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에테르 언어 =========================================================================
놀란 것은 잠시, 정지원은 곧바로 대답했다.
“거절할게.”
“네?”
거절할 줄 몰랐던 한서진은 당황했다. 순간 자신이 지금 잘못 들었나 싶었다. 왜 유리한 조건을 스스로 물리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마음은 고마워. 날 얼마나 좋게 생각하는지도 알겠어.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무슨……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드리겠다는 것을 왜 거절하세요?”
“정당한 대가가 아니니까.”
“…….”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SJ인더스트리의 예만 봐도, 새로 설립할 회사의 지분 가치가 폭발하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회사의 49%를 주겠다는 것인데, 왜 거절하는 것일까.
“정당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요. 팀장님이 저를 위해 해주신 일이 너무 고마워서 드리겠다는데, 그게 뭐가 정당하지 않다는 거죠?”
“난 그만한 가치의 일을 한 적이 없어. 그래서 정당하지 않다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팀장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거예요. 당연히 팀장님은 그만한 지분을 받을 가치가 있어요. 자격이 돼요.”
“아니, 그냥 네가 고마워서 그만큼이나 주려는 거잖아.”
“…….”
“넌 지금 고맙다는 감정에 취해 있어. 지금이야 나한테 고마워서 지분이든 뭐든 다 해주고 싶겠지. 혹시 코카 스패니얼 특허권도 나한테 그냥 주고 싶은 마음 있는 거 아니야?”
한서진은 뜨끔했다.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정지원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거, 일시적인 감정이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너 분명 후회한다. 내가 미쳤지, 그때 왜 그렇게 많이 퍼줬을까. 그렇게.”
“……그건.”
“그때 가서 많이 아까워질 거야. 그렇다고 네 성격상 나한테 다시 돌려달란 말도 못할 거고, 속으로 끙끙 앓겠지. 그러다가 결국 내가 밉게 보이기 시작할 테고.”
“…….”
한서진은 아무 말도 못했다. 정지원의 말에 설마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가 되면 난 네 신뢰를 잃겠지. 난 그런 결과는 바라지 않아. 그러니 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전 후회 안 할 자신 있습니다.”
한서진은 겨우 입을 열었다.
“팀장님 아니었으면 저 지금까지 계속 우물에 안주했을 겁니다. 저 개안시켜주신 분이 팀장님입니다. 솔직히 SJ인더스트리 때도 팀장님께 아무것도 못해드렸잖아요?”
“나 SJ인더스트리에서 받는 연봉이 백만 달러다.”
“……아무튼! 그 정도는 팀장님이 저한테 해주신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고마운 거 맞습니다. 그래서 해드리고 싶습니다. 49%가 아니어도 좋으니 꼭 팀장님께 해드리고 싶어요.”
정지원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생각을 가다듬은 후에 말했다.
“그럼…… 1%는 어때?”
“겨우 1%요? 그건 너무 적은…….”
“아니, 1%도 충분히 엄청나다고 생각해. 코카 스패니얼뿐만 아니라 앞으로 네가 설계할 제품들을 모두 찍어내는 회사잖아? 난 최소 맥플을 뛰어넘을 거라고 본다. 회사 가치를 600억 달러로만 잡아도 1%면 무려 6억 달러가 넘어.”
“그래도 너무.”
“더 이상은 내가 부담스러워. 말했다시피 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네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아. 나를 위해서 1%만 주는 거라고 생각해라.”
신뢰를 위해 1%만 갖겠다. 그 말에 한서진은 더욱 믿음이 갔고, 더욱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고작 1%라니…….’
적어도 너무 적다. 그 정도로 이 고마운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서진은 고민 끝에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바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1%로 하죠.”
정지원은 비로소 마음 편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고맙다.”
짧은 한국 일정을 마친 뒤 정지원은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코카 스패니얼의 특허 대리 등록 절차는 슈나우저 때처럼 그가 도맡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동시에 새로운 회사의 설립 절차도 그가 하기로 했다.
거액을 벌 수 있는 특허를 맡겼지만 한서진은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정지원이 그것을 훔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뿐더러, 통찰안의 힘에 비하면 코카 스패니얼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지원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다음 날, 백세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후배님, 혹시 오늘 바쁜가?」
“네? 아닙니다.”
「그럼 혹시 회사로 올 수 있나? 전에 말한 대로 자리 한 번 만들지.」
“오늘 말씀이십니까?”
「오늘일세, 후배님.」
한서진은 잠시 스케줄을 확인했다. 특별한 볼일은 없다.
하지만 H반도체를 나오면서 거리를 두기로 했는데, 이런 식으로 자꾸 얽히는 게 도움이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세완이 다시 채근했다.
「설마 동문 선배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은 아니지?」
“아닙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부담가지지 말고, 가볍게 술이나 한 잔 하세. 후배님.」
“알겠습니다, 실장님.”
역시 그를 선배라 부르는 것은 아직 어색하다. 다행히 그는 왜 실장이라 부르냐고 타박하진 않았다.
