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독립과 창업 =========================================================================
“과장님, 그거 들으셨어요? 한서진 사원, 독립한대요.”
“뭐야, 퇴사하나? 아니, 왜?”
“퇴사가 아니고 독립이요, 독립.”
“그게 그거 아니야?”
배 나온 상사가 천연덕스럽게 되묻자 여직원은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참, 퇴사가 아니라니까요. 독립한대요, 독립. 회사에서 한서진 사원이 자기 사업할 수 있게끔 지원해 주나 봐요. 범H그룹으로 편입시키는 거죠.”
“와, 정말?”
상사의 얼굴에 부러움이 깃들었다. 그는 금방 납득했다는 듯이 혼자 끄덕거렸다.
“하긴, 회장님이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인재인데 퇴사가 가당키나 한가.”
한서진이 퇴사, 아니 독립한다는 소문은 금세 회사 전체에 쫙 퍼졌다. 직원들은 둘만 모이면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설계 연구소 같은 거 하나 차려서 독립하려나 봐. 회사에서 크게 지원해주기로 했고.”
“와, 그럼 나중에 범그룹계열사로 우뚝 성장할 수도 있겠네.”
“그렇지. 이참에 그룹에서 한서진 사원을 사장급으로 키우려나 본데? 사실 한서진 사원이 아직 어리니까 이것저것 많이 경험시키려나 보지.”
“아마 올해로 25이었지?”
남자 직원은 수긍된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아직 어리고 또 대학생이니까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지. 그럼 일종의 사내 벤처인가? 아니, 독립을 하니까 사외벤처라고 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간에 한서진 사원은 출세길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네. 부럽다, 부러워.”
“슈나우저 때문에 직원 감축한다 어쩐다 어려운데, 잘 나가는 사람은 여전히 잘 나가는구나.”
일부는 더러 질시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동경과 부러움으로 한서진의 독립을 축하했다.
그들에게 한서진은 애초에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는 사람이었고, 이번에 그것을 톡톡히 확인한 것이다.
한국대 반도체공학부 수석 입학으로 회사의 이름을 빛낸 사람. 최고 명문대를 졸업할 예정인 그에게 기존의 자리는 너무 작았을 것이다. 그러니 회사 차원에서 그를 큰 사람으로 키워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밀어주는 것이리라.
“회사를 위해 더 큰 일을 할 사람인데, 아무렴.”
한서진은 은근히 백철중 회장이 다시 연락을 하지 않을까 궁금해 했다. 자신이 독립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철중 회장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런 은근한 기대를 품은 게 혼자 멋쩍을 만큼.
‘하긴, 회장님이 보기에 나는 흔해빠진 한국대 출신 직원일 뿐이니까.’
은근한 자부심을 품은 게 혼자 민망해졌다.
그룹 총수에게 자신은 수많은 부품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리라. 백철중 회장이 자신 같은 젊은이를 좋아한다고 했어도, 그 말을 설마 자신에게만 했겠는가.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인재를 만나봤을 텐데, 자신만이 특별히 보이지는 않으리라. 비록 한국대 입학으로 회사의 이름을 빛냈다 하여도.
‘안 그래도 슈나우저 때문에 정신없을 테니, 뭐.’
퇴사가 눈앞에 다가오자 한서진은 기존 업무에서 모든 손을 떼고 자리를 정리했다.
동료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여어, 한서진 씨. 분가한다며? 축하해.”
“공장 나가도 자주 보겠는데.”
“박효산 교수님 연구실하고 협동한다고 했지? 직원은 좀 구했나?”
“벤처가 결코 쉬운 게 아닌데, 회사에서 지원해주니까 무리 없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동료 직원들은 그가 회사 지원을 받아 사외 벤처를 차리며 독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서진은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최대한 모양새 좋게 나간 뒤, 서서히 거리를 두면 그만이다. 백세완도 마스코트인 그가 퇴사하는 건 모양새가 나쁘다는 점을 신경 쓰지, 그가 차릴 설계사무소의 역량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한서진은 하정태 이하 옛 설계2팀을 찾아갔다. 그들도 이미 독립 소식을 알고 있었다.
