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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80화 (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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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반도체 설계가 완성됐다는 말에 정지원은 바로 미국에서 날아왔다. 덕분에 한서진도 하루 시간을 비우고 그를 맞이하러 공항에 나갔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를 통과한 정지원은 마중 나온 한서진을 보고 반가워했다.

“공항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정리가 있잖아요.”

“오너가 너무 극진히 대해주니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둘은 포르쉐에 올랐다.

“바로 사무소로 갈까요?”

“그러자. 나도 사무소 한 번 구경하고 싶어.”

“하정태 선배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 원망이나 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느덧 포르쉐는 사무소에 도착했다. 정지원은 사무소가 있는 빌딩과 그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건물이 꽤 깔끔하네. 게다가 학교도 가깝고.”

“일부러 신축 빌딩으로 골랐습니다. 월세가 좀 세긴 해도 개운한 기분으로 출근하고 싶어서요.”

“네가 월세가 걱정될 레벨은 아니잖아. 명색이 SJ인더스트리 사주인데.”

“그래봤자 크렘 회장 투자금 회수 전까지는 손가락 빨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거는 이번 분기 정산 마치면 다 끝나 있을 걸?”

엘리베이터를 누르며 정지원이 한 말에 한서진은 조금 놀라워했다.

“그렇게나 빨리요?”

“슈나우저 인기가 워낙 좋잖아. 조만간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다 먹을 수 있을 거다. 이미 슈나우저 천하야.”

정지원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크렘 회장 투자금 문제만 끝나면, 이제 특허 로열티도 정상적으로 지급될 테고. 넌 이제 돈방석에 앉는 일만 남았어.”

“그럼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죠?”

“너는 SJ인더스트리의 대주주이기 전에 슈나우저의 특허권자잖아. 먼저 총수익의 50%가 특허 로열티로 지불되고, 나머지 50%는 회사 이익으로 귀속되는 거지. 거기서 다시 네 지분대로 배당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사내 유보금으로 쌓아둘 수도 있고.”

얼마나 큰돈을 거머쥐게 될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두 달도 안 지나서, 하루하루 달라지는 통장 잔고를 보게 될 거야.”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목돈이 생기면 뭐부터 할 건데?”

“글쎄요…… 좀 더 큰 사무실을 얻어서 이사를 갈까요? 근데 어차피 한국에서는 설계만 하니까, 그리 큰 공간은 필요 없긴 한데.”

“겨우 사무실?”

정지원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피식 웃었다.

“그 돈이면 큰 사옥을 짓고도 남을 거야. 억만장자가 겨우 한두 달 뒤로 예정돼 있는 거라고.”

“사실 잘 실감은 안 나요. 지금도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나도 슈나우저를 처음 봤을 때 그랬지.”

한서진은 문득 정지원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아마 비글처럼 슈나우저도 H반도체에 고스란히 갖다 바쳤겠지? 겨우 몇 백억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만족하면서 말이다.

새삼 그를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

“응?”

“고맙습니다.”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작지 않았다. 정지원은 함축된 의미를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정태는 정지원을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그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H반도체에서 자신만 쏙 빠져나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지원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결국 너도 지금 잘 됐잖아.”

“귀띔이라도 해주실 수 있었잖아요?”

“그때는 서진이를 회사에서 빼내는 게 더 시급했거든. 자칫 슈나우저까지 비글 꼴 나면 어쩔 뻔했어?”

“으,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요.”

가볍게 회포를 풀고, 정지원은 곧바로 설계도를 확인했다. 이미 비행기 안에서 이메일로 확인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것처럼 꼼꼼하게 검토했다.

“시뮬레이션은 아무 문제없고…… 아마 내일 안으로 시제품이 나올 거야. 성능이 기대되는데.”

“슈나우저만큼은 아닐 겁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통찰안으로 이미 대략적인 성능을 확인한 한서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지원과 하정태는 서로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슈나우저급의 반의 반만 되어도 엄청난 거지. 슈나우저는 정말 엄청난 괴물이니까.”

