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2 다이아몬드 수저 =========================================================================
이창용 회장의 장남, 이용무 부회장. 차기 진성그룹 총수로서 왕관이 약속된 남자. TV나 인터넷으로만 보던 인물을 이렇게 직접 맞닥뜨릴 줄이야.
“부회장님.”
최태규가 급히 달려와서 머리를 숙였다. 한서진은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교수님은 어디 계신가?”
“교수님은 지금 안에 계십니다. 손님이 와 계셔서요.”
“그럼 기다리지. 교수님께 내가 왔다고 전해주게.”
“아, 예.”
최태규는 눈에 띄게 쩔쩔맸다.
이용무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서 앉았다. 마치 자기 집을 온 듯이 자연스러운 태도다. 한서진은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수님이 이 부회장이랑 친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산학 프로젝트로 진성전자와 여러 번 얽힌 적은 있지만, 이용무 부회장과의 인맥은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저 자연스러운 태도는 뭘까. 마치 자기 집처럼 당연한 표정과 태도. 어디에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일까.
‘뭐, 나와는 상관없지.’
연구실을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이용무가 그를 불렀다.
“자네는 누군가?”
“네? 저요?”
의아해서 돌아본 한서진은 이용무의 표정을 보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여기 학교 학생인데요.”
“…….”
학생이 학교 시설을 왔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는 말투. 그러나 이용무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교수님 제자인가?”
“뭐, 그렇습니다.”
“반도체공학부면 나중에 우리 진성전자에서 일할 기회도 있겠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따로 장사를 할 생각이라서요.”
이용무의 표정이 점점 좋지 않게 변했다. 한서진 역시 그에 대한 첫인상이 안 좋은 쪽으로 변해갔다.
그때였다.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아? 응?”
투덜대며 나오던 박효산은 이용무를 보고 흠칫했다. 아무리 막가파라지만 진성그룹 후계자를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심지어 자신보다 나이도 많았으니.
박효산을 보고 이용무의 굳은 표정이 비로소 풀렸다.
“교수님,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쑥 찾아오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연락은 받았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진성그룹을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부탁이다. 자신이 직접 왔으니 거절할 리가 없다는 생각일까.
박효산은 그답지 않게 난처해서 쩔쩔맸다.
“그게…… 우리 랩은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연구는 당분간 보류 상태입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드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
“어떡하면 제 부탁을 들어주실 겁니까? 그 방법을 말씀해 보시지요.”
“부회장님. 이건…….”
“슈나우저의 침공에 세계 반도체 시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건 그룹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진성전자는 반도체를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성전자가 무너지면 이 나라 경제와 일자리에도 큰 악영향을 끼칩니다. 그 꼴을 정녕 두고 보실 겁니까?”
“…….”
슈나우저 이야기가 나오자 박효산 교수는 난처한 얼굴로 한서진을 흘끔 바라봤다. 한서진은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무슨 내가 악의 축이라도 된 것 같네.’
좀 더 일찍 자리를 피할 걸, 하고 한서진은 후회했다. 자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한서진은 일단 슬그머니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나지막이 압박을 가했다.
“자네들은 나가 있어.”
“네?”
“부회장님과 교수님이 중요한 이야기 중이시니, 나가 있으란 말이야.”
주인님의 사적인 모습을 아랫것들에게 보일 수는 없다는 건가.
최태규 등 연구생들이 엉거주춤 일어나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한서진은 쫓겨나가는 듯한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됐다, 시비 걸어서 뭐해.’
상대는 차기 재벌 총수다. 그것도 국내 최고의.
한서진은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박효산이 손짓을 하며 만류했다.
“서진이 네가 어디 가냐? 넌 남아야지.”
“네? 제가 왜요?”
“왜기는! 너도 이해관계자인데 네가 뜨면 어떡해?”
그 말에 비서는 물론이고 이용무의 눈빛도 변했다. 한서진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교수님, 설마 슈나우저 개발자라는 걸 밝힐 생각은 아니시겠죠?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네가 빠지면 스코브리아늄 연구가 안 되잖아. 그러니 이해관계자지.”
“호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용무가 입맛을 다시며 바라봤다. 비서는 조금 난처한 듯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한서진에게 나가라고 압박했던 게 민망했던 것이다.
“그게, 워낙 실력 있는 친구라 내가 아끼는 제자입니다. 저 녀석이 없으면 연구가 안 돼요.”
“그 정도입니까?”
“저 녀석이 그럴 의지만 있으면 아마 최연소 교수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대단히 뛰어난 학생인가 보군요.”
한서진은 박효산을 쳐다봤다. 두 사제지간은 눈빛으로 뜻을 교환했다.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슈나우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나한테만 이 짐을 떠넘기고 도망치겠다고!’
이해관계자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나. 한서진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남았다.
노벨상 후보자로까지 선정된, 국내 최고의 반도체 전문가인 박효산도 이용무 부회장 앞에서는 온순한 강아지였다.
“교수님이 EPR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종결한 실력자라는 건 저도 보고받았습니다. 우리 회사는 교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저희 연구실은 현재 스코브리아늄 물질 연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반도체 개발 연구에 여력을 쏟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스코브리아늄 연구를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많이 다릅니다. 스코브리아늄을 반도체로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아니라, 스코브리아늄의 물질 성질을 파고드는 연구라서요.”
박효산은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미지의 언어에 관해서 밝힐 수는 없는지라, 적당히 둘러댄 것이다.
