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4 독립과 창업 =========================================================================
한서진은 한국대 바로 근처에 사무실을 얻어 설계 사무소를 차렸다. 15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이지만, 내 집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직원은? 우리 둘이서만 하는 거냐?”
“경리라든가 잡다한 일 처리해줄 사람이 한 명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여자가 낫겠죠?”
“물론이지. 이 좁은 곳에 남자 셋이서 처박힐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하긴, 저도 그래요.”
구직 사이트에 공고를 올리자 금방 지원이 왔다.
제일 먼저 면접을 온 것은 20대 초반의 날씬하지만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한서진을 대신해서 하정태가 면접을 봤고, 그 자리에서 채용을 결정했다. 그녀의 이름은 박수진이라고 했다.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시면 돼요.”
“예, 알겠습니다.”
다음 날, 셋은 아침 일찍부터 사무소에 출근했다.
셋은 오전 내내 새로 주문한 책상과 사무기기를 정리했다. 그 일이 끝난 후에는 컴퓨터를 설치했다.
“컴퓨터가 제 것만 조금 다른 것 같네요?”
박수진이 빈약해 보이는 자기 컴퓨터를 보고 갸웃거렸다.
하정태가 대신 대답했다.
“아, 그거야 수진 씨는 경리 업무나 사무 살림 같은 걸 맡길 생각이니까요. 우리는 설계하려면 고급 컴퓨터가 필요해요.”
“맞다, 설계 컨설팅이라고 하셨죠.”
“네, 반도체 쪽 설계 컨설팅이죠. 그게 앞으로 우리 사무소가 하는 일이 될 겁니다.”
“반도체라니, 뭔가 되게 멋있어요.”
프로그램을 정리하던 한서진이 그걸 듣고 작게 픽 웃었다.
저녁쯤이 되자 얼추 모든 정비를 마쳤다. 이제 내일부터 당장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힘드네요. 이런 작은 사무실 하나 정리하는 데도 하루가 후딱 지나가네요.”
“원래 다 그런 거지.”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나도 잘 부탁한다.”
컴퓨터 등 사무집기를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편안한 회전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있던 한서진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은 뭘 보고 그렇게 무모하게 나오신 거예요?”
“그게 고용주가 할 말이냐?”
“아니, 그렇잖아요. 대기업에 억대 연봉 때려 치고 이런 조그만 사무실에 몸을 던지시다니. 그렇게 모험심 강한 분이신 줄 몰랐네요.”
“네 실력을 믿으니까.”
낯이 간지러운 말이다. 하정태는 진지한 눈빛을 띠고, 차분히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너 혼자서 맥플 설계원안 고쳐서 비글 뚝딱 만들어냈을 때…… 내색은 안 했지만, 솔직히 정말 전율했다.”
“…….”
심플하지만 극의가 담긴 칭찬. 한서진은 더욱 민망해졌다. 괜히 물어봤나 싶기도 했다.
“나도 나름대로 영재만 모인 한국대 나왔지만…… 너 같은 진짜 천재는 처음 봤거든. 그래서 네가 제안했을 때 진지하게 생각해봤고, 이 길을 걸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
한서진은 문득 정지원을 떠올렸다. 하정태의 지금 말은 정지원이 보였던 태도와 흡사했다.
“다른 두 분은 근데 안 따라오셨네요.”
“선택이 다른 것뿐이지. 걔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것도 이해해. 회사에 남든가 너를 따르든가, 어느 쪽을 고르든 간에 망설여질 수밖에 없지. 혼자면 또 모르겠는데 다 가족들이 있잖아.”
“선배님 가족까지 제가 책임져야 하는군요. 이거 어깨가 좀 무겁습니다.”
“괜찮아. 나는 내가 정한 길을 믿는다.”
하정태는 문득 생각난 듯이 피식거렸다.
“그리고 너, 별로 열심히 설득하지도 않더라? 그래서 걔네 둘이 안 넘어온 거고.”
“그랬던가요.”
“좀 더 그럴 듯한 명분 세우고, 밝은 미래 청사진 보여주고 했으면 걔들도 회사 박차고 나왔을걸? 솔직히 네 설득이 걔들을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어.”
“원래 정말 좋은 물건, 좋은 자리는 알아서 팔려나가잖아요. 굳이 입 아프게 과대홍보 안 해도요.”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하정태의 얼굴에서 표정이 조금 사라졌다. 한서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에는 세 분 다 모셔오고 싶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좋은 제안을 했으면 그걸로 된 거다, 굳이 이게 정말 좋다는 걸 설득시킬 필요까지는 없다, 뭐 그렇게요.”
“우리 사무소가 정말 좋은 제안이라고?”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왜 그 좋은 직장 때려 치고 저 따라오신 건데요?”
