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코카 스패니얼 =========================================================================
“그러고 보니 반도체 전문가라면서요?”
차분한 질문에 한서진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빨려 들어갈 듯한 눈과 마주치자, 살짝 손끝이 떨린다. 미성년자 앞에서 이 무슨 추태지, 하고 그는 속으로 자책했다. 그리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전문가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 배우는 학생일 뿐이거든요.”
“회사 다니면서 한국대 반도체공학부에 수석으로 입학한 인재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회장님이 아끼던 포르쉐도 선물해 주셨다고요.”
“아, 그건…….”
송하나가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한서진은 민망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폈다. 검은 미니스커트에 짙은 커피색 스타킹을 신은 다리는 길고 늘씬했다. 흰 블라우스 위로 두드러지는 볼륨감은 실로 훌륭했다.
성숙한 오피스 커리어 우먼의 복장은 그녀가 지닌 매력을 한껏 강조해준다. 소녀 특유의 앳됨을 찾아볼 수 없는 청순한 얼굴은, 도저히 그녀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학생이 교복을 안 입어서 이상해 보이나요?”
“네?”
한서진은 퍼뜩 날아온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송하나가 묘한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뭐, 이해해요. 제가 좀 노안이라서 교복은 사실 별로 안 어울리더라고요.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성숙해 보이는 옷으로 주로 입죠.”
교복이 안 어울린다고? 그 말은 차마 동의를 못하겠다.
지금의 복장도 성숙한 얼굴과 몸매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지만, 풋풋한 교복도 그녀의 차분한 분위기와 기묘한 조화를 빚어내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또래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기보다는, 이미 완성된 미모라는 느낌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재벌 총수가 애지중지하는 막내딸이 아닌가. 아마 학교에서는 또래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여신이 아닐까.
엘리베이터가 잠시 멈추자, 한서진은 얼른 내렸다. 당연하지만 송하나는 같이 내리지 않았다.
“반가웠어요.”
문이 닫히기 전 잠깐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짤막하게 인사를 했다. 스르륵 문이 닫히기 전, 통찰안이 비춘 그녀의 진실은…….
‘반적합.’
‘미치겠네. 대체 반적합이 무슨 뜻이야?’
아예 안 보고 살면 신경을 안 쓰겠는데, 또다시 마주치자 한서진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좀 잊을 만하면 신이 농간이라도 부린 건지 스쳐 지나가곤 하니.
‘여자친구로서 적합하지도, 부적합하지도 않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한서진은 복도를 걷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어느덧 그는 백세완 실장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그는 옷차림을 간단히 확인하고는 가볍게 노크를 했다.
“들어오게.”
안에서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백세완 실장은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중년의 여자가 함께 있었다. 얼굴만 보면 마흔 초반쯤 되었을까?
세월의 흔적을 숨길 수는 없지만 얼굴에는 기품이 가득했다. 젊었을 적에는 상당한 미모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걸치고 있는 옷은, 명품 브랜드를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품격이 흘렀다.
“어서 오게.”
“조금 늦었습니다, 실장님.”
“하하, 선배님이라고 부르래도. 후배님도 참.”
백세완은 사람 좋게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중년의 여자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백 실장, 이 젊은 분은 누구지?”
“아, 대표님.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제가 전에 몇 번 말했던 모교 후배입니다.”
“아, 기억났어. 한국대 수석 입학했다는 그 친구?”
“예, 맞습니다.”
“그럼 나한테도 동문 후배가 되겠네. 비록 과는 다르지만.”
“그렇지요.”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나 이서나라고 해요.”
‘이서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반사적으로 악수에 응하던 한서진은 순간 벼락이 정수리에 꽂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던 것이다.
진성그룹 총수의 장녀, 이서나.
진성전자 부회장 이용무의 누나이자, 진성물산의 사장이며, 그룹의 승계권을 다투고 있는 진성그룹의 왕녀.
“이런, 내 얼굴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네.”
“사진만 보다가 실물을 보면 못 알아보기도 하는 법이죠. 자, 편히 앉게.”
한서진은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서 눈길을 거둔 이서나는 팔짱을 끼며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나누던 이야기가 여간 무거운 주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EPR 프로젝트가 지연되면 더 좋았을 텐데…… 참 결과가 아쉽게 됐어. 덕분에 그룹에서 용무 입지가 더 올라갔지.”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참, 능력도 안 되는 아이가 겨우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룹을 물려받는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한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EPR 프로젝트, 박효산 교수가 진성전자와 마지막에 추진했던 산학협동 연구다. 자신의 힘으로 몇 달을 앞당겨 완료했던.
만약 그걸 알면 이서나가 호의적인 눈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조금 긴장되었다.
말로만 듣던 그룹 후계자 다툼. 그 한 명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일단 서진이도 왔으니, 이만 일어나시죠. 제가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할게.”
“자아, 자네도 일어나게.”
백세완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사옥을 나선 그들은 대기 중인 세단에 올랐다. 차는 곧 부드럽게 출발했다.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이서나가 문득 물었다.
“후배님은 그럼 백 실장 밑에서 일하고 있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백세완이 먼저 대답했다.
“비슷합니다. 지금은 일단 회사에서 내보냈습니다.”
“독립시켰구나.”
“네, 일개 직원으로 남겨두기에는 아까운 인재라서요. 회사 밖에서 이런저런 경험 많이 시켜서 사장급 인물로 키우려고 생각 중입니다.”
“좋은 결정이네.”
