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코카 스패니얼 =========================================================================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한서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백세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자네가 알런지 모르지만, 난 오너 일가 사람일세. 백철중 회장님께서 내 큰아버지가 되시지.”
“…….”
“H반도체 사장 정도는 충분히 밀어줄 수 있단 소리야. 물론 지금은 자네가 너무 어리고 경력이 안 돼서 곤란해. 하지만 10년만 절차부심하면 최연소 사장으로 그 자리에 앉는 것은 가능해. 내가 자네 미래를 봐주지.”
한서진은 문득 생각했다. SJ인더스트리의 기업 가치가 지금 얼마라고 했었지?
‘100억 달러라고 했지, 아마?’
자신은 그 회사의 지분 85%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H반도체의 사장 자리, 그것도 10년짜리 만기 어음은 과연 얼마나 되는 가치가 있을까?
그걸 생각하니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동문 선배라고 필사적으로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왜 대답이 없나?”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받아들일 텐가?”
백세완의 표정은 여유만만했다. 네가 감히 거절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듯한 자신감이 넘쳤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뭐?”
거절은 상상하지도 않았는지, 백세완은 잠시 후에야 겨우 반응을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이 그가 얼마나 황당해하고 있는지 말해주었다.
언제나 냉정했던 그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것은 한서진도 처음 보았다. 왠지 신선했다.
“저는 반도체 개발자입니다. 반도체 연구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사내 정치, 그것도 타회사의 승계권 다툼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자네…….”
얼마나 당황했으면, 백세완은 말도 잇지 못했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SJ인더스트리 덕분인가, 백세완의 제안이 우습지도 않게 들렸다. 내가 누구인데, 그런 시시한 제안을 해? 라는 생각이 혀끝을 맴돌았다.
그러나 한서진은 그런 속마음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정중하게 선을 그었다.
“내 말을 거절하다니…….”
백세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평생 거절에 익숙해본 적 없는 사람의 표정이다. 한서진은 왠지 그런 면모가 오만하게 느껴지기보다는, 그의 나약함으로 비춰졌다.
“혹시 SJ인더스트리 때문인가?”
“네?”
한서진은 잠시 놀랐다. 혹시 백세완이 자신이 SJ인더스트리 주주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저런 시시한 제안을 하지 않았을 텐데?
“정지원이가 자네한테 뭔가 약속을 해줬나 보군. 아닌가?”
한서진은 맥이 빠졌다. 겨우 그런 거였어?
백세완은 엄한 얼굴로 말했다.
“정지원이가 무슨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믿지는 말게. 지원이와 자네는 겨우 일 년도 안 되는 시간을 함께 했어. 그런 녀석이 자네한테 뭘 얼마나 해줄 것 같은가?”
“…….”
“SJ인더스트리에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 해주던가? 아니면 SJ인더스트리의 업무를 자네 그 쥐꼬리만 한 사무소에 위임한다고 하던가?”
쥐꼬리라니, 그 말에는 한서진도 조금 울컥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표정을 지켰다.
백세완이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원이가 무슨 말을 했든 그건 공수표에 불과해. 자네를 중요히 쓸 거였음 진작 미국으로 오라 했지, 여태껏 한국에 남겨두었겠나? 자네는 입에 발린 말에 속고 있는 거야. 사람을 보는 안목을 키우고, 누워도 되는 자리인지를 잘 구별하게.”
“실장님, 뭔가를 오해하신 것 같은데…….”
“내 말 아직 안 끝났네.”
“제 말씀부터 들으시죠.”
한서진은 지지 않고 말을 자르고 나왔다. 백세완은 흠칫 해서 ‘이것 봐라?’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저런 표정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참 안 되어 보였다. 이것이 마음의 여유라는 것일까.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반도체 설계입니다. 전 이걸로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럴 자신도 있고요.”
“…….”
“하지만 타회사 경영 싸움이니, 사내 정치니 그런 건 간섭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싫어서 저만의 사무소를 차린 것도 있고요. 그러니 저한테 그런 제안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
“앞으로도 동문 선배로서 부르는 거라면 기꺼이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일로 사람 곤란하게 하시면 저로서도 난감합니다.”
“……알았네. 그만하게.”
백세완은 손을 가볍게 들었다. 표정이 말끔히 사라진 얼굴색이 차가워 보인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만해도 되네.”
“죄송합니다, 선배님.”
“실장님이라고 부르게.”
“……예, 실장님.”
한서진은 덤덤하게 고쳐 불렀다. 차가운 명령조였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만큼.
둘은 달리는 차안에서 계속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느 순간 차가 정지했고, 한서진은 아무 소리 없이 차에서 내렸다.
“들어가십시오, 실장님.”
“자네.”
문득 백세완이 나지막하게 불렀다.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한국 땅에서 H그룹을 거스르고도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아니면 지원이가 자네를 보호해줄 거라 믿는 건가?”
내려간 차창 너머로 슬쩍 보인 백세완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건승을 기원하지.”
스르륵 유리창이 닫히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한서진은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가만히 주시했다.
이상했다. 전 같았으면 팔이 덜덜 떨리거나 혹은 쓰디쓴 맛이 입안에 맴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8살이나 연상인 그가 ‘귀여워’ 보였다.
“내가 미쳤나 봐.”
