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코카 스패니얼 =========================================================================
“참, 제가 미스터 한을 위해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선물이요?”
“작업 틈틈이 편안히 들러서 쉬시라고 조그마한 숙소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소유권 이전과 내부 단장을 마치는 대로 한 번 들르시지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설마 아파트라도 사주려는 건가? 하긴, 620억 달러의 자산가니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한서진은 설레는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크렘 회장은 본래 다른 한국 기업가들을 만날 예정은 없었다. 그에게 한국은 투자처로서 크게 메리트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는 한서진과 용무가 끝나면 곧장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정에 제동이 걸렸다.
“국무총리가?”
“예, 회장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하는군요.”
크렘 회장은 입맛을 다셨다.
일반 재벌 총수가 만나자고 하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애초에 비교할 수 있는 체급이 아니므로.
하지만 국무총리쯤 되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조그만 나라의 국무총리가 무서운 게 아니다. 미국 상원의원조차 아쉬울 것 없이 대하는 몸인데.
단지 일방적으로 무시했다가는 이 나라 정부의 심기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럼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진 못하더라도, 차후에 한국 관련 사업에서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떠나기 전에 잠깐 점심이나 하지.”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점심 오찬 자리가 준비되었다.
약속장소에 나간 크렘 회장은 살짝 놀랐다. 국무총리가 혼자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행원으로 보이지 않는, 마흔쯤 된 단아한 여자가 함께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크렘. 한국을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비즈니스로 방문했을 뿐입니다, 총리님. 그런데 여기 이 분은?”
“하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진성물산의 이서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 진성그룹 회장님의 따님 되시죠.”
“아, 그렇군요.”
크렘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띠었다. 자신을 진짜 만나고 싶어 했던 이는 국무총리가 아니라 이서나였던 모양이다.
오찬은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다. 세 사람은 가벼운 일상과 소소한 잡담, 그리고 경제 흐름에 간단한 논평을 하며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했다.
겉으로는 말이다.
“크렘 회장님, 실례지만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시지요.”
“SJ인더스트리의 한국 투자자를 만나러 오신 거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 해서요.”
크렘은 여유 있게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그건 확인해줄 수 없는 질문이군요. 유감입니다.”
완곡한 거절. 그러나 이서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진성전자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회사입니다.”
“세계 최고였지요.”
크렘은 친절하게 과거형으로 고쳐 주었다. 이서나의 눈빛이 조금 흠칫했으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슈나우저에 밀린 지금도 파운더리 부분에서는 명실공히 세계 1위의 회사입니다.”
“그건 사실이지요.”
반도체 위탁생산. 파운더리 분야의 1, 2위는 공교롭게도 모두 한국에 있었다.
“SJ인더스트리는 생산 라인이 미흡해 시장이 원하는 물량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흠, 제가 아는 바와는 다르지만. 계속 하시지요.”
“진성전자가 한 손을 보태고 싶군요. 가능하면 한국에 있다는 SJ인더스트리의 투자자분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중개를 바라시는지?”
“어떻게 감히 크렘 회장님께 그런 걸 바라겠습니까? 그저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작은 도움을 부탁드릴 뿐입니다.”
크렘은 조용히 웃었다. 온화한 미소를 보고 이서나도 안심한 듯이 마주 웃었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녀는 속편하게 웃지 못했을 것이다.
크렘 회장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제가 그분에게 한 마디 남겨드릴 순 있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금방 내려간다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 금방이 벌써 20분이다.”
「아무튼 금방 끝나! 전화 좀 그만해! 이럴수록 더 지체되는 거 몰라?」
“아, 그냥 올라갈게.”
「안 돼! 들어오지 마!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번호 그대로지?”
「오지 말래도!」
한서진은 성큼 계단을 타고 2층에 올랐다. 원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원룸 내부는 바닥에 늘어놓은 화장품으로 다소 어수선했다. 그 외에는 비교적 깨끗했다.
화장이 덜 된 얼굴로 한지혜가 신경질을 냈다.
“아!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갑자기 막 들어오면 어떡해!”
“너는 친오빠랑 컴퓨터 사러 가는데 무슨 화장을 두 시간씩이나 해? 나한테 잘 보여서 뭐 어쩌려고?”
“오빠한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자존심 문제야! 원래 생얼로 밖에 나가는 여자는 없거든!”
“아무튼 빨리 끝내.”
