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코카 스패니얼 =========================================================================
「앞으로 개발하는 모든 반도체를 SJ인더스트리에서 생산하자고?」
“그러더라고요. 대신 3억 투자금 우선 배당은 현 시간부로 없던 일로 하자는군요. 그리고 토니 제나인의 지분은 자기가 설득하겠대요.”
「토니의 지분을 회수하겠다는 건가?」
“현 시가 기준으로 50%의 프리미엄을 주고 회수해서 우리 둘이 반씩 나누자고 하더군요. 그 비용은 자기가 대겠다고.”
「최종적으로 네가 87.5%, 크렘 회장이 12.5%가 되는 거네.」
“그래서 고민이에요.”
크렘 회장의 요구는 간결했다. 슈나우저 외에도 앞으로 한서진이 설계하는 반도체를, 다른 회사를 세우지 않고 SJ인더스트리에서 생산해달라는 것.
그로 인해 한서진이 얻을 이익은 토니 제나인이 갖고 있던 5% 중 2.5%의 지분, 그리고 크렘이 투자한 회사라는 타이틀이 줄 무형적 기업가치 증대.
선택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코카 스패니얼을 위한 회사를 따로 세울지, 아니면 크렘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저는 어느 쪽이 이익이고 손해인지 잘 판단이 되지 않아서요. 그래서 의논하는 겁니다.”
「실은 크렘 회장이 나한테도 연락이 왔었어.」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이상한 로비는 아니고, 너한테 잘 설명해달라는 말이었지. 크렘 회장 측은 날 너의 대리인으로 보고 있으니까.」
“팀장님 생각은 어떤데요?”
「난 원래 슈나우저만 SJ인더스트리에서, 그리고 코카 스패니얼부터는 따로 회사를 세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좀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이 바뀌신 거군요.”
정지원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미국이 아무리 기회의 땅이라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있어. 100% 외국인 소유 회사, 그것도 동양인이라면 아무래도 사업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더라. 이번에 직접 설립을 진행하면서 은근히 느꼈다.」
“그럼…….”
「크렘 회장은 그런 유리 천장을 뚫는 창이 되어줄 거야. 그리고 그가 투자자라는 사실만으로 시장 기대치가 증가하는 것도 사실이고.」
“…….”
「이상이 내 생각이고, 결정은 네 몫이다.」
―투자를 위해 왔다.
크렘 회장의 짤막한 코멘트는 재계를 흥분으로 달궈놓았다.
620억의 자산가이자 투자의 귀재. 미국의 금융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손.
그야말로 거물 중의 거물. 그런 그가 투자를 한다고 나선다면, 그 파문은 한국 경제계 전체를 뒤덮을 것이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재계 총수들은 어떻게든 그와 점심 한 끼라도 먹기 위해 안달이 났다. 그러나 그는 한가롭게 관광이나 쇼핑을 즐겼을 뿐, 어느 기업인과도 만나주지 않았다.
백세완도 크렘 회장의 방문으로 잔뜩 애가 타 있었다.
“확실한가? SJ인더스트리 투자자를 만나러 온 거라고?”
“정황상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SJ인더스트리의 주주는 총 세 명이다. 85%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페이퍼 컴퍼니, 10%의 지분을 가진 크렘 회장, 그리고 5%의 지분을 가진 토니 제나인.
슈나우저의 개발자(로 알려진) 정지원이 한국인 투자자를 뒤에 두고 있다는 소문은, 백세완이 확신을 가지는데 힘을 주었다.
“구체적인 자본 출처 구도는 알 수 없지만, 한국에 있는 투자자는 SJ인더스트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크렘 회장이 직접 찾아왔다는 건 SJ인더스트리의 성장 가능성을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하면 숨겨진 SJ인더스트리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백세완은 생각했다. 페이퍼 컴퍼니를 앞에 내세운 채 숨어 있는, 베일에 싸인 투자자.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SJ인더스트리의 지분 구도는 공개돼 있지만, 구체적인 자본 출연 관계가 어떤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10%를 가진 크렘 회장이 정말 10%만 냈을 수도 있고, 그 이상을 냈을 수도 있는 것이다.(실제로는 90% 가까이 냈다)
“자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겠지?”
“어렵습니다.”
“하긴, H기업의 이름으로 크렘 회장의 관심을 끈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H그룹이 국내에서는 5위 안에 드는 재벌 대기업이지만, 미국이라는 큰물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크렘이 작정한다면 개인의 힘만으로 H그룹 전체를 살 수도 있을 테니.
“그리고 하나 더, 진성전자 이용무 부회장이 크렘 회장과 회동 일정을 잡을 모양입니다.”
“그건 곤란한데.”
백세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SJ인더스트리의 공세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진성전자로서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리고 싶을 것이다.
국내 대기업 중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이들이니, 크렘 회장이 SJ인더스트리의 한국 투자자를 만나러 왔을 가능성을 충분히 점칠 수 있으리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발목이 이미 타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니.’
H그룹보다 더 다급한 건 진성전자가 아닐까. 반도체 사업에 그룹의 모든 것이 걸려 있을 테니.
백세완은 생각을 마쳤다.
“이서나 대표한테 연락해.”
