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72화 (72/609)

00072  독립과 창업  =========================================================================

「수고했네.」

정지원한테 이야기를 전달했다는 말을 전하자 백철중은 가볍게 수고했다고 치하했다.

「반응은 어떤가?」

“크게 내키지는 않는 듯이 보였습니다. 저로서는 이제…….”

「이제 나에게 달린 거지. 고맙네.」

백철중 회장한테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다른 사원이었으면 가슴 떨리게 기뻐했으리라.

하지만 한서진은 덤덤했다. 오히려 민망한 입장이었다. 백철중 회장의 고민, 슈나우저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송하나, 그 여자는…….’

한서진은 전화를 끊으며 고민했다.

통찰안은 그녀에게서 다른 여자와 다른 무엇을 본 걸까. 그 점을 확인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평범한 설계 직원이 재벌 총수의 막내딸에게 접근한다?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SJ인더스트리의 오너라는 걸 밝히면 자칫 정략혼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고.

‘그냥 단념해야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송하나 말고도 부적합 외 다른 결과가 뜨는 여자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한서진은 그렇게 기대하기로 했다.

날렵한 포르쉐가 천천히 달려와 주차 라인에 섰다. 차문을 열고 내릴 때마다 느끼는 건데, 안 그러는 척 하면서 흘끔거리는 시선이 있다는 것이다. 역시 선글라스를 쓰길 잘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오빠가 그 오빠야? 응, 우리 과 수석. 멋있다. 여자친구는 있을까? 눈 더럽게 높은 편이래. 저 오빠라면 그래도 되지.

대충 뭐 이런.

강의실에 들어서자 몇 몇 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알아본 이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오빠. 오셨어요?”

“어, 현석이는?”

“과 행사 때문에 오늘 강의 빠질 거예요. 공결이죠.”

“학생회장도 참 할 게 못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바빠.”

“오빠야말로 회사 다니면서 학교 되게 꼬박꼬박 나오시네요.”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꼬박꼬박 나오기 힘들지도 몰라.”

“네? 아니, 왜요? 회사에서 눈치 줘요?”

“회사 관둘지도 모르거든.”

여자애는 갸웃거렸다. 자기 기준으로는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회사 다닐 땐 학교 자주 나오면서, 회사 관두면 자주 못 나온다니요?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회사는 학교 다니는 걸 배려해주지만, 새로 들어갈 회사는 아마 그렇지 않을 거거든.”

“어머, 오빠. 이직하세요?”

여자애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아니, 그 좋은 회사를 왜?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기야 억대 연봉 쥐어주면서 학교 보내는 회사는 없을 테니까.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 아닌가.

한서진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직? 뭐, 비슷해.”

“어디, 어디 회사예요? H반도체보다 더 혜택 많이 준대요?”

“아직 이름은 안 정해졌어.”

“뭐야, 이직만 생각하고 회사는 안 정하신 거예요? 그럼 그냥 계속 다니시지.”

“그럴 사정이 있거든.”

정확히는 이직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차릴 거지만.

만약 회사를 차리면 매출이 0원인 기형적인 사무실 형태가 될 것이다. 반도체 설계를 하기 위한 작업실이 필요할 뿐이니까.

사업체등록을 하는 것도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일 뿐이다.

‘컴퓨터만 좋은 거 갖다 놓으면 되겠네.’

겸사겸사 무에서 반도체 설계를 창조하는 연습도 해야겠다. 지금까지는 기존에 존재하던 설계를 뜯어고치는 식으로 해왔으니.

‘설계 연습도 많이 해야겠어. 그나저나 직원은 어떻게 구한다? 이게 문제네.’

혼자서 다 할 생각은 없었다. 사무실 관리 및 기타 업무는 직원에게 다 시킬 생각이었다. 게다가 설계 보조 작업을 도와줄 반도체 설계 전문가도 두 명쯤은 있어야 했고.

문제는 그런 전문가들이 자신이 차릴 사업체에 오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뭘 믿고 매출이 0원인 회사에 입사하겠는가? 비전도 없고, 경력도 안 되는데.

‘월급을 많이 주면 될까?’

SJ인더스트리가 언제쯤 3억 불을 다 차감할까?

