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독립과 창업 =========================================================================
“회, 회장님?”
“이거 정말 서운하네. 이런 뜻있는 자리에 왜 나는 쏙 빼놓고 안 불렀나?”
어딘지 뚱해 보이는 표정에 한서진은 당황함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예 연락도 안 주다니, 나한테 그리 서운한 게 있었나? 내가 자네한테 그리 박하게 굴었나?”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0억짜리 포르쉐도 주신 양반인데 그럴 리가.
물론 H반도체와 비글 문제가 얽혀 있지만, 그건 백철중 회장 개인에 대한 유감은 아니었다.
성큼 들어선 백철중 회장은 사무소 중앙에서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옛날 생각나는구만……. 내가 처음 꾸린 회사도 딱 이런 느낌이었지. 직원도 단 두 명뿐이었다네.”
“그러시군요.”
“그 조그만 회사를 지금의 H그룹으로 키워내는데 근 40년이 걸렸다네.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 정권에 한번 잘못 보여서 회사가 쓰러질 뻔한 적도 있었고, 경쟁사 계략에 넘어서 시장에서 퇴출될 뻔한 적도 있었다네. 그 고난을 모두 물리쳐서 지금의 그룹을 이룬 게야.”
지나간 40여 년을 회상하듯 중얼거리던 백철중 회장이 문득 한서진을 돌아보았다. 사람을 헤집듯이 날카로운 눈빛이다.
“자네는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예?”
“지금 이 회사, H그룹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키워내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에잉, 그러면 안 되지. 모름지기 젊은이는 큰 포부를 가져야 하는 거야. 연매출 1조 원의 회사로 만들겠다! 라고 생각하고 노력을 해야 근사치라도 이룰 것 아닌가?”
“…….”
“처음부터 한계선을 좁게 그어버리면 그걸 벗어나지 못한다네. 그러니 꿈은 최대한 크게 잡는 게 좋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새겨듣겠습니다.”
“그나저나 손님이 왔는데 차라도 내주지 그러나?”
“아, 죄송합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한서진은 급히 회전의자를 가져왔다. 사무소에는 접대용 소파가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철중 회장은 별 말 없이 회전의자에 앉았다. 한서진은 간이 냉장고에서 차가운 음료를 꺼내 가져왔다.
“드시지요.”
“고맙네.”
한서진은 자신도 앉아야 하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H반도체였다면 감히 회장님 앞에서! 라고 경영진이 눈을 부라렸겠지만, 여기는 자기 사무소가 아닌가? 게다가 보는 눈도 없고.
“앉지 그러나? 자네 혼자 서 있으니 뻘쭘하군.”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한서진도 의자를 가져와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았다.
좁은 사무소에서 H그룹 총수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로 오셨지?’
정말 단순히 개소식을 축하해주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자신과 백철중 회장이 그 정도로 유대감이 있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재벌 총수 입장에서 자신은 크게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할 인재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정지원이, 그 친구에게 말이라도 전해줘서 고마웠네. 저번에는 전화로만 그친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왔네. 그래도 고맙단 인사는 직접 보고 해야 하지 않은가?”
“아, 그러시군요.”
한서진은 조금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재벌 총수가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백철중 회장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정지원과 잘 풀지 못한 것일까?
“정지원이 그 친구가 생각보다 쌓인 게 많은 모양이더군.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네.”
“제안이라면, 어떤……?”
“H반도체가 지금까지 비글로 거둔 법인 수익의 절반을 사과의 의미로 주겠다고 했는데,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 우리와는 거래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 같았네.”
한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백철중 회장이 관계 개선을 위해 얼마나 과감한 결정을 내렸는지 알 것 같았다. 법인 수익의 절반이라니, 정당한 특허 로열티의 몇 배가 넘는 금액 아닌가.
“다 내 불찰이지.”
백철중 회장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까마득하게 높아만 보이던 그가 조금은 작게 느껴진다. 그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
“……네.”
