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91화 (91/609)

00091  다이아몬드 수저  =========================================================================

임원회의 내내 이용무 부회장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임원들은 조심스럽게 실적과 매출 현황, 시장 전망성을 차례차례 발표했다. 최대한 부풀린 수치에도 불구하고 이용무 부회장의 안색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그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한 마디로, 이제 반도체 사업은 접으라 이겁니까?”

“…….”

발표 중이던 임원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동료 임원들을 둘러봤으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시선을 피했다.

이용무는 팔짱을 끼고 냉정히 말했다.

“결국 지금까지 실컷 떠든 게 그 소리 아닙니까. 반도체 사업은 망했으니 이제 접고, 고이 SJ인더스트리에 시장을 내주자. 그리고 그들의 자비를 구걸하자, 아닌가요?”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자는 게 아니라, 정확한 사태 파악을 보고받자는 겁니다. 반도체 사업, 접자는 겁니까?”

다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누구도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는 것은 이토록 위험한 것이다.

한 임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회사 반도체 사업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극미세공정 기술의 개발 외에는 없습니다. 7nm공정기술을 개발하여, SJ인더스트리와 특허 협상을…….”

“그건 이미 나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모르는 더 참신한 이야기를 해보세요.”

“…….”

임원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이용무 부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 그래도 경영 능력에 있어 의심을 받고 있는 몸이다.

아버지를 뛰어넘지는 못해도, 최소한 형제 중에서는 월등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그룹의 지휘봉을 잡자마자 이런 꼴이라니.

‘슈나우저…….’

이용무는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디서 그런 괴물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단 말인가. 내로라하는 진성전자 연구원들은 슈나우저의 원리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고. 회로설계만으로 이런 성능을 낼 수는 없다고.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개발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그게, 우리나라에서 그 분야에 제일 뛰어난 과학자는 한국대학교의 박효산 교수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 우리 그룹과 진행한 산학 프로젝트에서 불화가 있어, 우리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정을 잡으세요. 내가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겠습니다.”

“부회장님이 말씀이십니까?”

다들 깜짝 놀란 듯이 바라봤다. 이용무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럼 삼고초려라도 해서 모셔와야지, 거절한다고 계속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겁니까?”

“…….”

“7nm공정 기술 개발도 전력을 기울이세요.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반도체 시장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임원들은 일사분란하게 허리를 숙였다.

차가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용무는 얼마 전 정보팀으로부터 받은 보고 내용을 떠올렸다.

‘누님, 감히 이 나를 밀어내시려고…….’

하나뿐인 친누나, 이서나.

그녀가 국무총리 라인을 통해 크렘 회장과 만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무슨 대화를 했을지는 뻔하다.

아버지가 나눠주신 호텔 사업과 물산업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진성전자까지 손을 뻗치다니.

“뜻대로는 안 될 거요.”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룹의 다음 주인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선물은 마음이 드셨습니까?」

“정말 최고였습니다. 그 외는 더 할 말이 없군요.”

「하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크렘 회장이 한국을 떠나기 전, 한서진은 잠시 통화를 했다. 대저택을 선물 받은 것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대화하는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앞으로도 같이 승리해 나갑시다.」

“예, 감사합니다.”

크렘 회장과 통화를 마치고, 한서진은 유쾌한 마음으로 포르쉐에 올랐다.

대저택의 출입 정문에 다가서자 저절로 정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빠져나가자,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한눈에 쳐다본다. 예전에는 뿌듯하게 그런 시선을 즐겼지만, 이제는 덤덤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는 미국에 있는 정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카 스패니얼은 언제쯤 생산될 것 같나요?”

「다음 달부터 바로 생산을 시작할 거야.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이 합쳐지면 컴퓨터의 구조가 비약적으로 간단해지겠지. 외장 그래픽 카드와 저장장치가 차지하는 공간이 사라지니까. 메인보드가 차지하는 공간이 문제이긴 한데, 그 정도는 뭐 거뜬한 편이지.」

“근데 제가 어제 전자상가에서 봤는데 노트북 크기는 여전하던데요. 별로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줄어든 공간만큼 배터리를 더 넣어서 그래. 덕분에 노트북 사용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잖아.」

“그걸 보면 인간은 확실히 만족을 못하는 동물이네요.”

슈나우저 TPU 덕분에 노트북 크기가 작아질 줄 알았는데 결과는 달랐다.

제조사들이 TPU 덕분에 확보한 여유 공간에 배터리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노트북은 외관이 변하지 않으면서도 더 빠르고 놀라운 성능과, 늘어난 사용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노트북 크기를 손바닥만 하게 줄이고 싶어? 방법이 있어.」

“뭔데요?”

「획기적인 배터리를 개발하면 되는 거야. 어때?」

“……전 반도체공학기사지 배터리 개발자가 아닙니다. 화학물질에는 약해요.”

「왜, 잘할 것 같은데.」

정지원이 은근히 부추기자 한서진은 문득 ‘한 번 해봐?’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테르를 이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머릿속에 여러 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당장 통찰안으로 그 발상들을 검증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배터리를 개발한다 치고, 그럼 그것도 SJ인더스트리에서 생산하게 될까요?”

「배터리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관련 설비가 아예 없어. 근데 크렘 회장은 아마 설비 확장을 원할 거야. 왜 정말 해보려고?」

“농담으로 한 말입니다. 지금은 반도체만으로도 벅차요.”