한서진은 강의 내내 설계 사무소를 차리는 문제를 구상했다. 그렇다 보니 강의 내용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설계2팀 분들을 쓰면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들은 자신이 비글의 개발자인 걸 알고 있으니, 보안 유지에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서열이 바뀐다는 점에서 조금 마음이 걸렸다. 그들이 순순히 이직을 결심할 것 같지도 않고.

‘일단 H반도체부터 정리해야겠다.’

마음을 굳힌 한서진은 오후에 회사에 출근한 뒤,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설계1팀장, 차대웅은 사직서를 흘끗 보고 물었다.

“왜?”

참 간결하고 쿨한 질문. 한서진은 준비했던 대답을 꺼냈다.

“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하는 건 힘들 것 같아서요.”

“창업이야?”

“네.”

“그 나이에 벌써 피자집이나 치킨집은 아닐 테고…… 설마 고기집이라도 하려고?”

“네?”

“아니었어? 그럼 무슨 창업인데? 아이템 들어보고 내가 사표 수리하든가 말든가 해줄게.”

이건 불필요한 간섭이 아닌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차대웅이 다시 말했다.

“망할 것 같은 사업이면 사표 찢어버리려고 그러지. 지금처럼 회사나 다니라고.”

“……아.”

“너 연봉이 2억 1천이더라? 요즘 세상에 그런 연봉 주는 회사가 어딨냐. 그리고 넌 우리 회사 마스코트 같은 존재라서 특별한 일 없으면 연봉 안 깎을 거다. 지금도 회사 일은 안 하고 학교나 다니고 있잖아? 이 좋은 꿀보직을 왜 자처해서 그만 둬?”

불필요한 간섭이 아니라, 나름대로 좋은 의도에서 배려를 해준 것이었구나. 한서진은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

“모두가 다 그렇게 말하지. 죄다 성공할 자신 있대. 그런데 우리나라 창업 성공률은 왜 그 모양이래?”

“저, 정말인데…….”

“네가 맥플에 스카웃돼서 간다는 거면 등 떠밀어서 내보내겠는데, 이 시기에 창업을 한다니 기가 차서 그런다.”

“…….”

“창업한다고 설치는 꼴 보면 한 1억 모은 모양인데, 그런 건 생각도 말고 회사나 얌전히 다녀. 지금 네 환경은 우리나라 직장인 중에서 단언컨대 넘버원이다. 너보다 더 편하고 안락하게 회사 다니는 놈 없다.”

차대웅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심해 보이는 그 태도가 살짝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심 신경을 써주고 있는 듯하다.

“죄송합니다. 수리해주세요.”

“허참……. 그 좋은 보직을 대체 왜.”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이거든요. 자신도 있고요.”

“진심이냐?”

“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물론입니다.”

“내가 왜 그때 차 팀장님 말을 처 안 듣고 객기를 부렸을까, 내가 죽일 놈이었어, 하고 한강으로 뛰어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알았다.”

그제야 차대웅은 사표를 자신의 책상 위에 턱 던져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남자가 결정을 했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오늘 안에 바로 상부에 제출하마.”

“예, 감사합니다.”

“나도 너 같은 시절이 있었지…….”

나지막하게 자조하는 한탄에 한서진은 괜히 묘한 기분이 들어서 얼른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나 사표 수리는 쉽지 않았다. 차대웅의 말처럼, 한서진은 현재 H반도체의 마스코트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오후 4시 경, 백세완이 직접 그를 찾아왔다.

“한서진 사원, 퇴사를 한다고?”

“예.”

한서진은 살짝 압도돼서 대답했다. 그만큼 백세완의 태도는 기백이 넘쳤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안 되네.”

“실장님.”

“안 되는 건 안 돼. 자네는 우리 회사 마스코트야. 우리 회사 직원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나 다름없네. 그런 자네가 회사를 그만두는 건 있을 수 없어.”

“…….”

“원하는 걸 말하게. 자네를 붙잡으려면 회사가 무얼 해야 하는가를.”

한서진은 문득 정지원의 말을 떠올렸다. 백세완이 미국까지 부렸다는 어깃장이 과연 어떤 것일까, 하고 잠시 궁금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아. 이 친구, 정말 사람 곤란하게 하는 게 있군.”

백세완은 이마를 짚었다. 불쾌해 보이지는 않으나, 사람을 은연중에 압박하는 듯한 느낌은 있었다.

