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86화 (86/609)

00086  코카 스패니얼  =========================================================================

“공동 연구를 없던 일로 하자고? 정말 교수님이 그리 말씀하셨단 말인가?”

백세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따져 물었다. 척 보기에도 불쾌해 보인다. 직원은 급히 머리를 숙이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H반도체의 지원은 필요 없으시다고…….”

“갑자기 왜?”

“아무래도 저희 측이 새로 덧붙인 조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서진 그 친구를 프로젝트에서 제외하라고 한 거 말입니다.”

“겨우 그거 때문에?”

납득이 되지 않는다. H반도체에서 이번에 책정한 프로젝트 예산은 무려 3조 원이었다. 물론 그 3조 원이 전부 박효산 연구실에 투입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상용화에 사활을 걸겠다는 회사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런데 겨우 1학년 학부생 한 명 때문에 거절하다니.

“제자 아끼는 분인 거야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되는데.”

“박효산 교수님이 평소 한서진이한테 상당한 애정을 쏟아 붓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자기 후계로 키울 생각이신 건 아닐지…….”

“한서진이가 박 교수님 후계?”

백세완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아직도 그날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하던 그 표정.

가문의 어른을 제외하고, 이제껏 누구에게도 거절당해본 적 없는 백세완으로서는 이가 갈렸다.

‘만약 정말 후계로 키우겠다면…….’

학자의 길을 걷겠다면 그건 자신이 막을 수가 없다. 아무리 재벌의 힘이 막강하다 해도 한계는 있으니.

박효산 교수가 국내 과학계에 가지는 영향력도 만만치 않고, 그의 은사이기도 했으니.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한서진, 이 놈…….’

백세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따지고 보면 그와 자신은 같은 모교이면서, 또한 같은 스승 아래에서 수학한 동문이 아닌가. 학연으로 따지면 누구보다 깊은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저 녀석이 후배로서 조금만 굽혀줬으면 됐다. 그랬으면 자신도 녀석을 아낌없이 지원해줬을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 녀석이 어리석은 치기 때문에 관계를 망친 것이다.

“사무소 현황은 어떤가?”

“한서진 그 친구 외 두 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 출신인 하정태 전 과장과 따로 고용한 경리 직원입니다. 하정태 전 과장이 출근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외부에서 일감을 할당받은 것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 거래처는 없다 이거지?”

“네, 지금까지는 발생 매출이 0원입니다. 아마 한서진이도 이번 박효산 교수 프로젝트 협업에 희망을 걸고 있었겠죠.”

“그게 무산됐으니 발을 동동 구르겠군.”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백세완은 한서진의 당당한 눈빛을 떠올렸다.

회사 정치 같은 것은 싫고, 오로지 설계 업무만 하고 싶다. 그 당당함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백세완의 시선에서는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했다.

“매출이 없다면 특별히 건드릴 건 없겠지. 단, 외부에서 일감을 따올 듯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개입해.”

“예.”

“녀석이 단 한 푼도 벌지 못하게 막으란 말일세.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백세완은 문득 생각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박 교수님 랩은 연구자금이 풍부하지 않나? 진성전자가 의뢰한 EPR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냈으니.”

“예. 애초에 약속한 연구 지원 자금 중 남은 금액도 모두 지원받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박 교수님이 그 자금으로 한서진이를 도울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일단 연구 자금 중 일부만 선지급된 상태고, 남은 자금은 장기에 걸쳐 할부로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진성전자가 이미 공증을 해줬고요.”

“만약 진성전자가 그걸로 장난을 친다면?”

“공증까지 했으니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러나 백세완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나라에서 재벌이란 이름의 하이패스로 안 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백세완은 이서나를 떠올렸다.

프로젝트가 이미 종료되었는데도 수천억 원의 연구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그런 공증을 했다는 게 그룹 내에서 공론화되면 이용무 부회장의 입지가 꽤 난처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서나는 충분히 그런 분위기를 지필 수 있을 테고.

“죄송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이번 일은 양보를 해드릴 수가 없군요.”