“축하해. 독립한다며?”
“근데 솔직히 부럽진 않다. 이 좋은 자리 놔두고 왜 독립하는 건데?”
“나가서도 잘 해라. 너는 뭐 어디 가서도 잘 해내겠지만. 설계의 천재잖아.”
김경규와 최지석의 축하에 이어, 마지막으로 하정태가 반 농담 반 진담으로 말했다.
김경규가 팔짱을 끼며 신중한 척 표정을 지었다.
“차대웅 팀장이야 회사와 대판 싸우고 나간 거라 인생 말아먹었지만…… 너는 모양새 좋게 나가는 거니까 큰일 없겠네. 오히려 나중 되면 회사에서 너 키워준다고 이것저것 밀어줄지도.”
“글쎄요. 그건 아닐 걸요. 저, 원래는 그냥 퇴사하려고 한 건데 백세완 실장님이 그건 모양새가 안 좋다고 필사적으로 만류하셔서 이렇게 된 거예요.”
“아, 그래?”
“네. 아마 실질적으로 회사와 교류할 일은 별로 없을 겁니다. 백세완 실장님도 박효산 교수님 연구실과 산학협동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으시고, 저는 일종의 중개자 같은 거죠.”
“흠.”
최지석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을 알고 나니 한서진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김경규가 말했다.
“그래도 모양새 좋게 나가는 거니까 별 탈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너, 박효산 교수님 연구실과 계속 함께 할 거잖아?”
“그건 그렇죠.”
“뭐, 그럼 별 일 없겠네.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회사에서 널 키워주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크게 홀대하지도 않을 테니까. 진짜 모양새 좋게 퇴사하는 거구나.”
“그래서 말인데요…….”
한서진이 말을 흐리자 세 명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실은 저 혼자 일 하려니까 엄두가 안 나서요. 혹시 저랑 같이 나가실 분 계세요?”
“너, 지금 우리한테 스카웃 제의하는 거야?”
“백 실장이 알고는 있어?”
하정태와 최지석의 어조는 각각 달랐다. 하정태는 신중하게 반문했지만, 최지석은 큰일 날 소리를 한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연히 알고 계시죠.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옛 설계2팀은 얼마든지 함께 해도 된대요.”
“너무하네요. 백 실장한테 우리는 그 정도밖에 안 됐어.”
김경규가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고, 최지석은 눈을 가볍게 찡그렸으며, 하정태는 여전히 신중했다.
“구체적으로 네가 차리려는 회사 업종이 뭔데?”
“회사까진 아니고요, 그냥 반도체 설계 컨설팅 관련 일을 하는 사무소를 차리려고 해요. 세 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그쪽으로 재능이 좀 있는 것 같잖아요.”
“재능이야 넘쳐흘러서 문제지. 천재잖아.”
김경규가 맞장구를 치듯이 말했다. 최지석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고, 하정태는 여전히 진중한 안색이었다.
최지석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비글 개발자니까 네 실력이야 두말할 나위 없지만…… 사업이라는 게 재능과 실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특히 한국에서는 성공하기 어려워.”
“회사가 도와준다잖아요.”
김경규가 말했지만 최지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나중에 서진이 열풍도 좀 시들해지고 나면 회사 지원도 시들시들할 걸? 홀대하지는 않겠지만 팍팍 밀어줄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야.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기대는 접어두는 게 나아.”
“구체적으로 생각해둔 방향은? 어느 시장을 공략할 거야?”
이중 최고선임이자, 같은 한국대 출신인 하정태가 생각을 정리한 듯이 그렇게 물었다. 한서진은 당당히 대답했다.
“미국이요.”
“…….”
“…….”
“…….”
세 사람은 일제히 침묵했다.
최지석이 제일 먼저 짧게 대답했다.
“미안하다. 난 함께 못하겠는데.”
“네?”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그래도 서진이 네가 하는 일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컸어. 근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뭐가요?”
옆에서 김경규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나섰다.
“뭐긴, 왜 하필 미국이냐고.”
“미국이 어때서요?”
