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특허 전투 =========================================================================
출근을 한 최만재 이사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요즘 들어 회사에 올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리라. 아니, 일반 직원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지금 회사는 상갓집 분위기나 다름없었으니까.
다행히 주력 모델인 메모리 반도체 주문량은 아직 크게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AP쪽 주문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자체 생산 제품인 진성폰에 들어가는 물량 외의 주문은 하루아침에 0이 돼버린 것이다.
야심차게 준비하던 시스템IC 진출도 엎어졌다. 여기에 SJ인더스트리가 조만간 획기적인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D램의 수요도 급격히 줄어들 조짐이 보였다.
이런 분위기인데, 회사 나오는 게 즐거울 리가 있을까.
애널리스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부정적인 전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AP 반도체를 접는 것은 물론이고, 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하여 아예 반도체 사업 자체를 접어야 한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반도체 사업은 진성전자의 자존심이었다. 어떤 굴곡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진성전자를 일으켜 세운 거인, 이창용 회장은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심하게 깨지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의외의 인물이었다. 특허청에 근무하고 있는 박세원 과장이었던 것이다.
“아, 박 과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최 이사님. 통화 잠깐 괜찮으신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저기, 다름이 아니라 특허 출원 신청이 하나 들어왔는데, 이게 내용이 범상치가 않아서요.」
“특허요?”
최만재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싸늘하니 좋지 않았다.
「특허 목적은 실리콘 반도체 5nm 공정을 위한 기술입니다. 기존의 극자외선을 이용한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코브리아늄의 반응성을 이용한다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구체적인 실체심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범상치 않은 내용이라 전화 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5nm공정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특허 기술이라고요?”
「그게 아니라 실리콘으로 5nm 단위 공정을 하는데, 스코브리아늄의 반응 성질을 이용한다는 내용입니다. 스코브리아늄 그 자체를 반도체로 가공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최만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스코브리아늄 반도체를 만든 게 아니고, 실리콘 반도체 5nm 공정에 스코브리아늄을 이용한다고?
“일단 정확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혹시 제가 직접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나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대강 심사 과정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만이라도 부탁합니다.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힘써보겠습니다.」
최만재는 멍하니 있다가 얼른 간이 보고서를 요약했다. 박세원 과장이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다.
급히 이용무 부회장을 찾은 그는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보고를 했다. 물론 이용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결론은 누군가가 5nm 공정기술에 관한 원천특허를 신청했다는 겁니까?”
“그, 그렇습니다. 스코브리아늄의 반응을 이용하는 방식이라는데, 저도 도대체 감이 오질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어서…….”
진성전자는 현재 10nm와 7nm를 동시에 개발 중이었다. 헌데 5nm 원천특허가 출연되었다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제대로 찬물, 아니 얼음물 세례를 받는 셈이다. 어떻게든 확인이 필요했다.
“특허 신청자가 누굽니까?”
“죄송합니다. 그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게 누군지 빨리 알아내시고, 자세한 특허 내용도 알아내세요. 실현 가능한 방법인지도 서둘러 파악하시고요.”
이용무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요, 알겠습니까?”
최만재는 이글거리는 이용무의 눈빛을 보고 직감했다. 특허 신청자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불완전한 허위 특허라면 감히 진성 후계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완전한 특허라면…….
“박 과장님, 어떻게 확인해보셨습니까?”
「일단 우선심사 신청이 들어와서 IPC 분류는 끝났고, 현재 심사관들이 실체심사 중입니다.」
“벌써 실체심사라고요? 아니, 뭐가 그렇게 빠릅니까?”
우선심사라는 말에 최만재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빠르면 3개월 안에도 결정이 난다는 이야기 아닌가. 통상 1년 이상 걸리는 기간을 생각하면, 이쪽의 시간이 촉박했다.
「출원인도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것 같고, 심사관들 의견도 이견을 찾기가 어렵다는 쪽이 우세합니다. 제조 과정 동영상은 물론이고 특허 기술로 만들어진 5nm 시제품까지 동봉되어 있어요.」
“허어, 그게 정말입니까?”
최만재는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중이떠중이가 괜히 툭 던진 돌멩이가 아니다. 누군가 작정하고 출원한 기술이 분명했다. 시제품까지 동봉돼 있다니.
“혹시 제가 그 내용을 한 번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심사 중인 특허 내용을 외부에 유출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저로서도 이만큼이나 알려드린 것도 너무나 위험을 감수한 것…….」
“부회장님께서 이 일에 지대한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그 말에 상대의 숨소리가 일순 멈췄다. 진성그룹이란 거대한 그늘이 그의 머리를 뒤덮은 것이리라.
「이용무 부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분 말고 누구를 뜻하겠습니까?”
「이거 참…….」
망설이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재벌의 힘이 막강한 이 나라에서 최고 재벌인 진성그룹 후계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특허청 공무원이라고 해봐야 평범한 국민 중 하나다. 후환이 두려울 것이다.
