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에테르 언어 =========================================================================
한서진은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당분간 박효산 교수 연구실을 찾지 않기로 했다. 급작스럽게 현진국 교수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아직 그는 준비가 안 됐다.
‘통찰안…… 미스릴…… 에테르…….’
통찰안은 우연히 얻게 된 자신만의 고유 능력이다. 그를 통해 세상이 알지 못한 여러 진실을 볼 수 있었다.
엘릭서를 만드는 법. 미지의 힘, 에테르. 그리고 에테르 반응 물질인 미스릴.
‘엘릭서, 에테르, 미스릴.’
한서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생각했다.
그 셋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고유명사, 즉 이름이 있다는 거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셋에 각각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과연 누가 지은 것일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존재? 마치 신 같은?
아니면…….
‘통찰안이?’
그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거울 속의 자신, 정확히는 두 눈동자를 주시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의 힘이 깃든 눈.
한서진은 불현듯 생각했다. 만약 통찰안의 힘으로 자신의 눈동자, 즉 통찰안 그 자체를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과연 통찰안이 가진 진실이 보일까?
‘…….’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마음을 굳게 닫아걸었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감각이 지워져나갔다.
오로지 시각만이 극대화된 채로, 그는 거울 속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빛이다. 그는 온힘을 다해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을 주시했다.
바로 그 순간, 진실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했다.
그것은 상상을 넘어선 거대함이었다. 그는 더욱 정신을 집중하며, 그 안에 감춰진 거대한 힘을 주시했다.
그것은 심연이었다.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넘어선, 깊디깊은 못.
심연을 주시한 순간, 심연의 꿈틀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심연도 ‘이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허억!”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손가락이 바르르 경련했다. 온몸에 힘이 풀려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허억, 허억, 허억…….”
그는 거듭 숨 가쁜 호흡을 토해냈다.
심장의 박동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손을 들어 올려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건 뭐였지?’
자신의 눈동자, 통찰안에 깃들어 있던 거대한 심연.
자신이 심연을 깨닫는 순간, 그것도 그를 알아차리고 ‘이쪽’을 주시했다. 시선이 잠깐 마주친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한 번 더.’
한서진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눈을 질끈 감고, 거울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눈을 뜬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 안에 깃든 심연을 찾았다.
‘어?’
그러나 이상했다. 아까만 해도 느껴졌던 심연의 기운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어딘가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착각한 것일까.
그때였다.
‘아!’
거울 속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광활한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지워진 채, 오로지 각막에 감춰져 있던 캠퍼스만이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거짓말처럼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처음 한서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자각몽?’
그러나 꿈치고는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도저히 꿈을 꾸는 중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는 어느 드넓은 정원에 있었다. 정원사의 손으로 잘 가꿔진, 본 적도 없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끝없이 즐비했다.
저만치 멀리 거대한 성이 보였다.
그가 알던 중세 시대의 성과는 달랐다.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웅장했다.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바벨탑처럼 높이 솟은 성은, 전체가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꿈같지 않은 생생함. 그러나 그는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저렇듯 웅장한 아름다움이 현실에 실존할 수가 없을 테니까.
넋을 잃을 듯이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서진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인자한 눈빛을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노인의 키만 한 지팡이 끝에는 아름다운 빛을 뿜는 보석이 달려 있었다.
‘미스릴……?’
그는 대번에 그 보석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또한, 노인의 얼굴이 어딘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기억이 없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짙은 익숙함을 느꼈다.
“폐하.”
노인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곳의 모든 것은 폐하를 현혹시키는 꿈이자, 거짓입니다. 그것을 결코 잊지 마소서.”
혼란이 들리지 않게 속삭인다.
저것은 한서진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나’에게 하는 말인가.
“시뮬레이션 결과 봤어?”
“네?”
“메일 보냈는데, 아직 안 읽었더라?”
사무소에 출근하자마자 하정태가 물었다. 한서진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학교 수업이 너무 바빠서 미처 못 봤어요. 지금 바로 볼게요.”
“테스트상으로는 별 문제 없었어. 이대로 바로 시험 제작해도 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그럼 확인하고 바로 미국에 보내야겠어요.”
박수진이 듣고 있는 자리이기에 SJ인더스트리라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박수진은 한서진이 슈나우저의 개발자라는 것도, SJ인더스트리의 지분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녀는 아직까지 그를 그저 장래가 매우 유망한 벤처 사장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얼굴색이 안 좋은데.”
“아니, 아닙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수업 매번 빠지다가 꼼짝없이 다 들으려니 힘드네요.”
“수업을 매번 빠지다니? 저번 학기에 H반도체에 거의 출근 안 했었잖아?”
“과제로 수업과 시험 전부 대신하고 다른 거 했죠. 랩이랑 미팅만 다녔던 걸로 기억나요.”
“좋은 시절을 보냈구나.”
“아직 멀었습니다. 좀 더 놀 겁니다.”
하정태는 피식거리며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업무가 없을 때 그는 주로 해외 논문을 읽거나 기술영어 공부를 집중적으로 했다. 미국에 갈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참, 선배님.”
“응? 왜?”
“혹시 코딩 좀 할 줄 아시나요?”
“기초는 하지. 취미로 좀 배웠거든. 근데 왜?”
