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에테르 언어 =========================================================================
“볼 때마다 대단해.”
올해 65세인 현진국 교수는 한국대에서 언어학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국내 언어학의 1인자로 손꼽히는 그는 대학 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연구에 매진했다.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과 정기적인 교류도 가졌다.
원래 그는 5년 동안 연구해온 연구 주제를 정리해서 학계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년, 그의 학자 인생을 바꿔놓은 어떤 사건 때문에 그 연구 주제는 무기한 미뤄졌다.
“정말 볼수록 신비하단 말이야.”
책상에는 프린트된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현진국은 돋보기안경을 쓴 채 눈이 뚫어져라 종이에 적힌 기호를 들여다봤다. 오늘만 벌써 세 시간째지만 힘든 것도 몰랐다.
“절대로 장난으로 지어낸 게 아니야. 분명히 어떤 민족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언어가 틀림없어. 그런데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니…….”
“알파벳의 시초가 아닐까요?”
조교가 묻자 현진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방대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언어와 닮았으면서, 또 닮지 않았어. 다른 언어에 있는 규칙성이 존재하면서, 또 다른 언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규칙이 발견되고 있어.”
“어렵네요. 대체 어떻게 된 언어일까요?”
한때 알려지지 않은 군용 암호 같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달에 걸친 분석 끝에 그 가정을 지워버렸다.
이것은 암호나 위장 따위가 아닌, 분명히 실제로 사용된 언어임에 틀림없었다. 문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록을 뒤져도 그에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오래 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사용하던 언어 기록이 실수로 남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웃기게도 그런 터무니없는 공상이 가장 그럴 듯한 가설로 보인다는 것이다.
“정말 외계인이 쓰던 언어인가?”
현진국 교수는 오늘도 조교들과 함께 머리를 싸매고 연구에 몰두했다. 낯선 청년이 가져온 종이 한 장은 이렇게 한 저명한 교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교수님, 하버드에 보낸 분석 결과가 왔습니다.”
“벌써? 반년은 걸린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에 하버드가 Z7이라고 차세대 수퍼컴퓨터를 들였잖아요. 그걸 이용하니 분석 속도가 많이 앞당겨졌대요.”
“이야, 세상 참 좋아졌어.”
현진국 교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 달 전, 그는 하버드 언어학 교수들에게 분석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미지의 언어에 존재하는 규칙성을 찾고, 분석하기 위해 수퍼컴퓨터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국내보다는 저명한 학자들이 대거 포진한 하버드의 힘을 빌리려고 했고, 그들은 흔쾌히 들어주었다. 원래는 더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는데, Z7을 도입한 덕분에 훨씬 빨라진 것이다.
“파일 용량이 제법 크구나.”
텍스트만 무려 1기가가 넘는 양이었다. 텍스트 외에 이미지나 동영상 파일도 함께 끼어 있었다. 현진국 교수는 이걸 언제 다 보나,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파일 내용은 다양한 분석 결과가 망라돼 있었다. 기계어, 숫자, 기호, 그래프, 방정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미지의 언어를 분석한 것이다.
“하버드도 한바탕 뒤집어졌겠군.”
“미지의 언어가 발견되었으니까요. 그래도 교수님이 최초 연구자이신 게 분명하니까 저들도 함부로 발표하지는 못할 겁니다.”
“암, 그래야말고.”
출력 작업을 시작한 프린터가 쉬지 않고 용지를 뱉기 시작했다. 현진국 교수는 다시 자리를 잡고 출력물을 하나하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특별한 건 아직까지 눈에 띄지 않는군.”
“일단 다른 언어를 같은 알고리즘으로 분석해서 비교 대차 작업을 해야겠습니다. 근데 우리 연구실 컴퓨터로는 안 돼요. 유체해석 애들이 쓰는 컴퓨터를 좀 빌려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협조 요청 넣어. 잠깐만 쓰자고.”
