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다이아몬드 수저 =========================================================================
「당장 여기로 오게.」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있자, 곧장 백철중 회장의 엄명이 떨어졌다.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백철중 회장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거 참…….’
큰일이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서진은 H그룹 본사로 향했다. H그룹의 지주회사인 H생명으로, H반도체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회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예? 그런 스케줄은 못 들었는데요.”
“조금 전에 회장님께서 찾아오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문의 넣어주시겠어요?”
로비 안내 직원은 잠깐 어딘가로 확인하더니 살짝 놀랐다는 듯이 한서진을 바라봤다.
“스케줄 관리에 착오가 있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저를 따라 오시겠어요?”
“예, 부탁할게요.”
여직원은 얼른 전용 엘리베이터로 그를 안내했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동안 한서진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회장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을지 뻔히 상상이 갔다. 귀한 막내딸, 그것도 미성년자에게 접근하는 발칙한 전 부하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이쪽입니다.”
드디어 회장실 문이 열렸다.
심호흡을 하며, 한서진은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 들어가자마자 재떨이가 날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백철중 회장은 창가에 서서 뒷짐을 진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서진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앉지.”
백철중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서진은 정좌를 하듯이 똑바로 앉았다. 백철중도 상석에 바로 앉았다.
“하나는 어떻게 만난 건가? 나 몰래 둘이 따로 연락을 하고 있었나?”
한서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전화번호는 회장님이 알려줘 놓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 아닙니다. 저도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고 놀랐습니다. 저도 송하나 학생의 연락처는 몰랐습니다.”
“내 딸이 먼저 연락했다고? 그 아이가 자네 전화번호를 무슨 재주로 알고?”
뭐지? 한서진은 혼란스러웠다. 송하나가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백철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개구리를 주시하는 독사의 눈빛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중요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지. 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나?”
“그, 그게…….”
“아비한테 말하기는 껄끄러운 이야기인가?”
불신을 가득 품은 눈이 바라본다. 한서진은 직감했다. 지금 100% 오해하고 있음을.
머릿속에 비상이 켜졌다. 이건 위기 순간이다. 침착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SJ인더스트리 이야기를 조금 하더군요.”
“SJ인더스트리? 그 아이가 왜?”
백철중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오해가 아주 살짝 무너진 것이다. 한서진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말했다.
“회장님의 고민을 옆에서 보고 들은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H반도체 미래를 걱정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린 나이인데도 아는 게 많고, 관심이 대단하더군요.”
“내 고민을?”
백철중의 눈빛이 깊어졌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가볍게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랬군. 그래서 자네를……. 하아, 이게 무슨 추태인가.”
“…….”
“그래서 그 아이가 자네한테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던가?”
“……그건.”
“괜찮으니 가감 없이 말해보게.”
“……회장님이 SJ인더스트리 정지원 팀장님과 관계 해소를 위해 고민이 깊으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서진은 결국 송하나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물론 SJ인더스트리와 관련되지 않은 다른 화제는 뺐다.
묵묵히 듣고 난 백철중이 한탄처럼 말했다.
“자네에게 못 볼 꼴을 보였구만.”
“……아닙니다.”
“솔직히 자네가 적극적으로 중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네. 자네가 그래주지 않아서 내심 서운함도 컸지. 그래도 나름 자네에게 잘 신경 써줬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백철중 회장 입장에서는 일개 평사원에게 정말로 파격적인 특혜를 베푼 것이다. 그러니 서운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그가 비글에 얽힌 이해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비글의 본래 주인이 정지원이 아니라 한서진임을 안다면, 그런 감정을 품지 못할 것이다.
“그 아이 앞에서 그런 아쉬운 마음을 몇 번 말한 적이 있네. 그 아이가 아마 그 때문에 자네를 찾아간 것 같아.”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건 아니지. 허어, 이거 체면만 보기 좋게 구겨버렸군.”
백철중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회사란 참…… 모두가 반드시 내 뜻대로만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란 말이야. 심지어 내 딸조차 이런다네.”
“…….”
“알았네. 괜히 오해해서 미안하군.”
어떤 오해인지는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한서진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저, 회장님. 외람되지만 SJ인더스트리와 협상이 어떻게 돼 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못 말해줄 것도 없지.”
잠시 망설이던 백철중은 그렇게 서두를 열었다.
“내 쪽이 먼저 과감하게 보상안을 제시했네. 전에 말한 대로, 비글로 지금까지 얻은 총 순이익의 절반을 사과와 함께 지급하겠다고 했지. 정지원 이사는 그런데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군. 차일피일 시간만 끌고 있네.”
“…….”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더군. 우리로서는 줄 수 있는 최대한을 제시했는데, 생각해보겠다며 시간을 끌기만 할 뿐 일절 요구 사항이 없으니. 나도 답답하던 참이었네.”
“그러셨군요.”
백철중 회장은 고뇌를 드러내면서도, 끝내 한서진에게 적극적인 중재 부탁은 하지 않았다. 한서진이 나선다 해도 별 소용이 없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내가 오해가 있었네.”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하자면, 앞으로 하나를 만나지 말게. 설령 그 아이가 만나자고 하더라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나지 말라는 말에 한서진은 어딘지 반발심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차분히 말했다.
백철중은 냉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난 더 이상의 오해는 하지 않네. 그 아이도 나름대로 제 아비의 고민을 덜어주려 한 것뿐이지. 하지만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다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제가 자격이 없어서입니까? 만약 그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SJ인더스트리 사주인 걸 안다면…….’
