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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78화 (78/609)

00078  에테르 언어  =========================================================================

정차한 포르쉐에서 내린 한서진은 연구소 건물에 들어섰다. 복도는 평소보다 더욱 조용했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 단체 휴일인가 하고 자신도 모르게 일정을 확인했을 정도다.

‘기분이 왜 이러지? 오늘 무슨 날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평소보다 유독 찜찜하고, 예감이 좋지 않은.

그런 찜찜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한서진은 박효산 교수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출입문을 들어서는데, 안쪽에서부터 고함소리 비슷한 게 터져 나왔다.

“스코브리아늄이라고?”

“교, 교수님. 진정하세요.”

“걱정 말게. 난 흥분하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다시 말해주게. 이게 뭐라고? 스코브리아늄? 그게 뭔지 자세히 설명 좀 해주게. 어서!”

익숙하지 않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손님이 찾아왔나?

그런데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서진은 문 밖에서 들어갈까 말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괜히 분위기도 별로인데 찾아갔다가 뻘쭘한 건 사양이다.

‘근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같기도 하고.’

한서진은 소리 안 나게 문을 살짝 밀고, 안쪽으로 고개를 조금 내밀었다.

연구생들 외에도 못 보던 노인과 중년 남자, 이렇게 두 명이 보였다. 노인은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고, 뭔가 경악할 만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굴도 왠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한서진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도, 노교수는 따질 듯이 최태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보게. 이게 정말 스코브리아늄인가 하는 물질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모습이 맞나? 내가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 혹시 어떤 고문서라든가, 그런 것과 관련 있는 건 아닌가?”

“고문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그냥 물질의 구조 모습을 확대한 것일 뿐인데요.”

“그럴 리가 없어!”

현진국 교수는 종이를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 이것은 너무 절묘하다. 소름이 끼칠 만큼.

“이건 ‘그 언어’의 운율적 규칙 패턴을 수퍼컴퓨터를 써서 이진법 기호로 추출한 뒤 선의 조합으로 치환한 그림이란 말일세. 그런데 이게 스코브리아늄이란 물질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것과 거의 흡사하다니, 자네라면 이게 믿어지겠는가?”

“언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영……. 스코브리아늄은 지금 전자공학 학계에서 매우 유명한 신원소입니다. 이 확대 그림도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거고요.”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없어. 이래서도 안 돼.”

현진국 교수는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몰래 훔쳐보던 한서진은 그 순간 정수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저 교수가 누군지 기억났던 것이다.

‘아! 그때 그!’

그는 서둘러 문을 닫고 돌아섰다. 벽에 기대자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한국대였지. 근데 대체 저 교수님이 왜 여기에 와 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통찰안이 최초로 알려준, 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처음 보는 문자로 이뤄진 미지의 언어였다.

당시 그는 번역업체를 찾아가는 등 그 언어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마지막에는 한국대의 저명한 언어학자라는 저 사람까지 찾아가지 않았던가.

‘언뜻 보면 누군가가 재미삼아 지어낸 것으로 오해할 수 있군요. 하지만 일정한 언어적 규칙성이 있습니다. 장난으로 지어낸 것치고는 너무 정교해요.’

‘내 생각엔 아주 오래 전에 소실된 언어 같습니다.’

‘뭔가 알아내면 바로 연락을 드리리다.’

저 교수와의 만남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엘릭서를 얻어 병을 치료한 이후로는 새카맣게 잊었다. 그런데 그 인연이 이렇게 다시 이어질 줄이야.

“나중에 꼭 연락 주시게. 꼭.”

한서진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인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자 그는 서둘러 등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문이 끼이익 열리고 현진국 교수와 대동한 남자, 둘이 복도로 나왔다.

“참 신기한 일이네요. 수퍼컴퓨터로 추출한 언어 패턴을 기호화한 게 스코브리아늄의 확대 모습과 닮았다니.”

“김 교수도 봐서 알잖은가? 그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밀해. 그만큼 유사하게 닮은 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나?”

“그걸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죠. 정말 신기합니다.”

“가만, 그 청년의 연락처가 어디 있었는데…… 아! 여기 있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현진국 교수는 연락처를 찾아내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순간 한서진은 번개처럼 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 하필 진동 모드로 되어 있지 않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핸드폰이 크게 울리자마자 그는 잽싸게 무음 버튼을 눌렀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현진국 교수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전화를 걸자마자 뒤에서 수신 벨소리가 울리다니, 누구라도 쳐다볼 상황이지 않은가?

“어, 지혜야. 나 지금 학교야. 무슨 일인데? 응? 뭐라고?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한서진은 등을 돌린 채로, 천연덕스럽게 동생과 통화하는 오빠 연기를 했다. 물론 무음 모드일 뿐, 전화가 오고 있는 상태였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현진국 교수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돌리며 상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신호가 가도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라도 남겨둬야겠어.”

현진국 교수는 서툰 손가락질로 꾹꾹 문자를 적어서 보냈다.

멀어지는 그를 흘끗 훔쳐보던 한서진은 문자가 온 것을 확인했다.

「오랜만입니다.

작년에 맡겼던 고문서 내용을 해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부족합니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다시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언제 한 번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어느덧 현진국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서진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마음속에서 크게 갈등이 일어났다. 그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 언어의 내용에 스코브리아늄, 아니 미스릴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고?’