하정태는 일순 말문이 막혔으나, 곧 웃으며 받아쳤다.
“너, 말빨 좀 늘었는데?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선배님은 제 면접을 유일하게 통과한 거라고 좋게좋게 생각하시죠.”
“그럼 다른 두 녀석은 면접에서 떨어진 거냐?”
“그냥 좋게좋게 생각하자는 거죠.”
한서진은 웃는 얼굴로 하정태를 주시했다.
자신은 그들에게 좋은 제안을 했다. 그것이 좋은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은 본인들의 능력이자 운명일 뿐. 인연은 그런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뉘기도, 엮이기도 하는 것이다.
하정태가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정말 좋은 제안은 열심히 설득할 필요가 없지. 어차피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오히려 ‘이건 정말 좋은 기회다.’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설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좋은 기회라면 그런 노력 없이 이미 누군가가 선점을 할 테니까.
“난 그래서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아. 비록 지금은 이렇게 작은 사무소에서 출발하지만, 너의 천재적인 반도체 설계 능력을 보면 머지않아…….”
“우리가 설계한 반도체는 SJ인더스트리에서 생산하게 될 겁니다.”
한서진은 툭 내뱉듯이 말을 던졌다. 짧고 간단한 한 마디,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어마어마한 파급력이 있는 것이다. 하정태는 잠시 멍해졌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답지 않게 말을 조금 더듬었다.
“S, SJ인더스트리라고?”
“네, 슈나우저 제조사요.”
“왜 거기랑…… 아니, 잠깐. 너 혹시 그쪽과 뭔가 인맥이 있는 거야? 가만, 그러고 보니 맥플 부사장이던 칼 루이스가 그 회사에 있다고 했지?”
칼 루이스는 SJ인더스트리의 대외적인 활동을 도맡아 했기에, 하정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정태는 단숨에 SJ인더스트리와 한서진 사이에 놓인 대동맥을 추론해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정지원 팀장님이 지금 SJ인더스트리에 계세요.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요.”
“뭐? 정 팀장님이? 아니, 어떻게?”
하정태는 펄쩍 뛰었다. 생각보다 더 크게 놀라는 반응에 한서진은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제가 여름방학에 학교 행사로 스탠포드와 실리콘밸리에 갔었잖아요. 그때 정 팀장님 뵀습니다. SJ인더스트리의 창립멤버라고 하시더군요.”
“…….”
“정 팀장님도 저 진짜 좋게 보시잖아요. 그래서 그때 H반도체 나오라고 권유를 받았어요. 설계 사무소 차리고 SJ인더스트리의 설계팀과 장거리 업무 협동을…….”
“아, 그렇구나. 이제 알겠다.”
“네?”
“슈나우저 개발자가 너지?”
한서진은 천장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갑자기 이 말이 나오는 거지?
하정태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로 시원스럽게 말했다.
“이제야 딱 각이 나오네. 네가 재직 중에 슈나우저 개발했고, 정 팀장님이 그거 가지고 미국에서 너 대신 회사 차린 거지? 원래는 창업 설득하셨다가 네가 미래가 불안하다고 머뭇거리니까 일단 혼자서만 회사 나가신 거네. 그치?”
사실관계에 아주 조금 차이가 있지만, 진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긴, 비글도 한 번 그렇게 뺏겼는데 슈나우저 그대로 내놨다가는 회사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거니까. 정 팀장님도 정말 큰 결심하고 도박하신 거네. 물론 성공할 수밖에 없는 도박이었지만.”
“……어떻게 아신 거예요?”
한서진은 더 이상 잡아떼는 것도 포기한 채 멍하니 물었다.
하정태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정 팀장님이 슈나우저 개발할 만큼 설계 능력 뛰어난 건 아닌데 SJ인더스트리 창립 멤버고, 네가 정 팀장님이랑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된다면 답이 딱 나오지 않냐?”
“…….”
“그럼 너도 SJ인더스트리 창립 멤버겠네? 지분은 어느 정도나 있어?”
“그,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뭐, 그건 차차 말해줘도 되고 안 알려줘도 되고. 야아, 그렇구나. 이제야 미심쩍었던 게 납득이 가네. 정 팀장님, 그렇게 어이없게 회사 관둘 양반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한서진은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통찰안은 나보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이 친구야. 이런 일을 했으면 와서 보고를 해야지. 그래야 와서 축하해줄 것 아닌가.”
“개소식을 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는 아니라서요.”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못써.”
그날 저녁, 어떻게 알았는지 박효산 교수와 연구생들이 모두 사무소로 몰려와서 축하를 해주었다. 좁은 사무실에서 간소하게나마 잔치판을 벌이니 모처럼 시끌벅적했다.
“랩에서 가장 어린 네가 벌써 이렇게 벤처를 시작하다니. 대견하구나. 니들도 본 좀 받아라.”