이윽고 손을 내린 그가 똑바로 주시했다.

“차 실장한테 들었네. 창업을 생각한다고?”

“아, 예.”

“어떤 아이템인가? 설마 정말로 피자집이나 치킨집을 차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대략적으로라도 말해주게. 사내 벤처든 뭐든 그룹 차원에서 지원을 해주지.”

“예?”

한서진은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설마 이런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백세완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회사를 관두면 끝나겠지만, 우리한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자네 덕분에 누린 홍보 효과가 얼만데, 이렇게 자네가 그만 두면 회사 입장이 뭐가 되겠나? 다른 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

“차라리 당당하게 그룹으로부터 분가하는 형태로 갔으면 하네. 꼭 H반도체의 이름을 내걸지 않아도 좋아. 아이가 성장해서 결혼하고 분가하듯, 자네도 그처럼 그룹으로부터 분가하는 형태로 가잔 말이야.”

한서진은 그의 뜻을 이해했다.

이를테면 무단가출은 안 된다는 것인가. 자식 잘 키웠다고 인망이 자자했었는데, 명예에 먹칠을 하는 셈이니까? 그러니 모양 좋게 분가를 하라?

“하지만 저는 굳이 지원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자본이 거의 필요하지 않아서요.”

“수익 배분이라면 염려할 것 없네. 사업체 지분은 자네가 독식해도 좋아. 내 말은, 회사의 지원으로 성공해서 당당하게 자리 잡는 모습을 보여 달란 말일세. 그래야 다른 직원들도 자네를 보고 동경과 희망을 품지 않겠나?”

한서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마스코트 역할을 맡았으면, 끝까지 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래야 할 의리가 있을까.

자신이 비글, 슈나우저의 개발자라는 걸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다. 이쯤에서 H반도체와는 인연을 정리해야 나중에 모양새가 덜 나빠진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까. 어떻게 거리를 둬야 할까.

머릿속으로 생각이 복잡한 그때, 한서진은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실장님 말씀은, 당당한 분가 형태로 회사를 나가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그렇지. 모양새를 신경 써 달란 말이야.”

“음…… 아시겠지만 제가 한국대학교에서 박효산 교수님의 랩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그건 알고 있네.”

“실은 제가 하려는 사업이 랩의 연구 활동을 외부에서 보조하기 위한 사무소 같은 곳입니다.”

“호오.”

백세완의 눈빛이 흥미로 물들었다. 한서진은 말을 계속했다.

“주 업무는 반도체 관련 설계의 실무를 연구소로부터 용역 받아서 하는 형태가 될 겁니다. 그래서 박효산 교수님의 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거고요.”

“가만, 자네는 그럼 혹시 회사가 박효산 교수님의 연구실을 지원해달라는 건가?”

“네.”

백세완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며 웃었다.

“좋아, 그거 아주 좋아! 박효산 교수님은 내 은사이기도 하시니 남들이 보기에 아주 모양이 좋겠어. 안 그래도 그동안 진성전자 쪽하고만 협업을 하셔서 제자로서 내심 서운했는데, 이 기회에 진성전자 녀석들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고. 이야, 자네 생각하는 게 아주 기발하군. 나중에 경영을 해도 되겠어. 계열사 하나는 거뜬히 이끌어 나가겠는데?”

“감사합니다.”

“알았네. 내가 곧바로 상부에 보고해서 박효산 교수님의 랩과 산학 활동을 추진하지. 자네가 랩과 회사의 중개자가 되어주게.”

“예, 박효산 교수님도 아마 좋아하실 겁니다.”

요약하자면, 한서진과 H반도체가 박효산 연구실을 통해 한 다리 건너서 연결되는 식이다. 한서진으로서는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어서 좋았고, H반도체는 애지중지하는 마스코트 직원을 훌륭히 분가, 독립시켜서 모양새가 나서 좋았다.

더불어 박효산 교수 연구실과 산학협동도 할 수 있고.

백세완은 만족스러운지 계속 웃었다. 한서진은 적당히 눈치를 봐서 말을 꺼냈다.

“그리고…… 기존 설계2팀원들 말입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 걱정하지 말고 그 친구들도 함께 데려가게.”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쪼렙존..... 여기서 죽치고 노는 거 생각보다 재밌어요.

다들 인정하시잖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