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3 다이아몬드 수저 =========================================================================
‘송하나?’
한서진은 순간 놀랐다. 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아니 그전에, 송하나가 자신에게 무슨 일로?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재벌 회장 막내딸이 무슨 일로 연락을 한단 말인가. 스치듯 몇 번 본 게 인연의 전부인데. 설마 그 몇 번 만에 자신에게 한눈에 반했을 리는 없고. 그런 일은 영화에서도 안 일어난다.
「갑자기 전화해서 당황하셨죠?」
“아, 네.”
「번호는 회장님이 알려주셨어요.」
“……그러시군요.”
대체 무슨 일이지? 한서진은 이유를 추리하느라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대뜸 전화해서 죄송한데, 혹시 뵐 수 있을까요?」
“네? 저를 말입니까?”
「네. 직접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언제든 좋아요.」
송하나가 자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한서진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야 괜찮습니다만…… 그럼 오늘 뵐까요? 마침 제가 지금 시간이 한가한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제가 지금 학교에 있어서요.”
「그럼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결국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한서진은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 학생이, 왜 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듯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한서진은 약속 장소인 중앙도서관 앞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도서관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한 대표님?”
“아, 송하나 씨. 오셨군요.”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해요.”
송하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한서진은 얼어붙은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와인색 스키니진으로 감싼 날씬한 다리와, 흰 어깨를 드러낸 검은색 오프숄더 블라우스. 터질 듯한 섹시함이 이런 것일까. 한서진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얜 무슨 재벌 2세가 경호원도 없이 다녀…….’
애꿎은 경호원 타령을 하며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단 가시죠.”
“네.”
한서진은 교내 카페로 그녀를 안내했다. 송하나가 들어서자 대번에 분위기가 달라진다. 비율 좋은 큰 키에 육감적인 몸매, 연예인 뺨치는 예쁜 얼굴에 자신감 넘치는 복장. 그녀는 뭇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미성년자인 거 알면 다 뒤집어지겠지?’
누가 이 얼굴, 이 몸매를 보고 미성년자라고 생각할까. 다시 말하지만 겉늙었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둘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갑작스레 전화 드려서 많이 놀라셨죠.”
“아닙니다. 괜찮아요.”
정식으로 마주 앉아서 보고 있으니, 새삼 단아한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차분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는 보통 남자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만큼 격차가 느껴진다.
저런 여자가 미성년자라니. 학생증을 봐도 못 믿을 것이다.
“실은 회장님 때문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한서진은 순간적으로 실망감이 들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서라, 미성년자한테 뭘 기대했는데?
“저는 아직 어려서 사업은 잘 모르지만, SJ인더스트리라는 회사 때문에 H반도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건 들었어요.”
“그러시군요.”
한서진은 순간적으로 미안해졌다가 얼른 그런 마음을 지웠다. 그리고 자책했다. 아서라, 미성년자한테 뭘 흔들리고 있어?
“회장님께서는 SJ인더스트리의 정지원 이사님과 화해하고 싶어하세요. 그래서 한 대표님한테 중재를 부탁드리고 싶어하시고요.”
“그 이야기라면 회장님께서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체면 때문에 제대로 말씀 안 하셨을 거예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싶어하세요. 회장이라는 체면 때문에 그러지 못할 뿐이죠.”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좀 답답하고 걱정이 되어서, 한 대표님께 그 말씀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결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송하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가슴골이 언뜻 비쳤지만, 한서진은 얼른 눈을 돌렸다.
“한 대표님이 중재만 어떻게 해주신다면…… 회장님은 무엇이든 군말 없이 내놓으실 거예요.”
“직접 말해도 될 텐데요.”
“SJ인더스트리가 H그룹의 대화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어서요. 벽에 대고 혼자 말하는 기분이라고 하시네요.”
“그 정도입니까?”
H그룹은 정지원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제대로 길을 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정지원이 정말로 쌓인 게 많아서 분풀이를 하는 것이든가.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가 정 팀장님한테 말씀은 드려보겠지만, 저도 장담은 못합니다.”
“그 정도만 해도 감사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H반도체를 받아줄 수 있지만, 한서진은 일단 그렇게 둘러댔다. 정지원의 경영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함부로 판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저, 그런데 경호원도 없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 시간에는 어떻게 밖에…….”
“오늘 개교기념일이라서요. 학교 쉬어요.”
쿨럭! 개교기념일이란다. 한서진은 그 산뜻한 단어에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미, 미성년자인데.’
그리고 재벌 2세인데.
물론 자신도 이제 꿇릴 것은 없었다. SJ인더스트리 하나만 해도 엄연히 이 나라의 재벌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통찰안의 전능함을 생각하면,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된다.
조건만 보면 전혀 꿇릴 게 없다. 다만…….
‘아직 내 마음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송하나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미성년자, 그리고 재벌 2세만 아니었으면 한서진도 진작 구애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사실 때문에 그는 절대로 송하나에게 흑심을 품지 않았다.
백철중 회장과 딸 문제로 부딪친다? 어떤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서웠다.
“그런데 송하나 학생은 몇 학년이에요? 조금 궁금했는데.”
“2학년입니다.”
“고등학생, 맞죠?”
“네, 당연하죠.”
송하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제 어디가 중학생처럼 보이세요?”
“…….”