「알지? 컴퓨터는 연산장치, 저장장치, 네트워크장치, 그리고 전력장치가 적절한 조화를 이뤘을 때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낼 수 있는 법이다.」

연산장치와 저장장치는 이미 해결했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학교 다 왔어요. 끊겠습니다.”

「배터리 생산 설비 같은 걸 확장해야겠다 싶으면 미리미리 말해 줘. 이쪽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

한서진은 급히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배터리 개발 쪽도 떠맡을 것 같다.

‘과로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팀장님.’

어느덧 포르쉐는 학교에 도착했다.

한서진은 박효산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는 이미 현진국 교수가 도착해 있었다.

“왔냐.”

“왔군요.”

“예, 도착했습니다.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교수님.”

“익숙해지면 그렇게 할게요. 아직은 영 익숙해지질 않아서…….”

좀처럼 말을 놓지 않는 것에서 현진국 교수의 인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편하게 말하는 박효산 교수의 인품이 하위라는 것은 아니지만.

박효산 교수는 근래 들어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연구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것은 현재 연구소 선임인 최태규가 주도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대신 박효산 교수는 현진국 교수, 그리고 한서진과 함께 좀 더 본질적인 연구에 골몰하고 있었다.

바로 미지의 언어와 스코브리아늄의 관계, 그 부분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미스릴, 그리고 이건 에테르라 읽는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 외는 어떻게 읽는지 전혀 모르고?”

“예. 그것도 번역처럼 달려 있던 주석 덕분에 알게 된 것뿐입니다.”

두 교수는 한서진이 써놓은, 미지의 언어로 된 두 단어를 보고 고심을 거듭했다.

유일하게 의미를 알 수 있는 두 단어, 그것이 과연 얼마나 결정적인 해석을 제시할 수 있을까.

“발음 기호라 하기에는 너무 연관성이 없군.”

“그렇다면 의미를 번역해놓은 것이 아닐까요?”

“미스릴, 그리고 에테르.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들이야. 무엇을 칭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조용히 듣고 있던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 주석을 잃어버려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미스릴은 스코브리아늄을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코브리아늄을?”

“예. 그리고 에테르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어떠한 힘을 가리키는 것 같고요. 주석에는 스코브리아늄이 에테르라는 힘에 가장 큰 반응력을 보인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허얼, 그 주석이 남아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다음에 제가 기억나는 대로 정리를 해서 가져오겠습니다.”

“꼭 부탁하네. 그게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줄 거야.”

박효산 교수는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니트론 교수님이 주장한 제5의 힘이라는 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한서진은 초조하게 바라봤다. 교수님, 그게 맞아요! 그러니까 제발 그쪽으로 좀 더 생각해주세요!

너무 눈에 띄는 건 자칫 지나친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힌트를 던져주자니, 답답해서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해서야 언제쯤 통찰안과 그 꿈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후에 수업에 있어서요.”

“그러시게.”

두 교수가 좀 더 머리를 싸매도록 놔둔 채, 한서진은 사무실을 나섰다. 중앙 연구실에는 최태규 등 연구생들이 초췌한 안색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배님들, 연구는 잘 돼요?”

“교수님이 완전히 손을 놓으셔서 제자리걸음이야. 지금은 일단 우리끼리 하고 있어.”

미지의 언어를 본 후 박효산 교수는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개발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덕분에 휘하 제자들만 죽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넌 교수님 두 분하고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연구인지 우리도 알면 안 돼?”

“대충 스코브리아늄 관련된 물질 연구인 건 알겠는데……. 대체 뭐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

“오늘 진성전자에서 높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설마 퇴짜 놓으시는 건 아니겠지?”

“진성전자에서요?”

한서진은 의아해서 물었다. 안홍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주었다.

“어제 연락이 왔는데, 진성전자에서 산학 프로젝트로 논의할 게 있다고 찾아오겠대. 정확히는 말 안 했는데 회사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사람이 올 모양인가 봐.”

“저번에는 이사가 왔었잖아요. 그럼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찾아온다는 건가요?”

“그럴 모양이더라고.”

“H반도체가 좋아하지는 않겠군요.”

“어차피 거기랑도 지금 어정쩡하게 돼서. 그 녀석들 처음에는 되게 열성적이었는데 왜 갑자기 말을 바꾼 거지?”

한서진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동연구에 열성이던 H반도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건 자신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백세완의 말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리 된 것이다.

연구실을 이용해 진성전자에게 타격을 입히라는 지시. 한서진으로서는 그런 걸 따를 수가 없었다. 진성전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이들의 연구자 인생을 도구처럼 쓰겠다는 것 아닌가.

‘재벌들이란 참.’

한서진은 문득 백철중 회장을 떠올렸다.

1세대 재벌이라고 과연 다를까? 아니면 똑같은 짓을 할까?

“그럼 전 이만 가보겠…….”

그때 벨이 울렸다.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돌아갔다. 한서진이 얼른 문으로 다가가서 방문자를 확인했다.

「진성전자에서 나왔습니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화면에 대고 말했다. 한서진이 문을 열어주자, 다섯 명의 남자들이 들어섰다.

한서진은 그중 가장 중심에 있는 남자의 얼굴에 시선이 닿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이, 매우 익숙한 느낌이다.

어디서 봤더라?

“이, 이용무 부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그때, 최태규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달려 나왔다.

한서진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람이…… 진성그룹 후계자라는 그 사람?’

============================ 작품 후기 ============================

한쿡 생활 너무 힘들어효

일요일에도 일해야 해효

힘들어효 엉엉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