“플래시 메모리라……. 슈나우저와 결합하면 정말 명함 카드만 한 워크스테이션이 나오겠는데?”

“문제는 아직 적합한 메인보드가 없어요. 명함만 한 크기는 아직까지 무리입니다.”

하정태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정지원은 끄덕이면서 한서진을 돌아봤다.

“이참에 보드도 설계해보는 건…….”

“저도 사람입니다. 못해요.”

정지원이 방한을 한 김에 셋은 모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한서진이야 매일 들리는 학교지만, 정지원에게는 감개가 무량할 것이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해서 돌아온 것이니.

한서진의 포르쉐는 2인승이라 하정태의 차를 이용했다. 한서진은 하정태에 떠밀려 우측 뒷좌석에 앉았다. 소위 말하는 회장님 자리다.

“선배님들을 두고 제가 여기 앉아도 될지…….”

“사적으로는 대학 선배지만, 사회 나가면 네가 우리 고용주다. 당연히 거기 앉아야지.”

“그래도 조금 불편합니다. 후배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한서진은 영 거북했다. 혹시라도 아는 애들을 마주치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운전을 하면서 하정태가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 미국 시민권 얻으셨다면서요?”

“어.”

“그럼 한국 국적은 상실되는 거 아닙니까?”

“상실 신고도 이미 마쳤어. 난 국적상으로는 이제 한국인이 아니야.”

“조금 아깝긴 하네요.”

“상관없어. 어차피 미국에서 사업하려면 아무래도 미국 시민인 게 더 유리해. 슈나우저 덕분에 시민권도 순식간에 나왔지.”

“그러고 보니 서진이 너는 팀장님 따라서 미국 왜 안 갔어?”

하정태의 물음에 한서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영어 못해요. 어차피 할 줄 아는 것도 설계뿐인데, 그건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잖아요.”

“뭐, 일하는데 지장 없고 돈 많으면 한국이 살기 편하지.”

차는 어느덧 한국대에 도착했다. 하정태는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선배님, 어디부터 가실 겁니까? 연구실? 아니면 단대?”

“연구실부터 가자. 오랜만에 교수님 봬야지.”

하정태는 연구실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던 중 하정태가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교수 중에 벤틀리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구나. 잘 나가나 보네.”

“벤틀리?”

무심코 돌아보던 정지원의 표정이 살짝 굳자 한서진이 의아해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음…… 우리가 아는 사람이 온 것 같다. 아마 교수님 찾아온 것 같은데.”

“아는 사람?”

한서진은 순간적으로 현진국 교수를 떠올렸으나, 정지원이 그를 알 리가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럼 누구지?

‘재수 없게 오늘 마주치진 않겠지.’

최근 들어 현진국 교수가 연구실을 찾아오는 횟수는 줄었다. 그래서 한서진은 안심하고 연구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조만간 정리를 해야겠어. 빨리 결정을 짓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서진은 둘과 함께 박효산 교수 연구실에 들어섰다.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낯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백세완 실장님?”

의외에 만남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정지원을 돌아봤다. 그는 크게 놀라지 않은 듯 그저 쓴웃음만 보고 있었다.

‘벤틀리가 그럼 백 실장님 차였어?’

아마 정지원은 알고 있었나 보다. 그는 쓴웃음을 지우고 백세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간만이다. 여기 온 줄은 몰랐네.”

“간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봤으니.”

백세완은 다소 차갑게 응시하다가 그의 악수에 응했다. 그리고 한서진과 하정태를 돌아보았다.

“연락하고 있었구나. 몰랐네.”

“같은 한국대 동문이잖아. 너 역시 그렇고.”

“그랬지, 참.”

마냥 살가운 분위기는 아니다.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나서서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 실장님.”

“여긴 모교고, 우리는 동문이잖나. 전에 말한 대로 선배님이라고 부르게.”

“아, 네. 선배님.”

“그래, 설계 사무소는 잘 돼가나?”

“이제 겨우 자리만 잡았을 뿐입니다.”

