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다이아몬드 수저 =========================================================================
SJ인더스트리의 지분 정리가 끝났다.
토니 제나인은 크렘 회장의 설득에 순순히 응해서, 프리미엄이 포함된 금액을 받고 보유한 지분을 내놓았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받은 지분이 과한 대우임을 인지했다. 게다가 SJ인더스트리는 슈나우저를 생산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5%의 지분이 탐나서 끝까지 쥐고 있다가 크렘과 한서진이 아예 다른 회사를 차려버리면 의미가 없었다. 그 전에 두 사람이 지분 강제 매입 의결을 해버리면, 프리미엄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만다.
섭섭하지 않게 챙겨준다고 할 때 받고 빠지는 게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래야 SJ인더스트리에서 계속 일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지원은 토니 제나인의 지분 중 1%를 받았다.
「고맙다.」
“진짜 이거 가지고 되겠어요? 전 좀 더 드리고 싶은데…….”
「아니야. 난 이거면 충분해. 내가 한 노력에 비하면 사실 이것도 과해.」
한서진은 한 번 더 말을 꺼내 보았지만, 정지원이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최종적으로 SJ인더스트리의 지분은 정지원이 1%, 칼 루이스는 크렘 회장으로부터 받은 2%, 크렘 회장이 10.5%, 그리고 한서진이 86.5%가 되었다.
크렘 회장이 전화를 걸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통정리도 끝났겠다, 이제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일만 남았군요.」
“그렇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한 대표의 신용이라면 언제든 즉시 1,000억 달러까지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 그렇게까지는…….”
「아닙니다. 한 대표는 충분히 1,000억 불의 가치가 있는 남자입니다.」
1,000억 불이면 100조 원? 내가 100조 원의 남자라고?
한서진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립 서비스가 아닌가 순간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세계 최고의 투자자가 직접 내뱉은 평가다. 거짓이나 과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제가 부탁만 하면 1,000억 불을 그 자리에서 투자해주시는 건가요?”
「당연합니다. 물론, 그때는 그에 상응하는 투자 이익을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최고의 조건으로 대우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혹시 투자금이 필요합니까?」
“아니, 아닙니다. 지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투자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한 대표.」
전화를 끊고, 한서진은 자신의 뺨을 꼬집어보았다.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니다.
‘내가 100조 원짜리 남자라니…….’
H반도체 시가총액이 얼마더라? 25조 원쯤 되던가? 자신의 가치가 H반도체의 4배나 된다고?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네.’
그러나 빈말이 아니다. 그리고 최고의 투자자가 장담한 것 아닌가. 그 사실이 더욱 기분을 좋게 했다.
“새 차는 어때? 탈 만해? 대형차라 좀 힘들 텐데.”
“오빠도 나 운전 잘하는 거 알잖아. 트럭도 잘 몰고 다녔는데 이 정도야 우습지.”
한지혜의 자동차 선호도는 여자와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주로 남자들이 좋아하는 차를 선호했다. 차의 등급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강인한 스타일의 차에 더 끌린다는 소리다.
“내 드림카는 사실 벤츠였는데, 이것도 타고 다니니까 정말 좋더라고. 고마워.”
“…….”
“다음 생에는 벤츠 탈 수 있겠지? S클래스로. 아, 오빠한테 잘 보이는 게 더 빠를까?”
한서진은 굴뚝같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참았다.
‘그거보다 더 좋고 비싼 차야, 이 바보야.’
큰 차를 좋아하는 것 치고, 랜드로버를 모른다는 점이 우습긴 했지만. 거친 차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런 점을 보면 역시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학원 다녀. 내년에 재입학하니까, 지금부터 부지런히 공부 좀 하려고.”
“그러고 보니 너, 화학공학과였지?”
“응, 나중에 화장품 회사에 취직해서 죽어라 화장품이나 만들어야지.”
한지혜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맨날 백화점에서 화장품만 팔다가 이제 화장품 만들어보게 생겼네. 전생에 화장품과 무슨 인연이 있었나 봐.”
“화장품?”
“여자가 화공대 나와서 특별히 갈만 한 직종은 그런 데 뿐이거든. 다른 분야도 있긴 한데, 그리 썩 시원치는 않고.”
“벌써부터 진로를 잡아놨네.”
“응, 남들보다 3년이나 늦었으니 더 열심히 따라잡아야지.”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게 한지혜에게 과연 좋은 진로라고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혹시 변리사 시험 준비할 생각은 없어?”
“변리사?”
의외의 말에 한지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래, 너 공부 제법 잘했잖아. 못할 건 없다고 보는데.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졸업 때쯤에는 딸 수 있지 않을까?”
“그거 정말 어려운 건데.”
“학점 포기해도 좋으니까 변리사에 올인해. 영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시간 많으니까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너 이제 겨우 23살이잖아.”
“별로 자신 없어.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아.”
“낭비해도 괜찮으니까 해봐.”
“그것도 결국 학벌이고 인맥이라는데. 내가 일류대까지는 아닌데, 자격증만으로는 나중에 영업하기 힘들지 않을까? 한연고에서 다 쓸어먹는다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냐?”
“반도체 설계…… 아, 그럼 오빠?”
