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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76화 (76/609)

00076  독립과 창업  =========================================================================

부적합 외에 다른 판정이 뜨는 여자를 찾아볼 수가 없자 한서진은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송하나, 그 여자만?”

근데 말해놓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여고생한테 그 여자라니? 이상한 오해받기 딱 좋지 않은가. 그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왜 그 학생만 다른 거지?”

혼자 고민해봤자 통찰안이 말을 해주는 것도 아니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따로 찾아가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 해볼 여지도 없었다.

‘이유를 알면 좋을 텐데, 아쉽네.’

그도 혈기왕성한 나이다.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있다 보니 연애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통찰안이 보이는 여자마다 여자친구로서 부적합이라고 퇴짜를 놓으니, 아무리 예쁜 여자라 해도 뭔가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냥 부적합 판정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사귈까?’

사귄다고 다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 한 번 그래볼까 하는 마음이 솔깃 생겼다. 연애도 많이 해봐야 늘지 않을까.

한서진은 눈을 들어 캠퍼스 거리를 바라봤다. 미대 근처라 그런지 스타일 좋고 예쁜 여대생들이 제법 보였다.

묘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저들 중 어느 누구라도 사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러고 보니 수십 번을 넘게 한 미팅, 소개팅도 그랬다. 상대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다. 여자 쪽이 싫어하더라 하는 반응은 한 번도 없었다.

“진짜 통찰안 무시하고 사귀어 봐?”

오해는 금물, 송하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진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근래 들어 분위기가 안 좋았다.

“모바일사업부가 캔슬을 놨다고?”

“예. 신제품 스마트폰기기 설계가 전면 바뀔 모양입니다.”

“허어, 미친놈들. 회장님은 뭐라고 하시지?”

“회장님께서는 아직 아무 말이 없습니다. 권용재 사장이 아무래도 각오하고 회장님을 설득할 모양입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진성전자는 사장이 여럿 있다. 그래서 각 사업부를 부장이 아닌 사장급이 직접 관리한다.

그중 반도체사업부는 단언컨대 진성전자를 먹여 살리는 최대의 사업부였다. 그런데 요즘 크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바로 슈나우저 때문이다.

“안 되겠어.”

결국 반도체사업부 채용석 사장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모바일사업부를 찾았다.

“권 사장, 자네 이러긴가?”

“무슨 일인가?”

“원래 개발 중인 패드7에 우리 AP칩을 쓰기로 했었잖아. 근데 캔슬 놨다며?”

패드7는 이번에 새로 개발 중인 진성 스마트폰을 말했다. 권용재 사장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거? 겨우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나?”

“겨우 그거라니? 같은 사내 부서끼리 비즈니스도 협조하고 그래야지, 어떻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엿을 먹일 수 있나? 부회장님께서 아시면…….”

“부회장님께서 승인하신 일일세.”

채용석은 충격을 먹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권용재는 어쩔 거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AP 잘 좀 만들지 그랬나? 슈나우저와 뻔히 성능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자네 부서 AP를 쓰겠나? 아무리 같은 회사 소속이라 해도, 사실 각 사업부는 전혀 별개인걸.”

“부회장님께서 왜…….”

“내가 보고를 드렸지. 현재 시장에서 슈나우저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 그리고 슈나우저를 채택하지 않을 시 예상되는 성능 차이, 그로 인해 우리 스마트폰 고객층이 얼마나 이탈할지까지도. 부회장님께서는 그 예측표를 보시고 두 말 없이 승인하셨네.”

“우리 반도체사업부가 휘청거리는 걸 감안하신단 건가?”

“두 팔을 모두 잃는 것보다는 한 팔만이라도 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거지.”

채용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PC용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 반도체는 진성전자 반도체사업부를 이끄는 쌍두마차다. 그 중 하나인 스마트폰,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AP시장을 송두리째 잃게 생겼다.

진성폰도 안 쓰는 AP를 과연 어느 정신 나간 스마트폰 제조사가 사서 쓰겠는가? 심지어 생산량의 90% 이상을 진성폰이 소모해주고 있었는데.