한서진은 바닥에 늘어진 것들을 밟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저분한 것은 아니지만, 원룸이 워낙 비좁다 보니 어지럽혀진 것처럼 보인다.
한지혜는 한번 매섭게 째려보고는 다시금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쪼그리고 앉아서 화장에 열중한다.
한서진은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문득 방 곳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좁네…….’
오피스텔이 아닌 소형 원룸. 그야말로 여자 한 명 겨우 살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다. 처음 와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보니 새삼스럽게 더 좁아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산 오피스텔이 좁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은 훨씬 더 좁은 원룸에 살고 있다니.
화장을 하면서 한지혜가 물었다.
“진짜 노트북 사주는 거지? 엄청 좋은 걸로?”
“그래. 너 컴퓨터 망가졌다며.”
“나 진짜 엄청 좋은 걸로 고른다?”
“엄청 좋은 거 볼 줄은 아냐?”
“슈나우저 들어간 거 고르면 되지. 요즘 그게 짱이라던데?”
쿨럭. 한서진은 하마터면 기침이 나올 뻔했다. 자신의 작품을 동생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너…… 슈나우저가 뭔지 알아?”
“알지 그럼. 최신형 CPU잖아.”
“CPU가 아니라 TPU.”
종합연산장치라는 새로운 개념의 슈나우저는 일반 CPU가 하지 못하는 다양한 종합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TPU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CPU든 TPU든. 아무튼 윈텔이 그런 건 엄청 잘 만든다니까.”
“……윈텔이 아니다.”
“윈텔 말고 CPU 만드는 회사가 있어?”
“CPU가 아니고 TPU! 그리고 윈텔이 아니고 SJ인더스트리에서 만든 거야!”
“아, 그래?”
한지혜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흘끗 보고는 다시금 화장에 집중했다.
고난과 인내의 시간이 드디어 끝났다.
“됐어, 가자.”
“……너, 나를 30분이나 더 밖에서 기다리게 할 참이었냐?”
“벌써 30분이 지났어?”
안에 와서 기다리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오랜만에 남매간의 혈투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청바지에 타이트한 흰 티를 입은 모습이 상큼해 보인다. 이대로 대학에 보내도 뭇남자들의 시선을 빼앗을 듯한 느낌. 한서진은 흡족해 했다.
“음, 좋아.”
“뭐가?”
“아니, 유전자를 나눠준 보람이 있다고. 훌륭히 잘 발아시켰구나.”
“뭐래. 오빠가 나눠 줬어? 엄마 아빠가 나눠줬지.”
엄마란 말에 한서진은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조금도 내색 않고 흘려보냈다.
남매는 차에 탔다. 조수석에 앉은 한지혜는 발을 쭉 뻗으며 즐거워했다.
“역시 차가 참 죽인다니까.”
“그래?”
“응. 이 차를 탈 때마다 내가 꼭 부잣집 딸이 된 기분이 들어.”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대형 전자랜드에 들어서자 주차장 경비요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차였으니. 한지혜는 그런 소소한 반응이 진심으로 즐거운 듯이 보였다. 얼굴에서 내내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둘은 나란히 전자상가를 거닐며 노트북을 물색했다. 물론 팔짱 같은 것은 끼지 않고, 거리도 최소 1미터 이상을 두었다.
“나, 이거. 이걸로 할래.”
“이거? 이유라도 있어?”
“슈나우저가 들어가 있고, 제일 비싸.”
매장 주인이 물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냉큼 나섰다.
“여자분께서 좀 볼 줄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이 제품은 기존 윈텔 CPU 대신 슈나우저가 들어간 제품으로, 타제품과 압도적인 성능 차이를 자랑합니다. 가격은 다소 비싸지만 전자제품은 원래 비싼 건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이건 안 돼.”
“왜?”
“너, 이게 몇 kg이나 나갈 것 같냐? 한 번 들어봐.”
“무겁게 보이기는 한데……. 겨우 4.2kg잖아?”
“……애가 4.2kg를 무시하네. 한 번 들어봐.”
한지혜는 갸웃거리더니, 노트북 뚜껑을 덮고는 들어올렸다. 낑낑거리며 품에 안은 그녀는 질린 얼굴로 내려놓았다.
“와. 4.2kg이 이렇게 무거운 거였어?”
“그거 어댑터까지 합치면 5kg 넘는다. 그걸 들고 다니겠다고?”