한서진은 급히 복도를 걸어 연구실을 빠져 나왔다.

포르쉐에 오른 그는 노트북을 켰다. 중요 폴더에 보관된 파일 두 개의 암호를 입력했다.

하나는 통찰안이 보여준, 슈나우저를 창조한 에테르 언어.

다른 하나 역시 통찰안이 보여준, 암 치유의 방법이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미지의 언어.

‘이 언어에서 수퍼컴퓨터로 추출한 패턴이 미스릴과 동일하다고?’

그는 그 두 언어를 놓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만약 현진국 교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에테르 언어와 미지의 언어는 서로 동일하거나 혹은 큰 유사점이 있어야 하리라.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한서진은 분개를 터트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두 언어는 유사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전혀 닮지 않았다.

현진국 교수에게 주었던 미지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누가 봐도 ‘이거 외국어네?’라는 반응을 보일 형태를 갖추고 있다. 다만 ‘근데 어느 나라 말인지는 전혀 모르겠다.’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반면 에테르 언어는 언어라기보다는 불규칙한 문양 혹은 기호에 가깝다. 대놓고 보여줘도 사람들은 그것이 언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에테르 언어는 에테르라는 미지의 힘을 통제하는 일종의 명령어, 그리고 미스릴은 에테르에 강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가진 물질이다.

그런데 수퍼컴퓨터로 미지의 언어에서 추출한 패턴이 미스릴과 닮았다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체 왜 닮았다는 거야?”

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드디어.’

꿈속의 자신이 큰 실마리에 도달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힘, 에테르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진언과 주문의 유사성을 깨닫기만 한다면……!”

진언. 한서진은 에테르 언어라 부르는, 에테르 그 자체를 통제하는 신의 언어.

진언은 직접적으로 에테르를 통제하는 ‘말’이다. 진언을 다룰 수 있다면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이며, 직관적으로 에테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괜히 신의 언어로 불리는 게 아닐 만큼, 진언은 학습은 물론이고 사용법도 까다롭다. 대현자급의 마법사나 신관이 아니고서는 사용할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주문’.

주문이란 바로 대현자급이 아닌 인물도 에테르의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진언을 가공한 것이다. 주문은 진언과 달리 에테르를 직접 통제하진 못하지만, 에테르로 형성된 ‘마력’을 움직여 신비한 권능을 발휘하게 한다.

진언은 배우기 어렵고, 주문은 상대적으로 배우기 쉽다.

에테르는 인지하기 어렵지만, 에테르가 뭉쳐 형성된 마력은 인지하기 쉽다.

진언은 에테르를, 주문은 마력을 다룬다.

대현자급의 인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바로 진언을 습득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기계어와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했던가? 그 관계와 유사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꿈속 세상의 한 문물을 떠올린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계어. 1과 0으로 이뤄진, 컴퓨터란 문물을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언어.

프로그래밍 언어. 기계어를 인간이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게 가공된 2차적 언어.

진언과 주문의 관계는 그것과 유사하다. 그 점을 꿈속의 자신에게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그걸 깨닫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곳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큰 한 발자국을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고, 초조했다. 왕은 벌떡 일어나서 침실을 서성거리듯이 돌아다녔다.

“밖에 누구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폐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얇은 실크 드레스를 걸친 미모의 시녀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외출을 할 것이다. 곧바로 준비하라.”

“카딘 기사단을 호위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시간이 촉박하니 수행원만 두엇 데리고 나갈 것이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거라.”

“알겠사옵니다.”

왕의 정식 행차는 연회에 버금갈 만큼 까다로운 격식과 예법을 따진다. 규모 또한 마찬가지.

느긋하게 대행차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왕은 이 초조함을 노신하에게 털어놓고, 의견을 구하고 싶었다.

가슴에서는 터질 듯한 기대감이 넘치고 있었다.

‘경, 드디어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소!’

흥분된 왕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언제나 근엄한 군주로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에, 미모의 시녀는 불경인 줄 알면서도 몰래 흘끔거리며 갸웃거렸다.

‘꿈속에서, 에테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만 있다면……!’

거짓된 대한민국, 진실의 레노지안.

꿈, 그리고 현실.

시공을 초월하여 그 둘을 잇는 연결다리를 놓을 수도 있으리라. 그리 되면 레노지안의 권능을 이용하여, 꿈속의 세상에 자유자재로 개입할 수 있으리라.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 대현자들이 내놓은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었고, 눈곱 만큼이지만 그것을 실행할 가능성을 잡았다.

왕은 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즉시 연락하라. 지금 짐이 만나러 갈 것이라고. 짐의 충직한…….”

명령을 내리다 말고 불현듯 왕은 감전된 듯이 그 자리에 멈췄다. 가슴을 때린 심리적 충격에 얼어붙은 듯이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짐의…… 충직한……. 신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충직한 노신하,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가.

레노지안의 군주, 아서 왕으로서 모든 것이 낱낱이 떠오른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도, 그의 이름만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에테르와 마력.

진언과 주문.

이 관계를 어떻게 쉽게 설명할까 하다가 기계어와 프로그램 언어를 조금 갖다 붙여 보였습니다.

"만약 한서진이 폰 노이만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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