은사를 향한 사죄의 뜻을 담은 채, 백세완은 비릿하게 중얼거렸다.

“랩에서 이야기는 대강 들었다.”

하정태가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서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들으셨어요?”

“H반도체와 공동 연구가 무산됐다던데…….”

“저 때문이죠, 뭐. 전 빠져도 괜찮다고 했는데 교수님이 화가 여간 나신 게 아니라서요.”

“박 교수님이 마음에 든 인재를 엄청 아끼는 건 유명하시지. 자기 자식 이상으로 끔찍이 생각하시니까.”

한서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부모의 사랑 같은 건 익숙하지 않은 삶이어서 그런지, 박효산 교수의 그런 애정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괜찮을까? 백세완 실장이 작정하고 방해하면 한국에서 사업하기 곤란해질 텐데.”

“어차피 우리 사무소는 한국에서 사업 할 일은 없으니까 상관없습니다.”

“하긴.”

“이번에 설계한 코카 스패니얼도 결과가 아주 좋아요. 지금 정 팀장님이 코카 스패니얼을 생산할 회사를 알아보러 다니고 있어요. 처음부터 새로 설립하는 건 시간이 너무 걸리니, 기존 회사를 인수하는 방향으로 갈 것 같습니다.”

“왜 SJ인더스트리에서 생산하지 않고?”

“시간은 절약되겠지만…… 그만큼 제가 먹는 수익이 줄어들잖아요.”

“이제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거네.”

“그렇죠.”

한서진은 여유 있게 대답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정태가 문득 말했다.

“대단하다.”

“……네?”

“처음 네가 비글을 설계했을 때……. 언제고 성공할 대단한 천재라는 건 느꼈다. 그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에이, 성공이라니요.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같은 동료였는데, 이제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구나.”

씁쓸한 기색보다는 경외가 섞인 음색이다.

“다른 세상이라뇨, 안 그래요. 지금도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잖습니까.”

“아무튼 간에.”

하정태의 시선이 은근 부담스러웠던 한서진은 얼른 모니터로 고개를 묻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지혜가?’

시간을 확인한 그는 의아했다. 한지혜가 근무 시간에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 나야.”

「오빠, 뭐해?」

착 감긴 목소리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무슨 일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 있어.”

「그 오빠가 전에 차렸다는 벤처? 그럼 시간 좀 낼 수 있겠네?」

“응, 왜?”

「얼굴 보고 얘기하면 안 될까?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 시간에?”

대낮인데 회사로 오겠다고? 심상치 않은 예감을 받은 그는 급히 끄덕였다.

“알았어. 이쪽으로 와.”

「금방 갈게.」

한지혜는 말 그대로 금방 도착했다. 전화를 끊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도착한 것이다. 아마도 근처에 있다가 전화를 한 게 틀림없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한지혜는 초췌해 보였다. 어린 시절 과자 하나를 놓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던 동생이 저러고 있으니 그저 측은해 보인다. 그때의 흉폭함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백화점은 어쩌고?”

“나 그만뒀어.”

“……그만 둔 거야, 짤린 거야?”

“그만 뒀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다. 한서진은 한지혜가 결코 자의로 그만둔 게 아님을 느꼈다. 대책 없이 밥줄을 끊어버릴 애가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남자친구는 알…… 아참.”

“헤어졌다고 했잖아. 그새 잊었어?”

“잊은 건 아니고, 말이 좀 헛 나왔다. 미안.”

한지혜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다른 백화점에 가면 되잖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동종업계는 못 가. 아마 유통 서비스 쪽에서는 나 안 받아줄 거야.”

“……너, 대체 무슨 사고를 쳤는데?”

“글쎄…… 잘못 찍힌 것도 사고라면 사고겠지.”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서진은 지금만큼은 묻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동생 잘못이 아님은 믿을 수 있다. 어려서부터 야무진 아이였으니까.

“혹시 오빠 벤처에서 일할 수 있어?”

한지혜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회사?”