백세완이 마치 자기 라인처럼 하는 말에 한서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굳이 반박해서 그에게 창피를 줄 필요는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차가 정지한 곳은 한강 부근의 어느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백세완은 능숙하게 이서나를 에스코트했다.
“어서 오십시오.”
지배인 및 직원들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그들을 맞이했다. 지배인이 다가오자 백세완은 자연스럽게 주문을 했다. 정중히 인사를 한 지배인이 물러가고, 이서나가 입을 열었다.
“백 실장, 한국대와 산학 연구하기로 한 거 말인데.”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 지금 일이 매우 잘 풀리고 있습니다.”
“내가 믿어도 되는 거겠지?”
“그럼요. 마침 여기 서진이도 박효산 교수 연구실에 다니고 있습니다. 박효산 교수가 아끼는 인재지요.”
“정말?”
이서나는 의외라는 눈으로 한서진을 바라봤다. 호의라기보다는 흥미가 담긴 눈, 한서진은 가냘픈 그녀의 모습에서 암호랑이 같은 차가운 기세를 읽었다.
“어쩐지, 백 실장이 동문 후배라고 아무나 함부로 소개시켜줄 사람은 아닌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이서나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한서진을 바라봤다.
“생각 이상으로 유능한 인재였군요. 내가 몰라 봤어요.”
“……아닙니다.”
가볍게 ‘동문이구나’하고 인사만 하고 말았던 아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태도부터 달라졌다. 반쯤은 없는 사람 취급했던 아까와는 달리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요? 한 대표 설계회사가 박효산 교수 연구실과 협동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예, 우리 H반도체에서 자금 및 전반적인 지원을 하고 있지요.”
“잘 됐으면 좋겠어.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개발이 부디 성공해야 할 텐데.”
입가를 닦으며 이서나가 태연히 말했다.
“그래야 용무가 운신 폭이 좀 줄어들겠지.”
한서진의 포크가 우뚝 멈췄다. 동시에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이서나는 진성그룹의 사람이다. 하지만 H반도체가 진성전자를 이겨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이용무 부회장이 곤란한 지경에 처할 테니까.
경쟁자를 쳐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손실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
가슴속에서 묘한 거부감이 솟구쳐 오른다.
‘이런 게 재벌의 사고방식?’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이서나는 레스토랑까지 따라온 자기 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 한서진에게 명함을 건넸다.
“한 대표. 어렵거나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우리는 동문이잖아요, 후배님?”
그녀의 미소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온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서진은 백세완의 차를 타고 돌아왔다. 출발 직후 말이 없던 백세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서나 대표님을 본 소감은 어땠나?”
“……뭔가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는 분 같았습니다. 그리고…….”
“괜찮으니 솔직히 말해보게.”
“야심이 있으신 분 같던데요.”
백세완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것은 만족이 담긴 미소였다.
“야심이라. 그렇지. 이서나 대표님은 야심, 그리고 야망으로 가득한 분이시지. 아마 그 분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바로 여자로 태어난 것일 거야.”
“…….”
“이창용 회장님의 장녀이면서도, 여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동생에게 진성전자를 빼앗겨야 했으니까.”
“……포기한 것 같아 보이진 않던데요.”
“마지막까지 주저앉을 분이 아니거든. 덕분에 우리 H반도체가 숨 돌릴 틈도 생겼고.”
한서진은 문득 생각했다.
진성전자와 H반도체는 분명 적이다. 게다가 백철중 회장이 진성그룹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한 번 봤다.
그러나 백세완의 지금 태도는 무언가? 저 두 가지와 모순되지 않는가?
‘적의 적은 우군이라는 건가.’
진성전자에 비수를 찔러 넣기 위해 이서나와 손을 잡다니. 백세완이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서나는 어떤가. 동생을 끌어내리기 위해 진성전자에 손해가 되는 일을 감수하고자 하지 않는가.
“자세히 말을 할 순 없지만, 진성전자에도 이서나 대표님의 라인이 있네. 그들이 내부에서 힘이 되어줄 거야.”
한서진은 내내 의아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있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세완에게 자신은 크게 중요한 장기말도 아닐 텐데, 왜 이서나라는 거물에게 소개까지 시켜줬을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오늘 저를 왜 부르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백세완은 잠시 뜸을 들였다. 대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그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람을 압도하는 강렬한 눈빛이, 위압감을 주듯 직시한다.
“박효산 교수님은 국내 최고의 반도체 과학자지. 또한 스코브리아늄 연구의 최고 선두자이기도 해.”
“…….”
“슈나우저에 밀린 지금, 진성전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박효산 교수님과 손을 잡으려 할 거야.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상용화에 성공하면 그 열세를 만회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수님은 지금 진성전자라면 이를 갈고 있습니다.”
박효산이 진성전자와 손을 잡을 것을 염려하는구나. 한서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백세완의 말은 전혀 의외였다.
“아니, 자네가 교수님을 설득해서 진성전자와 산학협동 연구를 하게 해. 우리 회사와 하는 연구와 별개로 양다리를 걸치게 만들란 말일세.”
“예?”
“왜긴? 진성전자와 더욱 친한 관계를 만들어야 더 치명적인 비수를 찔러 넣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백세완은 비릿하게 웃었다.
“자네가 그 역할을 맡아주게. 그럼 10년 후, H반도체 사장 자리를 약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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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이 누더기 입고 쪼렙존에서 놀다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죠.ㅋㅋㅋ
그저 커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