“참, 자네 이야기는 세완이한테는 들었네. 한국대 교수 연구실과 산학협동을 추진하기로 했다면서? 자네 사무소도 함께 할 거라 들었네.”
“그렇습니다. 백 실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직원으로 끼고만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내보내서 성장시키는 것도 좋겠지. 자네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격려 감사합니다.”
자신을 범H그룹 계열로 간주하는 듯한 표현이 조금 거북했지만, 한서진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될 관계다. 그리고 굳이 H그룹과 척을 질 필요도 없지 않은가.
“듣기로 자네 재산이 거의 없다던데, 회사 월급이 끊겨서 힘들거나 곤란하지는 않나?”
“괜찮습니다.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많이 힘들 텐데.”
“교수님이 도와주실 거라 괜찮습니다. 그 분, 진성전자에서 받은 연구자금이 상당하시거든요.”
“진성전자, 그 괘씸한 놈들.”
백철중 회장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H그룹이 진성그룹과 유독 사이가 좋지 않은 게 생각났다. 그 이야기는 괜히 꺼냈나?
“안 그래도 교수님도 마지막 프로젝트 마무리하시면서 여러 모로 불쾌감을 보이셨습니다.”
“그 놈들은 너무 차갑게 회사를 경영한단 말이야. 옛날부터 참 마음에 안 들었네.”
실무 경영진의 방침을 보면 H그룹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지만, 한서진은 굳이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백철중 회장은 사업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본인은 낡은 시대의 경험이라고 웃었지만, 한서진에게는 신기하면서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한서진의 마음을 잡아끄는 당부가 있었다.
“사업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믿어선 안 되네. 그러나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려면 사람을 믿어야 하네.”
“뭔가 모순이군요.”
“언젠가 이 말이 가슴으로 이해될 날이 올 거야. 그때는 이미 크게 성공한 뒤겠지.”
“……지금은 잘 이해가 되지는 않네요.”
“당연하지.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떼지 않았나.”
백철중 회장은 유쾌한 듯이 껄껄 웃었다.
한서진은 속으로 조금 떨떠름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아직 자신은 성공에 근접도 못했다는 뜻인가?
‘슈나우저로는 턱도 없나?’
여기서 얼마나 더 올라가야 성공인 거지? 에테르와 미스릴을 100% 규명해서 노벨상을 열 개쯤 받아야 성공인가?
한서진은 속으로 피식거리며, 지금 들은 말을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다. 언젠가는 이해될 날이 오겠지, 하며.
딩동. 딩동.
그때 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또 누가? 하고 한서진은 의아해하며 일어났다.
“이런, 우리 하나를 너무 기다리게 했군.”
“예?”
“잠깐 축하와 고맙다는 말만 전하고 나온다 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깜박했지 뭔가. 하나가 많이 화가 났겠는데.”
혼자 온 게 아니라 딸도 같이 왔나? 백철중 회장이 벗어놓은 재킷을 입는 동안 한서진은 얼른 사무실 문을 열었다.
다소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아빠는 대체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셈…… 어?”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시 뵙네요.”
짜증이 묻어난 뾰족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침착해졌다. 눈빛에 깃들었던 신경질도 재빨리 지워졌다.
눈이 마주친 한서진은 당황해서 얼어붙었다.
송하나, 그녀는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여배우를 연상케 하는 차분한 미모, 170에 육박하는 늘씬한 키와 육감적인 볼륨을 자랑하는 바디라인. 거리에서 마주치면 누구라도 돌아볼 수밖에 없는, 세련된 섹시미도 여전했다.
그러나 딱 하나 달라진 게 있었다.
「송하나.」
재킷의 가슴 부분에 붙어 있는, 그녀의 이름이 적힌 조그마한 명찰. 흰 블라우스와 감색 주름 스커트. 그녀의 복장 기호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저것은 분명…….
‘교, 교복?’
한서진은 일순 패닉에 빠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교복이라니!