“쉽게 안 들어줄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막내 조교가 나가고, 현진국 교수는 다시금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교수님, 식사하러 가시죠.”
“응? 김 교수 왔나?”
친하게 지내는 젊은 학자 김철호 교수가 찾아왔다. 응용물리학자인 그는 전공이 전혀 다르지만, 교수 아파트 이웃이다 보니 친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군. 언제 시간이 이리 됐지?”
“가시죠.”
“그러세.”
현진국이 준비를 하는 동안 김철호는 이리저리 널브러진 종이 뭉치를 힐끔 보다가 물었다.
“무슨 프로그래밍 언어 연구하십니까?”
“아닐세. 기계어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어떤 언어를 그냥 이진법 숫자로 치환한 거야.”
“아하, 어쩐지 의미가 영 이상하다 했습니다.”
“자네, 코딩도 할 줄 알았나?”
“심심풀이로 잠깐 공부한 적은 있습니다. 수학 공부하다 보면 가끔 필요해질 때가 있더라고요.”
“그렇지. 사실 학문이라는 게 끝에 다다르다 보면 서로 이어질 때가 종종 있지. 꼭 물리와 수학만 연관이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이 직선 그림은 뭔가요?”
김철호는 복잡한 직선이 수도 없이 얽힌 어떤 그림을 집어들며 물었다. 현진국은 흘끗 보고 대답했다.
“아, 그건 규칙 방정식의 해를 찾기 위한 과정에서 이진법 기호를 다시 직선으로 치환한 걸세. 하버드에 협조 요청을 해서 수퍼컴퓨터를 좀 썼지.”
“그런 걸 보면 요새는 참 컴퓨터가 안 쓰이는 곳이 없군요. 나중에는 미술 작품 획의 패턴을 분석한다고 컴퓨터를 쓰는 날도 오겠어요.”
“그런 건 이미 하고 있지 않던가?”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던 중 김철호가 별안간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안색이 변한 그는 현진국을 돌아봤다.
“교수님, 이 직선 그림 도표 말인데요.”
“왜 그러나? 뭐 좀 알 것 같나?”
“그건 아니고…… 제가 이것과 비슷한 걸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만.”
현진국 교수는 찬물을 머리에 끼얹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다급히 물었다.
“비슷한 걸 봤다고?”
“예.”
“어디, 어디서 봤나?”
“그게…….”
“이 사람아! 숨넘어가겠어! 빨리 말해주게! 정말 중요한 연구 주제란 말일세!”
안절부절 못하는 현진국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는지, 김철호는 조금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반도체공학부에서 봤습니다.”
현진국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반도체공학부? 그, 반도체 만드는 법 연구하는 데?”
“예. 며칠 전에 단대 부속 연구소에 들렀다가 이와 비슷한 그림을 본 것 같습니다.”
“지금 안내해줄 수 있나? 그 그림을 보고 싶어!”
“사실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한……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점심 따위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뭐라고 이 노교수를 이렇게 다급하게 만드는 것일까. 김철호는 얼른 앞장서서 노교수를 안내했다.
“여깁니다. 박효산 교수 연구실입니다.”
“아아, 그 친구. 유명하지.”
스탠포드 전임교수 자리도 뿌리치고 한국대에 남은 사람. 비록 연구 학문은 전혀 다르지만 현진국 교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실에는 연구원들만 있었다.
“박효산 교수님은 어디 가셨나?”
“해외 세미나 참석 때문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사흘 뒤에 돌아오시는데요.”
연구실 최고참 최태규의 대답에 현진국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이 되었다. 사흘을 어떻게 기다려!
다행히 그런 마음을 이해하는 김철호가 나서 주었다.
“자네, 다름이 아니고 내가 며칠 전에 분석 장비 좀 빌려간다고 왔을 때 말이야, 저기 스크린에 이런 그림이 있던 걸 봤던 기억이 나거든. 혹시 보여줄 수 있겠나?”