“우리가 특허를 빼돌리겠다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어떤 내용인지 확인만 해보고 싶은 겁니다. 우리 회사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합니다.”
「그래도…….」
“유출은 절대 않겠습니다. 잠시 우리 쪽 사람들이 특허청 안에서 살짝 확인만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관계자들도 우리가 책임지고 설득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 번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최만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일단 신청된 특허를 빼앗는 것은 아무리 진성그룹이라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 특허심사위원을 비롯하여 모든 관계자를 매수해야 하고, 신청자의 입도 막아야 한다.
무리한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 반발을 감당하기 버겁다. 자칫 어느 하나라도 틀어지면 패악한 강도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들키지 않은 범죄는 두렵지 않지만, 공론화된 범죄 행각은 대그룹이라 해도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짝 확인만 하는 것은, 진성그룹의 힘으로 전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면, 특허 내용을 선점하지는 못해도 특허 봉쇄 전략을 펼칠 수는 있다.
원천특허를 응용하기 위한 주변기술을 무차별로 개발하여, 원천특허권자가 이쪽의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허 내용 확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진성그룹 반도체 사업부에서 고르고 엄선한 다섯 명의 연구원들은 비밀리에 특허청을 방문하고, 실체심사를 앞둔 특허내용을 낱낱이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신했다.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제품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천문학적인 장비를 통해 확인한 시제품은 틀림없이 5nm공정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이 확인 작업에서 시간낭비를 덜어준 결정적인 증거였다.
“다만 반도체의 절삭과 첨가 등의 공정에서 스코브리아늄의 반응력을 이용한 힘의 배열, 이게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 관한 명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럼 불완전한 특허가 아닌가?”
“다른 방법들은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빠진 그 내용이 이 특허기술의 핵심입니다.”
특허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스코브리아늄의 어떤 성질을 이용해 반도체를 미세하게 깎아냈다는 뜻이다. 그 과정이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정작 스코브리아늄의 그 성질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마 이 부분을 이유로 거절이유가 통지되겠군요.”
“그럼 특허가 반려되는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절이유를 보강해서 재신청을 하면 결정이 날 겁니다.”
최만재는 직감했다. 이 기술이 진성전자의 운명을 결정할 활로가 될 것이라고.
그는 특허출원인의 신상을 확인했다.
“서울 거주자로군.”
주소지는 서울 번화가의 한 오피스텔로 되어 있었다. 나이는 25살, 만으로는 24세. 매우 젊다. 이 점에서 그는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겨우 25살? 뭐가 이렇게 젊어?”
납득이 가지 않는 나이였다. 군대를 고려하면 이제 대학교 3학년 정도일 텐데, 이런 엄청난 특허를 혼자 힘으로 내놓았다고? 그게 과연 가능한가?
‘아니야. 스코브리아늄의 반응력인지 뭔지를 이용하면 생각보다 엄청 간단하게 공정이 가능한 걸 수도 있어.’
최만재는 고개를 저어 의심을 떨쳐냈다. 지금은 신속하게 움직여야지, 이리저리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일단 이 친구 신상에 관해서 좀 더 알아봐. 뭐 하는 친구인지, 가족관계나 인맥은 어떻게 되는지, 하나도 놓치지 말고 샅샅이 알아봐.”
“예.”
“나는 부회장님께 보고해야겠어.”
최만재는 곧바로 이용무를 찾았다. 노심초사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용무는 접견 신청에 지체 없이 승낙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특허는 일단 진짜인 것 같습니다. 5nm공정 반도체 시제품도 확인했습니다. 우리 연구원 다섯이 만장일치로 확실하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대책은?”
“일단 원천특허를 응용하기 위한 주변 기술 개발을 무차별로 고안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원천특허권자를 압박할 카드는 갖출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현재 출원인 조사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기술을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용무는 대놓고 그렇게 지시했다. 그도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5nm공정이라니, 아직 10nm공정도 성공하지 못한 진성전자로서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기술을 손에 넣느냐, 하다못해 특허 이익을 나눌 수 있느냐가 회사, 나아가서 그룹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SJ인더스트리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어디서 이런 게 또 튀어나와서는…….”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미리 대응하지 못한 저희 임원들의 불찰입니다.”
이용무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나 머리가 아픈 것은 잠시, 곧 다른 생각이 떠오르며 두통이 싹 가셨다.
“차라리 잘 된 걸 수도 있습니다. 이 특허를 잘만 활용하면 SJ인더스트리에 대항할 무기를 얻는 셈 아닙니까?”
최만재도 진작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지금 처음 깨달았다는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명안이십니다!”
“잊지 마세요. 특허권자를 반드시 포섭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이름이 뭡니까?”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25세, 서울 거주자입니다. 지금 배경을 조사 중입니다.”
“한서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이용무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지게에 딱지를 가득 담아서 땀 뻘뻘 흘리며 노역하던 중 탈진해서 쓰러지는 꿈을 꿨습니다 헉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