하정태도 정지원과 마찬가지로 한국대 동문이다. 한서진이 그와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그가 말하는 기초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초와 전혀 다른 의미다.
“기초라는 거 보니까 어느 정도 수준급이시겠군요.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그쪽 분야도 틈틈이 자료 수집하고, 또 연습해두시겠어요?”
“업무에 관한 지시야?”
“네. 반도체만 설계하기보다는 개발한 제품에 어울리는 칩셋 프로그램도 같이 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너, 코딩도 할 줄 알았어?”
“아뇨, 전혀 모르는데요. 저도 이제부터 해야죠.”
“알았다.”
하정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넘어갔다. 오히려 박수진이 살짝 질린 듯이 질문했다.
“사장님이 지금부터 코딩 공부하신다고요? 너무 늦지 않을까요?”
“아, 수진 씨. 우리 사장님은 천재라서 그런 거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몇 달이면 다 끝납니다.”
하정태가 농담처럼 말했다. 농담 같은 어투지만 사실은 진심을 말한 것이기도 했다.
한서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진지하게 코딩 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어떻게 잘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준비하겠다는 겁니다.”
“잘 돌아가는지 알 수준은 되어야 한다? 이야, 그게 더 대단한 건 알고 있는 거지?”
“……이 이야기는 그만할게요. 아무튼 전 오늘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두 분도 일찍 퇴근하세요.”
“알았다.”
“예, 사장님.”
한서진은 사무소를 나섰다. 시간을 보니 12시. 오후 수업에는 늦지 않을 것 같다.
공대답게 수업 일정은 빡빡한 편이었다. 한서진도 무리해서 모든 수업을 출석하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회사 업무지, 학교 일정이 아니니까.
졸업장만 무사히 따면 그만이다. 좋은 학점은 부가적인 요소지,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포르쉐에 오른 한서진은 시동을 걸었다. 문득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눈이 닿았다.
‘…….’
불현듯 어제의 경험이 생각났다. 갑자기 으슬으슬 추워졌다.
‘정말 이상한 꿈이었어.’
아직도 그때를 상상하면 가벼운 소름이 돋는다. 동시에 의문이 생긴다. 그게 정말 꿈이었을까, 하고.
어처구니없는 의구심인 건 알고 있다. 그게 꿈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성은 안다. 대낮에 그저 잠깐 이상한 꿈을 꾸었을 뿐이라고. 단지 너무 생생해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크윽!”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 왔다. 한서진은 한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고통을 참았다. 악물린 입 사이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노인은 대체…….’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떨쳐지지 않는 걸까. 왜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그 노인의 얼굴, 목소리,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까.
자신을 바라보던, 애절하면서도 단단한 그 눈빛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그곳의 모든 것은 폐하를 현혹시키는 꿈이자, 거짓입니다. 그것을 결코 잊지 마소서.
‘그곳’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서진은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사는 이곳이 거짓이라고?’
잠깐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들었고, 한서진은 곧바로 떨쳐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지난 24년의 세월이 이렇듯 생생한데, 이 모든 게 거짓이라니.
‘하지만 생생한 것은 그 꿈 역시 마찬가지였어.’
그걸 상기하자 가볍게 소름이 돋는다.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현실 이상으로 생생할지언정, 그것은 꿈이다. 자신은 구별이 힘든 지독한 환각을 봤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옳은 결론은 오로지 이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중얼거렸다.
“꿈 한 번 희한하네.”
「랩에는 안 올 거야?」
“죄송해요. 수업이 너무 빡빡해서요.”
「대체 언제부터 수업을 그렇게 열심히 챙겨들었다고. 벤처도 차렸겠다 수업은 설렁설렁 해도 되잖아? 먹고 살려고 학교 다니는 거지, 배우려고 학교 다니는 건 아니잖아?」
“과학자를 꿈꾸시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튼 죄송해요, 안 선배.”
애절한 안홍철의 전화를 매정하게 거절하려니 가슴이 아팠지만,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연구실은 피할 생각이었다.
박효산 교수가 귀국한 후, 현진국 교수는 하루다 멀다 하고 연구실을 찾아왔다. 그가 보여준, 에테르 언어를 수퍼컴퓨터로 기호화한 패턴을 보고 박효산은 난리가 났다.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언어에 스코브리아늄의 극미세영역 형상이 담겨 있다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두 거장이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서로 안면이 없던 두 교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래 된 지기처럼 친해졌다.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고 해답을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미지의 언어와 스코브리아늄, 그 둘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낸다면 엄청난 일일 테니까.
덕분에 두 교수가 운영하는 연구실 소속 학생들만 매일같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서며, 한서진은 굳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일단 생각부터 정리하고 난 다음에.”
결코 오늘의 갈려짐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 아니다.
============================ 작품 후기 ============================
한때 아재로스의 사제로서 널리 아재로움을 수호하기 위해 싸우던 실탄....
저는 오랜만에 다시 그때의 향취를 위해, 아재들을 위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재왕... 아니 리치왕의 안식을 위해 뽑은 검을 집어넣고, 연참검을 빼들었습니다.
이 글이 입맛에 맞으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훌륭한 아재로스의 용사입니다.
ps : 본 후기에는 오타가 존재하지 않스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