그러나 이용무는 끈덕졌다.
“그래도 우리는 교수님 힘이 필요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씀하세요.”
“허어, 이거 참…….”
이사급이 왔으면 딱 잘라 매몰차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그룹의 다음 주인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살 생각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결국 끈질긴 설득과 압박을 이기지 못한 박효산은 반승낙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여력이 되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연구를…….”
“무조건 성공해 주십시오. 어떤 지원이든 아끼지 않겠습니다.”
한서진은 설득과 회유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재벌 후계자는 저런 식으로 사람을 설득하는구나, 하는 묘한 감상을 받았다.
입맛이 어딘지 씁쓸해오는 광경이다. 그다지 닮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서일까. 이용무는 한결 흡족한 표정으로 한서진에게 물었다.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반도체공학부 1학년입니다.”
“석사 과정 중인가 보군. 자네도 교수님을 잘 보필해서 연구를 훌륭히 마무리지어주게.”
“…….”
한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용무는 그 침묵을 주눅으로 해석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는 일어났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인사, 그것은 부탁보다는 압박처럼 들렸다.
이용무가 연구실을 떠나자마자 박효산 교수는 해방되었다는 듯이 한숨을 뱉었다.
“현 교수님도 와 계신데 이게 참 무슨 일인지…….”
“교수님, 어쩌려고 승낙하신 거예요? 지금 스코브리아늄 물질 분석과 그 미지의 언어와의 관련성 연구가 먼저잖아요?”
“그럼 어쩌냐? 수락 안 하면 끝까지 붙들고 늘어질 기세던데.”
“평소에는 칼같이 잘 자르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난들 안 자르고 싶겠어?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진성그룹 후계자잖아. 몇 년만 지나면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되는 사람이라고.”
“저는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연구는 안 합니다. 그 미지의 언어 연구가 먼저입니다.”
“걱정마라. 나도 일단 시늉만 할 거다.”
그러나 박효산 교수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다음 날, 진성전자에서 연구 인력이 곧장 나온 것이다. 20여 명에 달하는 고급 인력은,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개발에 매달리고 있던 실무진이었다.
그들의 방문을 맞이한 박효산 교수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용무 부회장의 의지를 너무 쉽게 본 모양이었다.
‘이건 연구 협력을 하겠다는 건지, 감시를 하겠다는 건지.’
시간만 대충 허비할 생각이었지만, 20여 명에 달하는 협력 인력이 파견된 이상, 박효산 교수는 어쩔 수 없이 연구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했다.
“근데 너는 안 돕냐?”
“제가 왜 경쟁사를 도와야 하나요?”
“그건 그렇네.”
하소연처럼 투덜거렸던 박효산은 그 한 마디에 격침되었다.
박효산이 시간을 좀처럼 내기 힘들어지자, 한서진은 현진국 교수와 함께 미지의 언어 분석에 몰두했다. 그가 정리해서 가져온 주석 내용을 본 현진국은 큰 도움이 될 단서라며 기뻐했다.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이 미지의 언어와 스코브리아늄의 연관성은, 지구에 인류 외의 어떤 지적 존재의 영향력이 닿았다는 증거인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서진은 꿈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단, 꿈속의 세상은 아마 지구가 아니라 다른 별, 혹은 다른 차원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곳의 모든 것은 꿈이자 거짓입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늙은 신하의 간청이 귓가에 울린다. 한서진은 눈을 감고, 잡념을 쫓아냈다.
말도 안 된다. 지구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니. 한서진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아무튼 교수님, 오늘도 수고하세요.”
현진국과 토의가 끝난 한서진은 진성전자 인력에 둘러싸여 있는 박효산에게 쾌활히 인사를 건넸다. 연구원 중 한 명이 흘끔 보고는 물었다.
“저 친구는 누굽니까? 이 랩 소속이 맞나요?”
“어, 그런데 내가 다른 연구 주제를 줘서 지금 그걸 하고 있는 중이야.”
“여유 있으시군요.”
박효산은 그 말을 한 사람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이거, 압박이 맞지?
‘확 그냥!’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슈나우저 개발자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한심한 것들. 박효산 교수는 그렇게 속으로 비웃으며 짜증을 삭혔다.
한서진은 포르쉐 문을 열기 전 잠시 캠퍼스를 둘러봤다. 드넓은 캠퍼스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다. 젊음이 넘치는 거리에는 활력이 가득했다.
‘이 모든 게 거짓일 리가 없지.’
한서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꿈은 대체 어느 세상일까. 통찰안의 권능도 설마 그 꿈속의 세상이 준 힘일까. 미스릴과 에테르를 연구하면, 그 꿈속 세상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까.
불현듯 송하나가 생각났다. 유일하게 부적합 외의 다른 결과가 뜬 여자. 아니, 여학생이라고 해야겠지.
통찰안은 그 여학생에게서 어떤 점을 본 것일까. 그것도 근래 궁금한 것 중 하나였다.
‘학생이면 몇 살이지? 고3인가?’
성숙한 얼굴과 몸매를 보면 그렇지 않을까? 한서진은 무심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차에 올랐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진동하며 낯선 번호가 떴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한서진 씨 전화번호가 맞나요?」
“맞는데…… 누구시죠?”
「저 송하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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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8년 만에 연락이 닿아서 다시 만난 지인 작가를 만나서 오후 5시부터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죄송해요 노예 주제에 새벽까지 술로 달리다니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