“……쳇, 이게 제일 비싼 건데.”
결국 노트북은 1kg대 무게 중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샀다. 제일 비싼 기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300만 원이 넘어가는 고가제품이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둘은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차에 싣고 각자 좌석에 탔다.
안전벨트를 매면서 한서진이 물었다.
“재입학은 어떻게 됐어?”
“학교에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내년 초 재입학 신청 기간에 접수를 하래. 그럼 될 거라고 하더라.”
“별 문제는 없는 거네.”
“응, 일단은.”
한서진은 가만히 동생을 살폈다. 구김 없이 밝은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동생은 궁핍하기 그지없는 집안 형편에서도 전혀 비뚤어지지 않고, 야무진 성격으로 컸던 기억이 났다.
근래에는 남자친구 문제로 다소 어두웠던 것 같았는데, 떨쳐낸 듯해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 차 시트 하나만 해도 우리 집보다 더 비쌀 텐데. 그렇지 않아?”
한지혜가 한숨처럼 말하자 한서진은 피식 웃었다.
“왜, 집에 들어가기 싫어?”
“아니, 이 차에서 내리기가 싫어. 아, 부럽다. 나도 10억짜리 차 회사에서 턱턱 사주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오빠는 대체 왜 그런 회사를 그만둔 거야?”
“그만둔 게 아니라 독립한 거라니까. 지금도 회사와 잘 지내고 있어.”
“그래도 안에 있는 거랑 밖에 있는 거랑 다르지.”
가볍게 티격태격하다가, 한서진은 문득 동생이 살고 있는 원룸을 떠올렸다.
근 20년이 다 되어가는, 비좁은 원룸이다. 그런 곳에 여자 혼자 살면 별로 안전하지도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크렘 회장이 숙소를 마련해줬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틀 전에 비서로부터 입주가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었다.
“한지혜.”
“응?”
“사실 나 집 사려고 하는데…… 너도 들어와서 살래? 방 하나 줄 테니까 살림은 네가 하고.”
“회사에서 아파트도 사준대? 방 몇 개짜리?”
한지혜는 대번에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회사에서 왜 사줘. 회사 나온 지가 언젠데.”
“그럼 저번에 그 후원자란 분이 사준대?”
“……비슷하다고 치고, 아무튼 들어와서 살 거야?”
“살림만 하면 되는 거지?”
“어차피 집에서 밥 먹을 일 별로 없다. 청소만 해놔.”
“알았어! 나야 좋지!”
한지혜는 거부감 없이 대번에 승낙했다. 비좁은 원룸에서 월세 소모하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게다가 여자 혼자 사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어디 보자. 주소가 어디더라…….”
한서진은 핸드폰을 뒤적거려 비서가 보낸 메시지를 찾았다. 소유권 이전과 내부 단장은 이틀 전에 완전히 마쳤다고 했다.
한서진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안내를 따라 차를 몰았다. 약 40분 정도 걸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당황했다. 주변에 아파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긴 공원이잖아?”
아무리 둘러봐도 도심에 지어놓은 공원뿐이었다. 내비게이션은 분명 이곳을 가리키고 있는데?
한서진은 어쩔 수 없이 크렘 회장의 비서에게 연락을 했다.
“저기, 저번에 알려주신 주소대로 왔는데 주소가 잘못된 것 같아요. 아파트 같은 건 안 보입니다. 공원 밖에 없어요.”
「아, 거기가 맞습니다.」
“네? 여기는 공원인데요?”
「원래 공원이었던 곳을 매입해 사유지 정원으로 꾸민 겁니다. 제대로 찾아가신 게 맞습니다. 잠시만요. 제가 지금 저택 관리인에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네?”
한서진은 황당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공원이긴 한데 사방으로 온통 울타리가 쳐져 있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공원 안에 있는 넓은 호수, 조약돌로 꾸민 멋진 산책길, 그리고 그 끝에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저택…….
그때, 큰 정문 옆의 조그만 샛문이 열리며 처음 보는 40대 중반의 남자가 급히 다가왔다. 그는 한서진을 알아보고는 급히 꾸벅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시지 않고요.”
“……오빠? 이게 뭔데?”
한서진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잠시 동안 얼어붙어 있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 아무리 봐도 여긴 도심 공원인데…… 여기가 제 집이라고요?”
“네. 여기 울타리 전체가 사장님 사유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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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는요???? 활주로는 어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