어쩌면 저번에는 말만 그리 했을 뿐, 선배보다는 실장이란 호칭이 더 마음에 드는 건지도 모른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서진은 곧바로 사무소를 나서서 포르쉐를 출발시켰다.
한강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백 회장님도 요새 연락이 없으시군.’
혹시 자신에게 가졌던 관심이 식은 것일까. 한서진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H그룹과 지속적으로 얽히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H그룹 내에는 정지원을 산업스파이 혐의로 고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회장을 반대하는 주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파벌이라고 했다.
이상하면서도 신기했다. 그 카리스마 넘치는 백철중 회장의 그룹임에도, 내부에서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니. 이것이 회사라는 것인가.
백세완은 H반도체 생산 공장이 아닌 잠실의 사옥에 있었다. 그는 공장과 사옥에 모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잠실 사옥은 그러고 보니 처음이네.’
높이 뻗은 고층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1층 로비에 들어서자 프론트 여직원이 정중히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필요하신 용무가 있습니까?”
“백세완 실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혹시 그럼 한국대…….”
“네, 후배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여직원 한 명이 급히 나와서 직접 그를 안내했다. 사전에 미리 언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변을 스치던 직원들이 누구지, 하는 듯한 얼굴로 몰래 흘끔거렸다.
스쳐 지나가는 그런 시선들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한서진은 이런 게 출세의 느낌인가, 하고 속으로 피식했다.
여직원은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그를 안내했다. 일반 사원이나 방문객은 이용할 수 없어서인지, 엘리베이터 근처는 사람 한 명 없이 한산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몇 층이죠?”
“22층입니다만, 제가 모시겠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한서진이 극구 사양하자 여직원은 황송한 얼굴로 인사하고는 돌아갔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는 순간, 한서진은 발을 내딛다 말고 살짝 놀랐다.
‘송하나 학생?’
팔짱을 끼고 사색하듯 눈을 깔고 있던 송하나는 흘끔 얼굴을 들다가 눈빛이 변했다. 그녀도 알아본 것이다.
“안 타시나요?”
그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스르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밀폐된 공간에 단 둘이 있으니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부적합이 뜨지 않은 여자, 송하나.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혈맥을 뛰게 만든다.
“회장님을 뵈러 오셨나요?”
등 뒤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여고생과는 거리가 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다.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미성년자라 보기에 어려울 만큼 성숙했었지.
“아, 아닙니다. 다른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전 또 회장님을 뵈러 온 줄 알았네요.”
머리카락이 옷이 스치듯 스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등 뒤에서 빤히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긴장된다.
“그러고 보니 반도체 전문가라면서요?”
“부르셨습니까, 폐하.”
왕의 행차는 없던 일로 무산되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노신하는 수척한 왕의 표정을 보고는 황망해서 몸을 숙였다. 왕은 창백한 시선으로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경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소.”
“…….”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 경을 처음 만난 날, 경이 짐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던 날, 경으로부터 받은 무수한 가르침…… 경과 함께 보낸 그 많은 시간들이 이렇게 선명하건만, 유독 경의 이름만큼은 생각이 나지 않소.”
“저주 때문입니다.”
일말도 망설이지 않고, 노신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주가 지닌 망각의 힘이 폐하의 혼백을 조금씩 침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저주 때문이라는 거로군.”
“그러하옵니다, 폐하.”
노신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부디 이겨내소서.”
왕은 불현듯 떠올렸다.
수많은 문명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대한민국. 그리고 그곳을 살아가며, 많은 인연과 부딪치는 한서진.
그것은 정말로 거짓된 허무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이 또한, 저주의 힘이 나를 잠식한 탓에 흔들리는 것인가?’
노신하가 늘 말한,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말. 그곳의 모든 것은 거짓이고, 이곳 레노지안만이 올바른 진실이라는 것.
그것을 의심한 적은 없다.
그러나 믿음의 중심을 잡아준 그의 존재가 정작 흔들린다면, 이것은 어찌 이겨내야 하는가.
“경의 이름을 말해주시오.”
노신하는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슬퍼 보이는 그 얼굴은, 올 것이 왔다는 각오가 서린 것처럼 보였다.
“……이옵니다.”
“다시 말해주시오.”
“……이옵니다.”
만약 사람의 인생이 화폭이라면, 그 부분에만 먹물을 부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인식할 수가 없다.
왕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너는 들었느냐?”
“예, 들었사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보거라.”
“……라고 하셨습니다.”
지독한 잡음이 낀 듯 들리지 않는다. 아니, 인지되지 않는다. 마치 노신하의 이름을 담은 소리가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빠져나가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왕은 수척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잠시 후 왕이 손을 내렸을 때, 그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왕실 보고에 있는 모든 미스릴과 오리할콘을 전부 남김없이 소모해도 좋소.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꿈에 개입할 수 있게 해주시오. 꿈의 짐, 나 자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소.”
노신하가 놀란 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폐하, 그것은…….”
“이것은 어명이오.”
어명. 그 상징에 담긴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노신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절을 했다.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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쌰장님들 저 열씸이 1햇써요!
칭챤해주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