“노파심에 말해주는데, 부회장님께서는 꽤 분노하신 듯 보였네. 얼마나 반도체 개발을 소홀히 했으면 그런 신생업체한테 밀릴 수 있느냐는 거지.”

“소홀히 했다니, 그런 적은 없어!”

“그 말을 부회장님 앞에서도 할 수 있겠나?”

“…….”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 채용석은 더욱 주먹을 세게 쥐었다. 꽉 물린 이빨이 바르르 떨렸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라도 잘 사수하게. SJ인더스트리가 지금은 TPU(종합연산장치)에 집중한다지만, 나중에는 메모리 반도체까지 손을 뻗을지도 모르니까. 부회장님도 그 점을 우려하고 계셨네.”

“……충고 고맙네. 새겨듣지.”

채용석은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사업부로 돌아온 그는 급히 임원들을 불러 모았다. 모바일사업부가 신제품 스마트폰에 슈나우저를 탑재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에 그들은 하나같이 분개했다.

“같은 회사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거야말로 부서이기주의 아닙니까! 자기들 실적만 올리면 다란 말입니까!”

그러나 분노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냉정한 사태 파악이 중요했다.

한 임원이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슈나우저를 성능으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마케팅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이미 슈나우저는 스탠포드 행사를 통해 단단한 입지를 구축했습니다. 모바일사업부도 그 점을 알기에 신제품 라인업에 슈나우저를 쓰기로 했을 겁니다.”

“슈나우저는 20nm공정으로 제작된 반도체입니다. 여기에서 공략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7nm공정 기술을 보유할 수 있다면, SJ인더스트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7nm공정기술을 무기로 SJ인더스트리와 협상을 하자는 말인가?”

“특허 나눠먹기처럼 가야겠죠. SJ인더스트리는 공정기술을 개발할 능력은 안 됩니다. 그 점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상용화도 병행해야겠죠.”

7nm공정기술을 개발하여 슈나우저와 협력적 관계를 시도하는 것, 그리고 스코브리아늄 반도체의 상용화. 현실적으로 반도체사업부가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일단 7nm공정기술 개발을 서둘러 마치는 게 관건이겠군.”

“그리고 SJ인더스트리가 메모리 시장에 진출하려는지 면밀히 지켜봐야 합니다. 여차 하면 치킨 게임을 해서라도 초기에 승부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스코브리아늄 연구는 한국대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내지 않았습니까?”

“좋아, 그 교수와 다시 협업을 하면 되겠어.”

순간 잠자코 있던 최만재 이사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채용석 사장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교수가 박효산 교수였지? 최 이사가 그 라인을 맡고 있지 않았나?”

“……맞습니다.”

“잘 됐군. 이 건은 자네가 맡아서 추진해주게.”

최만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회사 프로젝트는 다시는 안 맡을 거라고 한 사람을 찾아가야 하다니.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최 이사가 여기는 어쩐 일로 왔습니까? 우리 랩과 진성전자의 정산은 다 끝났는데?”

대놓고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최만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박 교수, 서운한 게 있으면 우리 말로 해결합시다.”

“말로? 해결?”

“공동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여러 모로 힘들었던 거, 내가 다 이해합니다. 우리 감사팀이 워낙 깐깐하게 굴었지요?”

“감사팀이 깐깐하게 구는 건 상관없어요.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게 감사팀이니까. 문제는 지저분한 집안싸움에 애꿎은 우리 랩이 피를 봤다는 거지. 그래, 이서나 사장과 이용무 부회장은 아직도 승계권 다툼 중입니까?”

“…….”

최만재 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진성전자 부회장 이용무를 밀어내기 위한 친누나 이서나의 공작은 아직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박효산 교수가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몇 달 동안 EPR-2 프로젝트 수행하면서 아주 학을 뗐어요. 이서나 사장이 보낸 감사팀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와서 사사건건 지출 내역을 뜯어보지, 이용무 부회장측 라인은 그걸 제대로 막아줄 마음도 없지, 고래 싸움에 낀 새우만 등이 터져 나갔단 말이오.”

“…….”

“이제 겨우 빠져 나왔는데, 거길 또 들어가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박 교수, 그러지 말고…….”