백철중 회장의 반응도 지금과는 달랐겠지?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한서진은 태연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도 제 분수는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해해주니 고맙네. 자네도 나중에 딸을 낳으면 내 심정 이해할 게야.”
신데렐라는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그 비슷한 것조차 일절 없다.
백철중 회장은 나름 인자하고 온화한 품성을 지닌 듯했지만, 그래도 역시 재벌 총수였던 것이다. 선을 긋고 구분을 짓는 게 아주 명확했다.
한국대 재학생이라 해도 평범한 서민, 그런 이를 인재로 대우해줄 순 있어도 자기 딸과 얽힐 가능성은 일말의 여지라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송하나…….’
입맛이 씁쓸하지는 않다. 그녀에게 큰 애착을 품은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조금 궁금할 뿐이다. 슈나우저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면, 그때는 백철중 회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고.
포르쉐를 타고 본사를 나서면서, 한서진은 정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무슨 일이야?」
“백철중 회장님한테 이야기 들었는데요. 보상이나 협상을 일절 거부하고 계시다면서요?”
「그 양반도 참, 그런 이야기를 왜 너한테까지 하지? 그 양반 입장에서 넌 이제 일개 전 직원일 뿐일 텐데.」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대단한 건 아냐. 칼 루이스가 윈텔에 하는 짓과 비슷해.」
“윈텔이요?”
한서진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윈텔을 인수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내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럼 설마?
“혹시 H반도체를 인수하시려는 겁니까?”
「맞아. 빼앗으려는 거지.」
“…….”
「반도체 파운더리 분야에서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잖아? 감정이 크게 좋은 사이도 아닌데, 굳이 하청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더라고. 빼앗으면 그만이지.」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보류할까?」
한서진은 잠시 마음을 되짚어 보았다. H반도체의 인수, 거기에 자신의 마음에 켕기는 사안이 있는가?
신기하게도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미열과 함께 흥분이 피어올랐다.
만약 H반도체를 빼앗으면 다들 어떤 얼굴을 할까? 백세완은 그때도 오만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백철중 회장은 여전히 냉엄한 재벌 총수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송하나는,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까?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당황한 정지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그래? 뭐 우스운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닙니다. 그냥 H반도체를 인수한다니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나도 들을 수 있을까?」
“죄송하지만 사적이고, 또 조금 창피한 일이라서요. 아무튼 재미있겠네요. 전 찬성입니다.”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정지원의 뜻대로 이루어지면, 그들 모두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지.
가볍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한서진은 그런 자신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백철중 회장이 선물한 포르쉐의 스피드가, 오늘따라 더욱 짜릿했다.
송하나는 스쿼시에 한창 열중이었다. 빠르게 벽에 공을 쳐서 넣고, 튕겨 나오는 공을 다시 라켓으로 받아낸다.
땀에 흠뻑 젖은 옷은 탄력 있는 몸의 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볼륨감이 크게 흔들린다.
남자라면 누구나 끌릴 수밖에 없는 모습, 유리문 너머로 흐뭇하게 지켜보던 백철중은 가볍게 노크를 했다. 노크 소리를 들은 송하나는 라켓을 멈추고, 땀을 닦으며 돌아봤다.
“하나야.”
“예, 회장님.”
“어허, 둘이 있을 땐 아빠라 부르래도.”
“예, 아빠.”
백철중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물고 딸을 바라봤다. 누구 딸 아니랄까 봐 이렇게 예쁘게 태어났을까.
그는 표정을 조금 엄하게 바꾸고 말했다.
“오늘 한서진이, 그 친구를 만났다면서?”
“예.”
“왜 그랬냐?”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해주려고요. 아빠는 체면 때문에 그런 말 잘 못하시잖아요.”
“그건 네 오해다.”
“오해요?”
“회사를 살릴 수만 있다면, 회사의 이익을 취할 수만 있다면 내 체면이 망가지는 건 두렵지 않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일에 내 체면만 구길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건 명백한 손해다.”
송하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갸웃거렸다.
“한서진이 그 친구가 희망이긴 했지만, 크게 유용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정지원이 그 친구가 아무리 한서진이와 친하다 하더라도, 이런 큰 이익이 얽힌 문제에 그 친구의 조언을 들어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가요?”
“그래서 한서진이한테는 더 이상 부탁하지 않은 거다. 정지원이와 연락이 되었으니, 이제는 회사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
“왜, 걱정이 되냐? H반도체가 흔들릴까 봐?”
백철중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송하나의 두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말했다.
“걱정마라. H반도체는 네 것이다. 지금은 잠시 흔들릴지 몰라도, 무사히 자리를 잡게 해서 탈 없이 물려주마.”
“회장님.”
송하나는 조금 무뚝뚝하게 말했다. 갑자기 변한 호칭, 백철중은 늦둥이 딸의 기분이 지금 무척 안 좋아졌음을 알아차렸다.
“자식이라고 무조건 회장님 유산을 기대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알았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구나.”
백철중 회장은 껄껄 웃으며 딸의 어깨를 놓았다.
“자, 식사나 하러 가자. 옷 갈아입고 나오너라.”
딸이 한서진에게 특별한 마음이 없는 걸 확인한 백철중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주의를 주려던 생각을 접었다. 괜히 입 밖에 꺼냈다가 그로 인해 그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게 더 곤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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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더미 같은 딱지를 어느 세월에 다 옮길까...
작기만 한 제 바구니가 그저 원망스럽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