“교수님께는 나도 잘 말씀드릴 테니 잘 해보고. 물론 교수님도 자네를 매우 좋게 보시니 문제는 없을 거야.”

“예, 감사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지원이 물었다.

“H반도체가 교수님과 산학협동 프로젝트 하기로 했다면서?”

“그렇게 됐다.”

“스코브리아늄 연구를 선점하기 위해서구나. 지금 교수님 뵙고 나오는 길이지?”

“이만 간다.”

백세완은 말을 길게 나눌 생각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는 한서진에게 눈을 들리고, 정겹게 어깨를 두드렸다.

“조만간 자리 한 번 만들지, 후배님.”

“아, 예.”

그리고 백세완은 그대로 연구실을 나가버렸다. 정지원은 뒷모습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 성격은 여전하구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백 실장이 선배님 보는 표정이 영 안 좋던데요.”

하정태가 조심스럽게 묻자 정지원은 고개를 가만히 가로 저었다.

“별 거 아니야. 시간 지나면 풀어지겠지. 자, 교수님이나 빨리 뵙자.”

셋은 교수의 개인 연구실로 들어섰다. 한서진을 보고 반가워하던 박효산은 정지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곧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이놈! 도망자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죄송합니다, 교수님.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네가 그때 도망친 바람에 남은 애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하냐! 몇 년 동안 소식 한 번 없다가 이제야 찾아오는 게 염치가 있는 거냐!”

“저, 학교 행사는 그래도 자주 찾아왔었습니다. 매번 교수님이 저 꼴 보기 싫다고 피하신 거지요.”

“듣기 싫다, 이놈아!”

말은 불같이 하면서도 정작 정지원을 내쫓지는 않았다. 한서진은 그걸 보면서 내심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제3자는 알지 못하는, 둘만의 끈끈한 사제지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타박하던 박효산 교수는 그제야 미국 생활에 관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들었다. SJ인더스트리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예, 운 좋게 기회를 잡았습니다.”

“H반도체에서 고생만 하더니 이제야 날개를 달았구나. 그나저나 슈나우저는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스티브 진과 인연이 닿아서요. 그래서 SJ인더스트리 창립 멤버가 될 수 있었죠.”

스티브 진.

슈나우저의 특허권자로 등록된 이름이며, 한서진의 영어 이름이기도 했다. 덕분에 박효산은 물론이고 H반도체도 슈나우저가 미국인의 특허인 줄 알고 있었다.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그게 아님을 알게 될 테지만, 슈나우저 특허는 현재 SJ인더스트리가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뒷조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스티브 진이라는 사람, 언제고 한 번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구나. 혹시 자리를 만들어줄 순 있겠냐?”

“한 번 진에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진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겁니다.”

“그 인간, 정말 천재임에 틀림없어. 꼭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야.”

“…….”

하정태의 말없는 시선이 느껴지자 한서진은 민망해서 고개를 숙였다.

원래 필사적으로 숨기려던 게 아니었고, 그저 대놓고 자랑하기 뭐해서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졸지에 무슨 큰 기밀인 것처럼 돼버렸다.

‘이거 더 이상 끌면 안 되겠다. 나중에 감당이 안 돼.’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교수님. 사실은 슈나우저 개발자도 교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응? 서진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실은…….”

자기 입으로 말하기 민망했던 한서진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하정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냉큼 대답했다.

“걔가 얘거든요.”

“응? 그게 무슨 소린데?”

“스티브 진도 SJ고, 서진이도 SJ잖아요? 그리고 SJ인더스트리도 SJ고요. 교수님, 뭐 느껴지는 게 없으세요?”

“뭐? 설마…….”

하정태는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스티브 진이 서진이라는 소립니다, 교수님.”

============================ 작품 후기 ============================

냉방병인지 머리가 아파서 어제는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ㅜㅜ

아직도 두통이 좀 남아 있네요. 그래도 한 편 더 올릴 수 있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ㅜㅜ

언제나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들 덕분에 빚 갚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어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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