학년이라는 게 대학원생이 아니고 학부생이라는 뜻이었나?

「학부 1학년이지만, 실력은 정말 확실한 것 같습니다. 박사급 논문도 여럿 제출했고, 교수들 평판도 매우 좋습니다. 학부생이지만 박사 과정 대학원생들을 넘어섰다고 하더군요. 박효산 교수 랩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 친구가, 지금 설계 사무소를 한다?”

「확인을 해봤는데 그 특허,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만 신청한 것 같습니다.」

“동시 심사 중이라 아직 우리가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 학생이 특허 관련으로 해외에 나간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관련 업무를 위임받은 변리사가 있다는 것도 못 들었습니다. 아직 해외에 출원하지 않은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용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실력과 재능이 뛰어나지만, 늦깎이 신입생으로 들어간 천재. 나이는 이제 겨우 25세.

대강 견적이 나오지 않는가?

“이거, 일이 생각보다 수월해지겠는데요.”

「예, 그래서 저희 쪽도 한시름 놓고 있습니다. 틀어지지 않게 차분히 접촉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 친구, 지금 어디에 삽니까?”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집에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더군요. 아마 학교와 사무소를 주로 왕복하는 것 같습니다.」

“사무소 위치, 지금 바로 보내요. 내가 직접 찾아가보겠습니다.”

「부회장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최만재는 놀란 음성으로 반문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특허 심사 중인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 그리고 의심 조금 받으면 어떻습니까?”

「…….」

자신감 넘치는 이용무의 말에 최만재는 아무 소리도 못했다.

이 나라에서 진성그룹의 힘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다. 대통령조차 진성그룹 총수, 이창용의 눈치를 보는 나라다. 권력은 잠깐이지만 돈은 영원하니까.

하물며 세상물정 모르는 학부 1학년. 25살이라고 하지만 세상을 얼마나 겪어보았겠는가. 오십을 앞둔 이용무의 눈에는 그저 새파란 애송이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상황을 지금 황 실장에게 바로 보냈습니다. 추가로 보고할 내용이 있으면 황 실장에게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습니다.”

이용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앞에 배치된, 차량 실내 전화기를 들었다. 조수석에 앉은 황 실장이 얼른 받았다.

“지금 그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지. 학교든, 사무소든.”

============================ 작품 후기 ============================

출근길에 심심하지 않으시라고 한편 올립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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