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82화 (82/609)

00082  에테르 언어  =========================================================================

“오랜만입니다.”

한서진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예절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현진국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같이 목례를 했다.

“이러실 것 없어요.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교수님이신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한국대 교수인 건 맞지만, 그게 젊은이가 과한 예를 차릴 이유는 못 됩니다. 그러지 말아요.”

“예의를 차릴 이유가 됩니다. 왜냐면 저도 이 학교 학생이니까요.”

순간 현진국 교수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말뜻을 깨달은 그는 놀란 눈빛으로 주시했다.

“우리 학교 학생이라고요?”

“예, 반도체공학부에 재학 중입니다. 올해 입학해서 아직 1학년입니다.”

“반도체공학부?”

순간 현진국은 아까 조교가 전한 말이 생각났다.

스코브리아늄과 닮은 패턴의 언어 때문이라고 하면 누군지 알 거라던 말. 그때는 다시 만났다는 흥분에 취해,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현진국은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에 생각이 미쳤다.

“젊은 친구……. 아니, 학생. 혹시 뭔가 알아낸 게 있나요?”

그 미지의 언어가 스코브리아늄과 관계가 있다는 걸 눈앞의 청년도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반도체공학부라고 한다. 그렇다면 설마?

현진국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한서진은 차분한 얼굴로 끄덕였다.

“저는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한서진은 설명을 시작했다.

현진국은 놀랍다는 얼굴로 침묵하며, 가만히 한서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서진은 자신이 반도체공학을 배우고 있다는 점만 밝혔을 뿐, SJ인더스트리나 H반도체에 근무했었다는 이야기 등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우연히 랩에서 교수님을 슬쩍 뵈었습니다. 그간 긴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찾아뵙는 게 옳은 것 같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놀랍군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아니, 이건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건가요? 학생이 우리 학교에 입학한 것은 온전한 자기 힘이었으니까.”

“저도 그때는 이 불명의 언어가 스코브리아늄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상상 자체를 못했습니다. 그저 반도체공학이 유망하다고 생각돼서 선택했을 뿐이었거든요.”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현진국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서진 학생, 나는 이 미지의 언어에 있을 유의미한 패턴을 알아내기 위해 하버드의 수퍼컴퓨터를 이용했습니다. 요즘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더군요. 원래라면 반년은 걸릴 작업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개발된 수퍼컴퓨터 덕분에 몇 달을 더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

Z7을 말하는 것이리라. 한서진은 괜히 민망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놀랍게도 이 언어를 몇 차례로 변환한 패턴 중 일부는 스코브리아늄을 확대한 모습과 매우 닮았습니다. 이건 학생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건 바보스러운 망상이지만, 나는 어쩌면 외계인이 사용하던 언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왜 하필 스코브리아늄을 확대한 모습이 이 언어에 담겨 있는 것일까요?”

“이 또한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현진국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서진은 조바심을 안고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먼저 이건 나 혼자만이 아닌, 박효산 교수와 토의하여 정리한 생각임을 먼저 밝힐게요. 적어도 이 언어는 외계인, 혹은 그에 준하는 놀라운 고등 지식을 가진 이들이 사용하던 거라고 확신합니다. 최소한 지금 인류가 이룩한 문명은 뛰어넘었다고 봅니다.”

“…….”

“이와 같은 가정 하에 추측하자면, 이 언어는 스코브리아늄에 어떤 작용을 하는 일종의 ‘명령어’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근거 없는 추론일 뿐입니다.”

가벼운 소름에, 한서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의 생각에 거의 근접한 추론에 몸을 살짝 떨었다.

다만 현진국의 추론에는 결여된 게 있었다.

‘에테르.’

규명되지 않은 미지의 힘, 에테르.

그 존재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현진국은 현재로서는 저 정도 추론이 한계이리라.

한서진은 가만히 생각했다.

‘만약 니트론 교수님까지 여기에 가세하면 어떻게 될까?’

박효산, 현진국, 그리고 니트론 교수.

이 셋을 한데 모아놓으면, 과연 그 시너지 효과는 어느 정도나 될까? 감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언어와 에테르, 그리고 미스릴의 관계를 규명할 수만 있다면…….’

통찰안, 그리고 나아가서 그 꿈의 비밀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한서진은 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스코브리아늄과 그 미지의 언어의 관계…… 그 연구에 저도 동참하려고 합니다.”

두 교수의 합작 연구에 한서진이 참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박효산 교수는 이미 미지의 언어와 스코브리아늄이 가진 비밀에 강한 흥미를 갖고 있었으니까.

현진국도 처음에 미지의 언어를 가져온 한서진이 참가하는 것을 기꺼이 반겼다. 심지어 그는 한국대 학생이지 않은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대신 박효산 교수님께는 제가 이 언어를 처음 가져왔다는 것을 비밀로 해주십시오.”

“이유를 알아도 될까요?”

“큰 이유는 아닙니다만, 출처에 관해서 괜히 이것저것 물어보실까봐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한서진은 현진국에게도 끝끝내 그 언어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적당히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섣부른 조작은 오히려 해가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처음 나한테 말한, 불탄 고문서에서 베껴 적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군요.”

“…….”

한서진은 침묵으로 인정했고, 현진국은 그와의 관계를 비밀로 해주기로 했다.

그런 전후사정을 모르는 박효산은 한서진이 연구에 참여 의사를 밝히자 좋아하며 현진국에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물론 SJ인더스트리와 슈나우저에 관해서는, 현진국에게 밝히지 않았다.