“저희는 교수님 등에 매달려 있는 게 좋지 말입니다.”
“홍철이 저건 어디 가도 절대 굶어죽진 않을 거다. 내가 확신한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오가며, 종이컵을 부딪쳤다.
박효산 교수가 얼큰하게 취해서 말했다.
“세완이한테 연락 받았다. 우리 랩과 산학협동 연구를 하고 싶다는구나. 서진이 네 회사도 끼워서 말이야. 그래서 긍정적인 대답을 줬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은 무슨, 따지고 보면 네 덕분에 우리가 H반도체와 연결된 것 아니냐? 안 그래도 진성전자 그 놈들 갑질하는 게 짜증났었는데.”
“그 뒤로는 같이 연구 안 하시는 건가요?”
“안 한다. 참, 진성전자가 EPR 프로젝트 연구 자금 책정했던 것 중에서 남은 건 우리 랩에 주기로 한 거 알지? 필요한 설비가 있으면 그 연구자금에서 구매해도 된다. Z7을 구매해도 말리지 않으마. 어차피 우리도 써야 하니.”
“…….”
Z7이란 말에 한서진은 멋쩍게 웃다가 하정태와 눈이 마주쳤다. 비밀을 공유한 이들만의 조용한 미소가 작게 번졌다.
“사무소 운영하다가 자금 딸리면 말하고. 요즘 랩에 돈이 넘쳐나고 있으니까. 연구 프로젝트에 필요한 거면 뭐든지 다 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어머, 그럼 저희 회계 펑크 날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여직원인 박수진이 신이 나서 물었다. 박효산 교수는 껄껄 웃으며 그녀와도 건배했다.
“아무렴. 서진이 이 녀석, 실력도 뛰어난데 든든한 빽도 많아서 사업하는데 별 무리 없을 거요. 그러니 안심하고 이 놈 잘 보살펴줘요.”
“네, 교수님.”
싹싹하고 사교성이 제법 뛰어난 박수진은 연구생들은 물론이고, 박효산 교수와도 금방 친해졌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간이 개소식이 어느새 끝났다.
“벤처 시작했으니 이제 랩에서 더 자주 볼 수 있겠구나.”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정태, 너도 서진이 잘 돌봐주고.”
“예, 교수님.”
내일 출근을 위해 박수진이 제일 먼저 귀가했고, 그 다음으로 박효산 교수 일행이 돌아갔다.
하정태만 남자 한서진은 쑥스럽게 말했다.
“제가 말할 때까지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건 걱정 마.”
“선배님한테도 시간 지나면 차차 말씀드리려 했는데, 너무 어이없게 들켰네요.”
“난 네가 비글 단독 개발자인 걸 알고 있으니까. 네 실력과 개발 이력을 몰랐으면 나도 전혀 눈치 못 챘겠지. 교수님은 아직 모르시지?”
“네, 정 팀장님이 비글 개발 주도하신 줄 알아요.”
“그래도 눈치가 빠르신 분이라…… 아무튼 안 들키려면 조심 좀 해야 할 거다. 근데 숨길 이유가 있어?”
“그냥 주변이 시끄러워질까 봐 그래요. 솔직히 교수님 술 드시면 술술 비밀을 부시는 타입이시라…….”
하정태는 인정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건 그래.”
“아무튼 오늘 즐거웠습니다. 내일 봬요.”
“그래, 내일 보자.”
하정태까지 돌아가고, 한서진은 사무소에 혼자 남았다.
대강 정리된 빈 사무소를 둘러보던 한서진은 왠지 모르게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진정한 내 회사라는 느낌이랄까?
SJ인더스트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정지원과 칼 루이스가 했기에, 지분 85%를 갖고 있어도 내 회사라는 애착감은 사실 크게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무소는 위치부터 임대계약, 사무집기 구매까지 모두 자신이 해서 그런지, 작긴 해도 완전한 내 소유라는 느낌이 들었다.
「딩동.」
그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벨을 눌렀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 야심한 시간에 누가? 설마 아까 뭐 놓고 간 사람이 있었나?
문을 연 한서진은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굳어버렸다.
놀랍게도 그는 백철중 회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왜 초대 안 했나?”
============================ 작품 후기 ============================
어제는 정말 살인적인 일정이었습니다.
리미트리스 드림 2편을 쓰고, 녹색동네 마감을 하느라 또 2편을 쓰고, 리미트리스 드림 표지 시안 피드백 작업을 하고, 이제 좀 살겠다 싶었는데 나귀족 이북 교정 작업이 또 남아 있었어요...
죽은 듯이 자다가 오늘 아침에 겨우 리미트리스 드림 한 편 쓰고 다시 잤다가 지금 또 일어나서 씁니다.
... 0시가 다가오는 게 무서워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