“미국이 어때서가 아니라, 한국에 설계 컨설팅 조그맣게 차려놓고 미국 시장을 노린다는 건 너무 허황되잖아. 차라리 한국 시장부터 차근차근 공략을 한다던가, 아니면 아예 모험심 발휘해서 미국으로 건너가면 몰라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한서진은 자세히 설명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면의 뭔가가 순간적으로 제지시킨 것이다.
‘그런 게 아닌데…….’
부족한 설명 덕에 그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모한 사업을 벌인다고 말이다.
충분히 오해할 법하다. 기껏 회사에서 독립해서 설계 컨설팅을 한다 해놓고, 미국 시장을 생각하고 있다니.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허황되어 보일 수 있다.
재능은 넘치지만 사업적인 시야는 너무 부족하다.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씁쓸하네.’
좋지 않은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이상한 것은 더 이상 그들을 설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뭐랄까, 갑자기 내키지 않아졌다고 할까.
“월급은 얼마나 줄 거냐?”
그때였다. 하정태가 불쑥 물었다.
한서진은 놀라서 그를 바라봤고, 다른 둘도 살짝 어이없다는 눈으로 돌아봤다.
“선배님? 설마 나가시려고요?”
“선배님, 곧 결혼하시잖아요. 그런데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 치고 나가면 어떡합니까?”
“안정? 그런 게 어딨냐. 슈나우저 때문에 지금 인력 감축을 하네 마네 하는 판국에. 니들이 보기에는 이게 일시적인 현상 같냐?”
“…….”
“안 그래도 나도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 단지 길이 없어서 여태 안주했을 뿐이지. 한서진, 나 월급 얼마나 줄 수 있냐?”
하정태 이분, 이런 박력을 감추고 있었나? 한서진은 얼떨떨해서 대답했다.
“그, 그게 저도 당장 많이는 못 드려요. 어쩌면 한동안은 매출이 0원일 수도…….”
“사천, 나도 그 이하는 힘들어. 나 비글 덕분에 3배 인상되기 전에도 억대 연봉 받던 거 알지?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사천에 부리는 거 엄청 봉 잡는 거야.”
“사천, 좋아요. 그 정도는 제 포르쉐를 팔아서라도 해드려야죠.”
맑은 물로 가슴을 씻어 내리는 듯한 상쾌함이다. 한서진은 밝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하정태도 미소를 머금으며 악수했다.
김경규가 그걸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보기 좋은 모습이네. 나도 참…… 그냥 확?”
“서진아, 미안하다. 난 그냥 안전한 월급쟁이나 할래. 안 그래도 지금 집 대출금 때문에…….”
“아니요, 괜찮습니다.”
최지석은 미안하다는 듯이 거듭 사과했고, 김경규는 망설임 끝에 회사에 남기로 했다. 하정태만 한서진을 따라서 나가기로 한 것이다.
김경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대 동문끼리 사이좋은 모습, 보기 좋네요. 나도 서진이가 연체대 다녔으면 따라갔을지도 모르겠네.”
“말이 되는 소리를. 서진이가 연체대 밖에 못 갈 정도로 머리 나쁜 애로 보이냐?”
“윽, 선배님. 너무 하십니다. 그래도 나름 일류 명문대라고요!”
“한국대 앞에서 어디서 까불어.”
악의는 없는 농담, 넷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최지석은 여전히 미안한 얼굴을 한 채 손을 내밀었다.
“밖에 나가서도 잘 해라. 선배님도 잘 부탁하고. 혹시 전에 갈굼 받은 것 때문에 앙심 품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풀어도 돼. 이제는 네가 상사잖아.”
“서진아, 학교 가면 내가 선배다. 그건 잊지 말자.”
“학번 족보보다 우월한 게 사내 족보입니다, 선배님.”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최지석, 김경규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가 왜 죄송해?”
“나중에 왜 멱살 잡아끌고 데려나오지 않았냐고 분명히 저 크게 원망하실 테니까요.”
“……아, 저 말 들으니까 또 흔들리는데.”
김경규가 익살스럽게 말했고, 한서진은 실소했다.
하정태는 그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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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시급 10억의 꿀직장을 발로 차버린 두 명을 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