“언제까지 미지의 언어라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니……. 임시로 이것을 USL(Unidentified Scobrianuim Language)이라고 부릅시다.”

“좋습니다.”

USL과 스코브리아늄이 간직한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의 밑준비가 그렇게 완성되었다.

‘이 두 교수님들이라면 분명히…… 그리고 니트론 교수님까지 있으면 훨씬 더 좋을 텐데.’

자신을 왕이라고 부르던 정체불명의 노인, 그리고 통찰안.

그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첫 단추가 무사히 꿰어졌다.

“아주 훌륭해.”

SJ인더스트리에 보낸 설계도의 시제품이 생산되었고, 테스트 결과까지 나왔다. 정지원은 한서진을 보자마자 흡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슈나우저에 비하면 모자라.”

“항상 성공할 순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 성능인데요?”

“일단 기존 메모리에 비하면 동일 면적 대비 100배 가까운 용량을 저장할 수 있어. 전원을 공급하지 않아도 데이터가 보존되고, 읽고 쓰는 속도도 매우 빨라. 쓰고 지우기 제한 횟수는 더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30만 번 이상 덮어쓰기에서 내구도 문제는 확인되지 않았어.”

“좋네요.”

한서진은 덤덤히 끄덕였다. 그 정도는 이미 확인한 바였다.

“이 정도면 내부를 프로그램 처리로 블록화해서 연산 메모리와 스토리지로 구분해서 사용하면 될 것 같아. 슈나우저와 결합하면 정말 명함 카드보다 작은 워크스테이션 컴퓨터가 탄생할 것 같은데.”

“문제는 메인보드네요.”

“그렇지. 정말 그것도 개발해보는 건 어때?”

“……전 만능이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한 번 도전은 해봐.”

“알았어요.”

한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아쉽긴 하네요.”

성능만 들으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제품이다. 기존의 어떤 메모리 반도체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성능이다.

100배 이상 증가한 용량과 속도, 내구성을 가진 비휘발성 메모리 반도체가 아닌가. 여러 메모리의 장점만을 모아서 극대화시킨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나우저의 클래스에 비하면 뭔가 부족하다. 이전의 반도체를 평민, 슈나우저를 황제라 한다면, 이 녀석은 귀족 정도라 칭할 수 있을까.

“그럼 이 녀석도 곧바로 SJ인더스트리에서 생산할까요?”

“글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네?”

정지원이 회의적인 표정을 짓자 한서진은 의아해서 쳐다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SJ인더스트리의 사주나 마찬가지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100%는 아니지. 크렘 회장이 10%, 토니 제나인이 5%를 갖고 있으니.”

“그땐 어쩔 수 없었잖습니까.”

“하루 빨리 슈나우저를 세상에 내놔야 했으니까, 여유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잖아?”

그때에는 공정설비가 제대로 갖춰진 공장이 있는 회사를 인수해서 하루빨리 슈나우저를 생산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토니 제나인과 크렘 회장에게 지불한 5%의 지분은 일종의 급행료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면요?”

“크렘 회장의 투자금 회수는 두 달도 안 남았어. 다다음 달부터는 네 계좌에도 돈이 쌓인단 말이야. 새로운 회사를 차리기에는 충분하지.”

“크렘 회장이 그리 썩 좋아하진 않겠네요.”

“글쎄, 지금 SJ인더스트리의 기업 가치가 얼마인지 알아? 3억 달러에 사들인 회사가 지금 100억 달러가 넘어. 그 짧은 사이에 30배가 넘게 폭등한 거지. 사실 크렘 회장은 10%의 지분만으로 가만히 앉아서 10억 달러를 벌어들인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갑자기 배가 아픈데요.”

“크렘 회장, 아쉽긴 해도 뭐라고 따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야. 슈나우저는 SJ인더스트리에서 계속 생산할 거니까.”

“하지만 코카 스패니얼은 새로 만드는 회사에서 생산하자는 거군요.”

“코카 스패니얼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네가 설계하는 모든 반도체 제품은 전부 새 회사에서 생산하는 거야. 지분이 100% 네 소유인 회사에서.”

모든 반도체를 오롯한 내 회사에서 생산한다.

간단한 말이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가만히 정지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믿으라는 듯이 끄덕여 보인다.

‘정 팀장님…….’

정말 정지원을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글, 슈나우저로 인한 영광은 모두 H반도체가 누리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은 겨우 몇 십억 정도만 받아 챙긴 채, 이것도 큰돈이라며 희희낙락했을 것이다.

정지원은 그것을 막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황금색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불현듯 백철중 회장의 말이 생각났다.

‘사업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믿어선 안 되네. 그러나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려면 사람을 믿어야 하네.’

‘언젠가 이 말이 가슴으로 이해될 날이 올 거야. 그때는 이미 크게 성공한 뒤겠지.’

아직 그 말이 가슴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사람을 믿어야 할 때라는 것.

“새 회사 말인데요. 지분 관계를 조정하고 싶습니다.”

“무슨 뜻이야?”

“제가 51%, 팀장님이 49%,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뭐라고?”

정지원은 크게 놀랐다.

============================ 작품 후기 ============================

"똑바로 설계해라, 사장."

"죄, 죄송합니다."

"어째서 메인보드는 설계하지 않았나?"

"코카 스패니얼을 설계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퍽!)

"변명은 하지 마라, 사장."

채찍을 든 정지원의 눈은 그렇게나 매서웠답니다.

"일해라, 사장."

한서진은 혼란스러웠답니다.

내가 사장인가, 아니면 그가 사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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