아니, 저 성숙한 얼굴과 쭉쭉빵빵한 동양인을 초월한 바디라인에 교복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나야, 가자.”
“네, 회장님.”
송하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분한 어조는 조금 전 잠깐 보였던 까칠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창업을 축하하네. 열심히 하게나.”
“……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송하나는 그를 한 번 흘긋 보고는 백철중 회장과 팔짱을 끼었다. 이렇게 보니 아버지와 딸, 아니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다정히 보인다. 겨우 교복이 하나 추가되었을 뿐인데.
한서진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통찰안이 저절로 발동했다.
「반적합.」
“……반적합? 무슨 반도체도 아니고 웬 반적합?”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왜 통찰안이 보여주는, 그녀에 대한 판단이 바뀐 것일까? 설마…….
“교복을 입었다고 그런 건 아니겠지?”
통찰안이 진짜 미쳤나?
다음 날.
한서진은 학교 강의실에 도착해서 가방을 놓고 앉았다. 사무소에 일찍 출근한 하정태와 박수진에게는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말을 해두었다.
강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현석이 다가왔다.
“형님, 들었습니다. 벤처 하신다면서요?”
“어디서 들었어?”
“이미 학과에 소문이 쫙 났습니다. 출처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한서진은 작게 이를 갈았다. 박효산 교수가 틀림없어. 적어도 랩에서 흘러나온 건 분명했다.
“H반도체에서 밀어주는 사외 벤처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한 5년에서 10년 지나면 형님 H그룹 계열사장 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직원 겨우 두 명인 벤처야. H그룹하고는 아무 상관없어.”
“네? 제가 듣기로는 H그룹에서 키워주는 거라고 하던데요?”
“그런 거 아냐. 뭐, 업무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럴 일도 별로 없고.”
“그래도 H반도체에서 특별히 신경 써줄 거 아닙니까?”
“그건 그럴 수도.”
간단한 근황을 이야기하는데 교수가 들어왔다.
강의가 시작되었지만, 한서진은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어제 잠을 조금 설쳤다.
‘그나저나 송하나 그 여자가 반적합이라니……. 그게 대체 뭐야?’
진짜 궁금했다. 왜 송하나에 대한 판별이 바뀐 것일까?
‘아니, 애초에 이상하잖아. 적합도 아니고 부적합도 아니고 적합인듯 아닌듯 하다는 말 자체부터가 영 글러먹었어.’
심지어 이번에는 반적합으로 바뀌었고. 혹시 통찰안이 고장이 난 것은 아닐까?
‘어디…….’
한서진은 두툼한 영어 원서를 펼쳤다. 정신을 집중하고 보자 난해한 영어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가 떠오른다. 예전에 봤던 내용과 동일하다. 해석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통찰안이 잘못된 건 아닌데.’
내내 송하나의 모습이 떠올라서 신경이 쓰였다. 왜 그녀만 부적합이 뜨지 않는 걸까?
강의가 끝나고, 한서진은 캠퍼스 벤치에 앉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는 여자들을 눈에 띄는 대로 관찰하며 통찰안을 발동했다.
물론 대부분은 통찰안이 발동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통찰안이 발동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도 시간 차이가 뒤죽박죽이었다.
“어, 오빠. 여기서 뭐해요?”
“그냥 뭐 좀 생각하고 있어.”
“벤처 사업 하신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고마워.”
알고 지내는 과 여학생들을 상대로는 거의 즉시에 가깝게 통찰안이 발동되었다. 익숙함이 낳는 차이 같았다.
물론 결과는 동일했다.
‘부적합.’
‘부적합.’
‘부적합.’
그것 외에 다른 결과가 뜨는 여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통찰안 님, 왜 '적합인듯 적합아닌 적합같은'에서 '반적합'으로 바뀐 겁니까?
"교복 프리미엄입니다ㅋ"
그러니 제가 아닌 통찰안을 매우 치셔야 합니다. 저는 순수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