사실은 대학교 2학년 같아서 한 말이었지만. 한서진은 그건 속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노안으로 오해한 것으로 그녀가 착각하면 곤란하다.
‘2학년이라니, 그것도 엄청 어린 건데.’
사실은 끽해야 고3인 줄 알았다. 그래야 아슬아슬, 몇 달 지나면 성년이니까. 그런데 고2일 줄이야.
‘요즘 여고생들은 사복을 저렇게 입고 다니나?’
주변에 아는 여고생이 있어야 말이지. 아, 이제 한 명 생긴 걸로 봐도 좋으려나?
“제가 전화해서 많이 놀라셨죠?”
“……조금은요.”
“회장님이 고민하는 게 답답한 것도 있었지만, 실은 어떤 분인지 궁금한 것도 있었어요.”
“네?”
한서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설마 녹색등이 켜진 것은 아니겠지?
송하나는 차분히 말했다.
“회장님이 인자하시지만 엄청 무섭고 또 엄한 분이시거든요. 아랫사람들한테는 특히 반응이 칼 같으시죠.”
“아무래도 지위가 있으시니.”
“그런데 회장님이 근래에 유독 한 대표님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큰 인물이 될 청년이라고 입버릇처럼 칭찬을 하셨어요. 덕분에 임직원분들이 계속 비교 당하느라 수난을 겪긴 했지만요.”
“……하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한국대 수석이라는 점도 되게 신기했고요. 그런데 실물은 생각보다 평범하시네요.”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는 말이었다. 물론 송하나야 여신급 미모를 지녔으니 눈이 높은 거겠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욕먹을 얼굴은 아닌데.
“아, 오해는 마시고요. 한국대 수석이라면 되게 엄하고 날카로울 것 같은데 생각보다 평범한 인상이라는 뜻이었어요.”
“이과 전체 수석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전체 수석은 다른가요?”
“엄청 날카롭게 생겼더라고요.”
한서진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의외로 대화를 나눠보니 말이 잘 통했다. 송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 그대로 차분하고 조숙한 성격이었다. 연예인 같은 것은 잘 몰랐고, 시사와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한서진은 그녀가 스코브리아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에서 또 한 번 놀랐다.
“신기하네요. 말을 나눠보면 고2같지가 않아요.”
“제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요. 평범한 가정환경은 아니잖아요.”
송하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 미소는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예뻤다. 한서진은 얼른 자신을 탓했다.
‘미쳤냐! 저건 미성년자야! 그리고 회장님 딸이라고! 애초에 감당이 안 될 건데, 무슨.’
한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송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게요.”
“고맙습니다.”
마지막까지 깍듯하다.
학교 밖까지 태워다 줘야 하는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사가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하나와 헤어지고 한서진은 혼자 중얼거렸다.
“재벌 2세라서 되게 시건방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착하네.”
유능하지만 오만한 백세완과는 인품에서부터 천지차이다. 심지어 생긴 것도 백철중 회장을 전혀 닮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여자다.
“좋은 여자애인 건 맞는데…….”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지만, 너무 어리고 심지어 백 회장의 막내딸이다. 애초에 감당할 수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을 확인한 한서진은 깜짝 놀랐다. 바로 백철중 회장이었던 것이다.
“예, 회장님. 한서진입니다.”
「…….」
“……회장님?”
「…….」
백철중 회장은 말이 없었다. 한서진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하필 타이밍도 공교롭지 않은가.
「자네, 우리 하나와 무슨 이야기했나?」
“폐하, 왕실에 존재하는 모든 미스릴과 오리할콘을 모았습니다.”
시종장의 보고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의 재산은 천문학적이다. 정확한 재산 내역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린다.
수백 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서, 왕실이 보유한 모든 미스릴과 오리할콘을 왕궁으로 긁어모았다. 대륙의 끝에 있는 창고까지 달려가서 가루 하나 남김없이 가져온 것이다.
그렇게 모인 미스릴과 오리할콘은 그 양이 각각 무려 1톤. 그 희소성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농담이 아니라 대륙의 절반은 거뜬히 살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아름다운 황금빛을 뿜는 미스릴은 에테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 성질 덕분에 마도사와 사제들은 미스릴을 귀중히 여긴다.
미스릴은 에테르를 다루기 위한 최고의 매개체였으니까.
반면 오리할콘은 미스릴과 달리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을 띠고 있다. 푸른빛이 선명할수록 상등품이라는 증거다.
간혹 에테르가 주는 극한의 압력과 스트레스에 오랫동안 노출된 미스릴이 변이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하지만, 때로는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새롭게 탈바꿈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오리할콘이다.
“이 오리할콘들은 모두 한계까지 에테르를 흡수한 최상품들이옵니다, 폐하.”
시종장이 정중히 말을 올렸다.
왕은 작게 끄덕이며, 오리할콘이 담긴 궤짝을 바라봤다.
공기, 흙, 금속, 나무, 물. 매질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주변의 모든 에테르를 무차별로 흡입하는 성질을 가진 오리할콘.
그리고 에테르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미스릴.
저 두 보물의 힘이라면, 인간의 힘으로 발휘 불가능한 전설의 대마법도 사용할 수 있으리라.
“부탁하겠소. 이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써서, 부디 꿈속의 짐에게…….”
왕의 말에 노신하는 천천히 끄덕였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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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딱
지를주
신다면
대신귀
여운송
하나학
생을드
리겠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