“그림이요?”
무슨 말인가 하고 갸웃거리자 현진국 교수는 급히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복잡한 직선으로 수없이 얽힌, 도표 같은 그림을 확인한 최태규는 아하 하고 끄덕였다.
“아, 이거 말씀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별 거 아니니 보여드릴게요.”
최태규는 곧바로 파일을 불러와 모니터에 해당 그림을 띄웠다. 현진국 교수는 자리를 빼앗듯이 달려들어 그림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가져온 종이의 그림과 거듭 비교했다.
그의 입에서 기쁨 가득한 탄성이 터졌다.
“맞아! 이거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에서 패턴이 일치하고 있어!”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어! 정말 다행이야!”
현진국 교수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했다. 벌써 해가 바뀌었는데도 진척 결과가 없어 낙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단서를 찾을 줄이야.
어느 정도 기쁨이 가라앉자 현진국이 물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반도체공학부에서 왜 언어학을 분석하고 있는 건가?”
“언어학이라니요?”
“지금 이거 말일세. 이건…….”
현진국이 미처 말을 잇기 전, 최태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건 스코브리아늄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겁니다.”
“스코브리아늄?”
현진국은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인문학인 그는 스코브리아늄이 뭔지 정확히 몰랐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했지만…….
“가장 최근에 발견된 신원소입니다. 반도체 소재로 각광받고 있는 물질이죠. 그건 바로 스코브리아늄을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한 모습이고요.”
“뭐라고?”
현진국은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진 채, 손에 쥔 종이와 모니터의 화면을 번갈아 확인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설계 끝났습니다.”
한서진은 이마를 닦으며 기지개를 켰다. 하정태가 웃으며 박수를 짧게 쳤다.
“축하한다. 고생이 많았다.”
“무에서 새로 설계하는 건 처음이라 힘들었네요. 제대로 작동이나 할지 모르겠어요.”
“네가 한 거니 확실하겠지. 그럼 바로 시뮬 돌릴게.”
“네, 부탁합니다.”
설계도를 완성했으니, 이제 전산상의 검증이 필요했다. 회로가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구성되었는지 프로그램으로 체크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통과 못하면 시제품 생산은 하나 마나다.
‘문제는 없을 거지만.’
설계도를 그리는 내내 통찰안으로 실시간 확인을 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바로바로 수정을 해나갔다. 마지막 작업을 완료한 후에는 꼼꼼하게 다시 통찰안으로 살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당연히 회로 점검에서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2시간쯤 걸릴 거야.”
“아마 에러는 없을 거예요. 확신합니다.”
“자신만만하구나.”
“그럼요. 제 설계는 완벽하다고요.”
“당당하네. 그런 모습 보기 좋다.”
“이제는 저도 사장이잖아요. 당당해져야죠. 비록 아직은 직원이 두 명뿐이긴 하지만.”
가슴을 펴며 한 말에 하정태는 피식 웃었다.
“SJ인더스트리가 있잖아.”
“……에이, 그게 어디 제건가요. 지분만 조금 있는 거죠.”
“난 왠지 네가 그 조금만 있다는 지분이 상상 이상으로 많을 것 같은데. SJ도 혹시 서진의 S와 J를 딴 거 아니야?”
“아닙니다.”
한서진은 당황함을 감추고 고개를 저었다. 85%의 지분이 있다는 건 아직 밝히기 쑥스러웠다.
“아무튼 오늘 일은 이걸로 마칠 테니까, 시뮬 끝나면 두 분도 바로 퇴근하세요. 제 메일로 결과 보내주시구요.”
“알았다. 너는?”
“전 학교나 가보려고요.”
박효산 교수 연구실이 뒤집어졌다는 걸 모르는 한서진은 산뜻한 마음으로 포르쉐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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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을 담아서, 실탄♥
이것도 추천해 보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