그제야 오빠가 그리는 밑그림을 깨달았는지 한지혜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후원자가 이런 집에서 살라고 빌려줄 정도면, 내가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알겠지?”
“알지, 그럼.”
한지혜는 아직까지 이 저택이 후원자가 빌려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그대로 말하면 감당이 안 될지 몰라, 한서진이 적당히 숨긴 것이다.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큰 행운은 때론 사람을 망치기도 하는 법이니.
“그러니 잘해 봐. 인맥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한지혜는 주먹을 꽉 쥐고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한번 해볼게.”
“극미세공정이라…….”
한서진은 진성전자가 출원한 특허 내용을 보며 중얼거렸다.
특허는 얼마 전 박효산 연구실에서 완료한 프로젝트, 극자외선 방출에 필수적인 감광재료 ERP-2의 획기적인 생산방식 개선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정 온도를 0도에 가깝게 맞춘 것만으로 99.9%의 불량률이 0에 수렴할 만큼 떨어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덕분에 진성전자는 7nm공정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7nm공정 기법은 어디까지나 실리콘 반도체의 경우에 한정된다.
“스코브리아늄을 이용하면 1nm 공정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세계 유수의 반도체 과학자들이 굳게 믿고 있는 것이었다. 스코브리아늄은 실리콘의 한계를 뛰어 넘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당장 한서진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아직 충분하지 않아.’
통찰안은 사물에 담긴 진실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는 자신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 역량은 때론 강력한 의지에 좌우되기도 한다.
즉 아직 볼 수 있는 자격이 안 된 영역에서는, 통찰안이 발동하지 않는다.
그가 끊임없이 반도체 관련 지식 공부를 하는 이유다. 지식이 늘어나고,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그 분야에 관한 진실이 더 잘 보이는 걸 느꼈으니까.
‘스코브리아늄은 아직 힘들어.’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제조에 관한 것은 아직 한 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실리콘은 조금 다르지.”
넓은 작업실은 사방이 반도체 관련 자료, 데이터, 그래프, 사진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빼곡하게 설치된, 백여 개가 넘는 32인치 디스플레이에 항상 반도체 관련 자료 화면이 떠올라 있었다.
슈나우저가 들어간 워크스테이션 컴퓨터를 통해 조성한 시스템으로, 원활한 공부와 작업을 위해 SJ인더스트리에서 제조해준 시제품 중형컴퓨터 덕분에 구축한 환경이다.
한서진은 주기적으로 바뀌는 반도체 관련 지식들을 두 시간째 무차별적으로 눈에 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자신이 아는 내용도 있었고, 잘 몰랐지만 몇 번 읽어보고 이해되는 내용도, 그리고 매우 어렵지만 통찰안의 힘으로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내용도 있었다.
그런 무차별적인 지식 투입은, 효율은 나쁘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아니, 효율이 나쁘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건 그 어떤 영재보다도 빠르고, 분명한 학습 효과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보인다.’
7nm공정 관련 기록을 확인한 순간,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통찰안이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수한 그림과 도표, 데이터, 그리고 설명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기록했다.
“……끝났다.”
무려 다섯 시간에 걸친 대 작업이었다. 그만큼 기록해야 할 양이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8시간 이상을 이 작업에 쏟아 부은 셈이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뇌가 타버린 듯처럼 그저 머릿속이 새하얗기만 했다.
완전히 탈력했다는 것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으로 온몸이 뿌듯했다.
그는 흐뭇한 얼굴로 기록을 천천히 살폈다.
그러다가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진성그룹의 후계자, 이용무 부회장이었다.
‘스코브리아늄 반도체와 7nm 공정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고 했었지.’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개발이 하루아침에 쉽게 성공하지 않을 테니, 현실적으로 그들은 7nm공정에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백세완, 그리고 백철중 회장이었다.
젊은 나이에 비해 카리스마와 추진력이 뛰어나지만, 재벌가의 일원답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오만함을 갖춘 백세완.
밑바닥에서 손수 모든 것을 일군 1대 재벌답게 크고 넓은 시야를 가졌지만, 비재벌가의 사람을 향해 분명히 선을 긋던 백철중 회장.
그 세 사람의 얼굴이 차례차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SJ인더스트리 사주라는 걸 알면, 그 사람들은 어떤 얼굴을 할까?’
한서진은 문득 그 점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사실을 밝힐 마음은 크지 않았다. 유명세로 곤란해지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고,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게 귀찮았으니.
하지만 가끔 은밀한 상상을 해본다.
자신을 아무런 기반 없이 머리만 뛰어난 인재로 아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눈빛을 지을 것인가를.
그런 상상은 부끄러우면서도, 마약보다 짜릿한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창피함에 몸을 떨면서도, 상상을 끊지를 못한다.
고대의 왕들도 정체를 숨기고 마실을 나가면서,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이거면, 시음은 할 수 있겠네.”
한서진은 방금 기록한 자료를 차분히 살폈다. 그리고 가장 상단에 제목을 적었다.
이 자료를 발표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그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리라.
「스코브리아늄의 반응 성질을 이용한 실리콘 반도체 5nm공정기술 관련 특허 신청서.」
송하나의 눈빛이 어떨지도, 조금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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