“아 글쎄, 안 한다니까. 잔치판을 벌이려거든 먼저 집안다툼부터 끝내라고요.”

최만재는 결국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쓸쓸히 연구실을 나서야 했다.

마침 들어서던 한서진은 어깨가 축 늘어진 최만재 이사를 보고 갸웃거렸다. 그는 안홍철한테 물었다.

“안 선배님, 저 분은 누굽니까?”

“EPR 프로젝트 알지? 네가 전에 간단히 해결했던 진성전자 프로젝트.”

“아, 네.”

“최만재 이사라고, 그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람이야. 우리 랩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지.”

“과거형이군요.”

안홍철은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때 감사팀 기억 안 나? 우리가 밥 먹은 거 가지고도 지랄했던 애들.”

“네, 기억납니다. 이서나 사장측 라인이라고…….”

“이서나 사장이 이용무 부회장 친누나잖아. 이 부회장 끌어내리고 자기가 진성전자 먹으려고 작정을 했거든. 그래서 우리 랩도 몇 달 넘게 시달렸고. 그거 때문에 교수님이 지금 최만재 이사님 제안 단칼에 거절하셨어.”

“무슨 제안을 했는데요?”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공정기술 개발을 총괄해달라고. 우리가 EPR 프로젝트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마쳤잖아. 그 실력을 믿고 맡기려는 거지.”

“그래요?”

한서진은 최만재가 나간 방향을 한 번 흘끔 바라보았다.

안홍철이 혀를 차며 말했다.

“슈나우저 때문에 진성전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7nm공정에 박차를 가하는 걸로도 모자라 스코브리아늄까지 동시에 진행하다니. 잘못하면 몇 년 간 번 돈을 연구개발비로 다 날려버릴지도 모르겠네.”

슈나우저 이야기가 나오자 한서진은 괜히 찔끔했다.

안홍철은 고소하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이참에 SJ인더스트리에서 메모리 반도체까지 딱, 하고 내놓으면 진성전자 아주 골로 가겠는데? 이서나 사장은 내심 SJ인더스트리를 응원하고 있을지도 몰라. 회사가 흔들려야 자기가 부회장이 될 수 있을 테니.”

메모리 반도체라는 말에 한서진은 순간 제 발이 저렸다. 안 그래도 슈나우저와 상성을 이룰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려고 했는데, 그걸 딱 알아맞히다니.

“근데 반도체 개발이 쉬운 것도 아니고, 뭐 금방 나오지는 않을 거야. 슈나우저도 듣자니 개발하는 데만 5년 걸린 역작이라고 하니까.”

“네? 5년이요?”

금시초문인 숫자에 한서진은 황당함을 느꼈다.

“소문이 그러더라. 근데 개발 기간 5년이면 짧은 거지. 5년 공들여서 슈나우저 같은 거 만들 수만 있다면, 어휴 나라면 내 전 재산을 쏟아부었을 거야. 닥치고 내 투자 좀 받아달라고.”

“돈 얼마나 있으신데요?”

한서진은 장난스럽게 물었고, 안홍철은 의기양양해서 대답했다.

“에헴, 이래봬도 2억이 있지.”

“와, 돈 많으시네요. 그 나이에 어떻게 모았어요?”

“전부 다 주식이지. 으으, 생각만 해도 아까워. 진짜 TX인더스트리 주식 좀 사두는 건데.”

“돈 많으시니까 제 벤처에나 좀 투자 하시죠.”

장난처럼 건넨 말에 안홍철은 난처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점잖게 대답했다.

“네 회사 창업한지 며칠 밖에 안 됐잖아.”

“그러니까 이때 투자를 해야 나중에 크게 돌려받는 거 아닙니까?”

“미안, 내가 철칙이 하나 있는데 절대 아는 사람 회사에는 투자하지 않는 거야. 잘못해서 투자금 날리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거든.”

안홍철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자 한서진도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었어요.”

“진짜 미안해. 내 철칙이라 어쩔 수가 없어.”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 작품 후기 ============================

"그 2억이 2억 달러가 될 수도 있었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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