‘정말 급이 다르구나.’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한서진은 패드컴퓨터로 크렘 회장 관련 기사를 읽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그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620억의 자산가. 최고의 투자자. 그리고 미국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거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알면 알수록 그의 위세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진성그룹조차 꼬리를 살랑거린다니.’
국내 최고의 대기업, 진성그룹.
진성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가장 막강한 힘을 지닌 대기업 후계자조차 크렘 회장을 한 번 만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기사를 보고, 한서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런 이들도 어떻게 한 번 만나려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먼 미국에서 한국까지 직접 왔다.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선글라스를 낀 크렘 회장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그는 한 명의 경호원과 통역만을 대동하고 있었다.
활동하기 편안한 나들이 복장, 누가 보더라도 그가 크렘 회장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한서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좋은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그거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크렘 회장님의 제안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대리인에게 말해두었으니, 미국으로 돌아가시면 바로 일을 진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저는 단 10분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군요.”
크렘 회장은 웃으면서 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역이 간결하게 설명해주었다.
“미국에 있는 비서실장에게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미스터 한과 협의가 끝났으니, 지체없이 미스터 정과 만나서 계약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빠, 빠르군요.”
빨라도 뭐가 이렇게 빨라? 한서진은 조금 떨떠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날 만나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왔나 보네.’
최종 합의만 얻으면 곧바로 일이 시작될 수 있도록 말이다. 한서진은 그런 행동력이 놀라웠다. 이런 추진력이 세계 최고 투자자라는 지금의 지위를 만든 거겠지?
가장 큰 합의가 너무 쉽고 빠르게 끝나버렸다.
한서진은 조금 얼떨떨했다. 나름대로 인생 최초의 빅딜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릴 줄이야.
“실은 나름대로 미스터 한에 관해서 조금 알아봤습니다. 아,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서진은 정말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고, 크렘 회장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슈나우저만큼은 아니지만 비글도 대단한 작품이었죠. 헌데 3천만 불이란 헐값에 재직 중이던 회사에 넘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 회사는 진정한 개발자가 미스터 한이라는 사실도 아직 모르고요.”
“뭐, 그렇습니다.”
“올해 한국대에 입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이 나라 최고의 명문대라고 하더군요. 생산직 일을 하면서 그런 대학을 들어간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헌데 미스터 한은 주변에 많은 것을 숨기고 있더군요. 아, 물론 드러난 것만 해도 또래에 비하면 대단하지만, 그래도 진정한 정체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유를 혹시 알 수 있을까요?”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처음 정지원은 말했다. 이 나라에서 함부로 날개를 꺼내 보이면 곤란해질 뿐이라고. 그래서 그의 조언을 따라 많은 것을 감췄고, 슈나우저라는 보물을 마침내 지켜낼 수 있었다.
만약 한국에서 슈나우저를 공개했다면? 비글의 뒤를 밟았을 것이다.
“제가 날개를 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짧은 대답. 하지만 크렘 회장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이해합니다. 한국은 미스터 한처럼 거대한 독수리가 활강하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죠.”
“아하하…….”
진심 어린 극찬이다. 그 상대가 세계 최고의 투자자다 보니 한서진은 쑥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실은, 그래서 말인데……. 아,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미스터 한도 이미 느끼고 있을 테지만, 한국은 미스터 한과 같은 인재가 그 재능을 발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약자의 재능을 무자비하게 포식해서 살을 찌우려는 강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곳이죠. 물론 제 입장에서는 강자라고 하기 민망한 수준입니다만.”
“…….”
“굳이 이런 곳에서 귀중한 재능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미국은 무한한 기회의 땅입니다. 그리고 재능 있는 자들에게는 가장 공평한 곳이고요. 세계의 무수한 인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으로 몰려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노신사의 미소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국으로 오십시오. 그곳에서 귀하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십시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희열이 넘친다는 것을, 한서진은 온몸으로 느꼈다.
가슴에 가득 고이는 희열, 그 뜨거움을 기분 좋게 맛보던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여기서 생활하는 게 편합니다. 낯선 땅은 힘들어요. 가족과 친구, 지인도 모두 여기에 있고요.”
“하지만.”
“그리고 영어를 못해요.”
독해는 기가 막히게 잘하지만, 듣고 말하는 건 여전히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일단 귀가 안 뚫린다.
크렘 회장은 조금 난감한 기색이었다. 한서진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자신 때문에 서운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그에게 흠뻑 빠져 버린 탓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도체 사업은 앞으로도 계속 미국에서 SJ인더스트리를 통해 할 겁니다.”
“아, 그럼?”
“네. 여기에서 특별히 사업을 할 예정은 없어요. 회장님의 말씀처럼 저에게 정말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그 재능은 모두 미국 땅에서 발휘할 생각입니다.”
“호오, 그렇군요.”
크렘 회장은 안심했다는 듯이 웃고는, 문득 진지하게 표정을 다잡고 물었다.
“그럼 귀하가 최근에 설립한 벤처 기업은 어떻게 된 건가요?”
“그냥 재택근무라 이해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SJ인더스트리 설계실에 제가 매일 출근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하, 무슨 말인지 납득했습니다.”
크렘 회장은 마음을 놓았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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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스케일이 넘나 커지고 있어여.. 어떻게 감당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