“경리라든가, 아니면 사무 보조라든가. 나 그런 살림하는 건 잘하잖아. 혹시 자리 있어?”

“자리야 만들면 되지만…….”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안 그래도 사무 보조용으로 직원 한 명을 더 뽑을까 궁리하고 있는 중이다. 한지혜를 데려다가 그 일을 시키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너, 그러지 말고 대학 갈래?”

“대학이라니, 내 형편에 무슨…….”

“내가 등록금이고 생활비고 대줄 테니까 지금부터라도 공부해서 가봐. 아니다, 그냥 재입학하면 되지?”

“이 나이에 무슨 대학이야? 너무 늦었어. 돈 낭비야.”

“뭐가 늦어? 너 이제 23이야. 난 24에 수능 쳐서 25에 대학 들어왔고.”

“오빠는 한국대잖아.”

“누가 너더러 한국대 가래? 그냥 네가 다니던 대학 가라니까. 돈 없어서 1학기만 마치고 말았잖아.”

원래 한지혜는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3년 전, 살인적인 등록금 때문에 1학기만 간신히 다니고 장기 휴학을 했다. 지금은 제적 상태, 그래서 그녀의 공식 학력은 고졸이다.

“오빠가 그 돈을 대주겠다고? 그럴 돈이 어딨는데?”

“걱정하지 말고 대학 가. 돈은 내가 알아서 할게.”

“오빠도 벤처 한답시고 그간 모은 돈 다 털어 넣었으면서, 나 뒷바라지해줄 돈이 어딨어?”

한지혜는 차분히 말했다. 초탈한 듯해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체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들 남매에게 체념과 포기는 산소처럼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돈 문제만 해결해주면 대학 갈 거야?”

“갈게. 한국대를 가라고 해도 갈 테니까 증거 대 봐. 오빠가 그럴 돈이 어딨는데?”

“대학 마치려면 얼마 필요해? 생활비까지 다 포함해서?”

한서진이 다그치듯이 묻자 한지혜는 엉겁결에 계산에 들어갔다.

“한 학기 등록금이 450 정도고 교재비가 50 정도니까…….”

“넉넉히 잡아서 일 년에 학비만 1,300. 한 달 생활비를 200으로 잡으면 일 년 생활비만 2,400.”

“무슨 계산이 그래? 누가 생활비를 200이나 써?”

“내가 쓰라면 써.”

“…….”

“일 년에 3,700씩 4년이면 1억 4,800. 넉넉히 이 돈이면 알바 같은 거 걱정 없이 대학 4년 마칠 수 있다는 거네. 그렇지?”

“……그렇지. 그 돈을 대주겠다고?”

“기다려. 지금 바로 쏴줄 테니까.”

한서진은 패기 넘치게 핸드폰을 꺼냈다. 모바일뱅킹으로 접속해 잔고를 확인하는 순간…….

“1,500만 원으로 어떻게 하려고?”

한지혜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상치 못한 수치스러운 상황에 귀밑까지 벌게진 한서진은 급히 전화번호 목록을 찾았다.

“너, 잠깐만 기다려.”

“또 어디에 전화하게?”

잠시 후 신호가 멈추며 연결이 되었다.

「전화 받았다.」

“팀장님, 이유는 묻지 마시고 지금 제가 부르는 계좌에 바로 2억만 꽂아주세요.”

「알았어. 그거면 돼?」

“네, 그거면 됩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한서진은 여유 만만하게 동생을 바라봤다. 한지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말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2억을…….”

그때 한지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은행 웹 발신 문자를 확인한 한지혜는 펄쩍 뛸 듯이 놀랐다. 2억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였기 때문이다.

“오, 오빠?”

“됐냐? 대학이나 처 가.”

“그게 아니고…… 이거 뭔가 이상한데? 2억 원이 아니라 2억 달러라고 돼있어.”

============================ 작품 후기 ============================

"똑바로 단위를 말해라, 사장. 왜 2억 원이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았나?"

PS : 핫탄은 어제 편도선이 너무 아파서 푹 잤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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