한서진은 소름이 돋는다는 시늉을 하며 팔을 북북 긁었다. 빌딩을 향해 터덜터덜 걸으면서,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어, 서진아.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야?」
“팀장님, H반도체와 정확히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아직은 백 회장 측이 만나고 싶어 하는 거 계속 거절하고 있지. 일단 길들이기부터 한 다음 결정할 생각이다.」
“그래요? 완전히 안 하기로 한 건 아닌가 보네요.”
「상황 봐서 파운더리를 맡길 수도 있고, 아예 바보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고. 그건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결정할 거야. 원래 비즈니스라는 건 이익만 되면 어떤 결정이든 뒤집어질 수 있는 거니까.」
“일단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는 하청 주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었구나?」
“비슷합니다. 아무튼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는 절대 어떤 계약도 안 됩니다.”
「……달라졌구나. 알겠다.」
통화 너머 정지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전화를 끊은 한서진은 잠깐 멈춰 서서 백세완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존심 문제로 슈나우저 위탁생산을 포기했을지 몰라도, 백철중 회장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끈덕짐 덕에 무일푼에서 지금의 H그룹을 세워냈으리라.
문득 알고 싶어졌다.
백세완 때문에 SJ인더스트리와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는 걸 백철중 회장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세완은 H그룹에서 어떻게 될까?
‘내가 이런 놈이었나?’
자신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 줄 몰랐던 한서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그리고 피식거렸다.
“그래…… 팀장님 말마따나 이제 슬슬 대주주 노릇에도 익숙해져야지.”
한서진은 쾌활한 발걸음으로 오피스텔에 들어섰다.
“서진이 너, 무슨 일 있었어?”
다음 날, 연구실에 들르자마자 안홍철이 꺼낸 말이었다. 한서진은 의아한 눈으로 반문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왜요?”
“H반도체에서 연락 왔는데 이번에 스코브리아늄 산학협동 프로젝트 하기로 한 거, 연구실 단독으로 하자는데?”
“단독?”
“보안 문제 때문에 외부업체 절대 끼우지 말고, 석사 과정 이상만 연구에 참여시키라고.”
“…….”
“돌려 말했지만 결국 넌 빼란 소리 아니야. 그쪽 관계자도 그 점을 넌지시 말하더라고. 그래서 묻는 거야. 너 전 직장이란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냐고.”
“교수님은 뭐라고 하시는데요?”
“당연히 노발대발하시지.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 바꾸기냐고. 이런 식이면 산학 협동이고 뭐고 없다고.”
“그래도 교수님은 제 편이군요.”
안홍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가서 백 선배님한테 싹싹 빌고 푸는 게 좋을 것 같다. 꼭 이번 프로젝트 때문만은 아니야. 이 나라에서 재벌한테 찍히면 성공 못해.”
“별로 이 나라에서 성공할 계획은 없는데요.”
이미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또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예정이지 않은가. 처음부터 한국은 생활하고 작업하는 곳이지, 사업하는 곳은 아니었다.
“너, 아직 어려서 모르는데 나중 일 어떻게 될지 몰라.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빨리 가서 싹싹 빌어. 그래야 나중에 네 장래에 락스 안 붓는다.”
“괜찮아요. 상관없습니다.”
싹싹 빌어야 할 쪽이 잘못된 것 같지만, 굳이 그 점을 짚어주지는 않았다.
안홍철 등 연구실 선배들은 진심으로 한서진을 걱정해주었지만, 박효산 교수는 오히려 차분했다.
“세완이와 풀 마음은 없는 거냐?”
“제가 잘못한 것은 아니라서요. 납득할 수 없는 요구를 하셨고 저는 그것을 거절했을 뿐입니다.”
“그 녀석이 원래 그런 면이 좀 있긴 했지. 알겠다. 그럼 H반도체와 협업하기로 한 건 없던 일로 하자.”
박효산이 쿨하게 결정하자 최태규 등 연구생들은 화들짝 놀라서 반발했다.
“교수님! 이러시면 안 되죠!”
“연구 지원도 연구 지원이지만, 서진이 미래는 그럼 어떡하고요? H그룹에 단단히 찍히면 갈 데 없는 거 아시잖아요? 서진이가 이 창창한 나이에 벌써부터 치킨집 차리라고요?”
“세완 선배도 교수님 제자인데, 교수님이 중간에 잘 중재해주시면 되잖아요. 따지고 보면 둘이 동문이고 또 같은 스승 아래 사형제 아닙니까?”
“사극 찍냐? 요즘 세상에 사형제는 무슨 얼어 죽을.”
박효산 교수는 혀를 끌끌 차며 한서진을 돌아봤다.
“병아리 세 마리가 시조새 걱정해주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냐?”
“……시조새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서진이 슈나우저 개발자라는 걸 아는 박효산으로서는 세 제자들의 걱정이 그저 우습지도 않았다.
“세완이 녀석,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다. 아무튼 이 일은 결정 났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라.”
결국 한서진이 독립하면서 세웠던 명분, H반도체와 연구실의 협동은 무효로 돌아갔다. 한서진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H반도체와 깔끔하게 정리된 셈이니.
백세완은 아마 그 자존심에 이를 바드득 갈고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훼방이 들어온 걸 보면, 아마 이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어떤 식으로 사업을 망칠 수 있을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상상이 안 간다. 제3자가 보기에 자신의 사무소는 일감 수주가 없어서 하루하루 파리만 날리고 있는 영세업체인데.
어쩌면 백세완은 그걸 보면서 만족해할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니 왠지 살짝 불쌍하기도 했다.
‘내가 확실히 미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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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지 동냥하러 왔습니다..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