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독립과 창업 =========================================================================
슈나우저 천하가 열렸다.
컴퓨터 시장은 슈나우저를 중심으로 뒤흔들렸다. 고가 PC에는 무조건 슈나우저가 장착되어야 했고, 저가형 PC에서나 싼 맛에 기존 CPU를 갖다 썼다.
저가형은 기존 CPU, 그 외는 모두 슈나우저. 이렇게 천하가 이분되고 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저가 시장에서는 기존의 CPU 제조사, ‘아몬드’가 활개를 쳤다. 윈텔은 저가 CPU 모델 라인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가격을 떨어뜨리며 시장 진입을 꾀했지만, 이미 아몬드는 작정하고 저가 시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게다가 저가 시장의 규모는 크게 줄어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연 슈나우저를 선호했지, 기존 CPU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 CPU를 원한 소비자들은 새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거나, 혹은 정말로 싼 맛을 추구하는 이들이었다.
대폭 감소한 저가 시장을 놓고 아몬드와 윈텔은 치고 박으며 혈전을 벌였다.
한편 은행 등 대형 금융기관들은 매일같이 Z7의 다운그레이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해왔다. 니트론 교수의 학술 세미나와 함께 선보인 성능이 그들의 구매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노벨 수상자가 신뢰하는 수퍼컴퓨터! 비전문가들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마케팅 문구가 없을 것이다.
「Z7은 아직 완전하지 않아.」
정지원의 설명이었다. IBM이 들었으면 배부른 것들이 투정한다고 펄쩍 뛰었겠지만,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하드웨어는 거의 완벽한데, 소프트웨어가 문제지.」
“이참에 제가 소프트웨어도 한 번 공부할까요?”
「그래주면 더 좋지.」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물론 농담이었다.
‘해볼 순 있겠지만…… 그거 할 시간에 반도체나 더 파고들자. 에테르와 미스릴을 다루려면 그게 낫지.’
프로그래밍, 못할 건 없지만 효율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럴 시간에 에테르 규명을 파고드는 게 낫다.
「유닉스와 마이크로소프트, 심지어 IBM까지 Z7의 OS 설계를 맡고 싶어 해.」
“IBM도요? 아니, 걔네는 왜요?”
한서진에게는 조금 의외인 소식이었다. IBM은 슈나우저로 제법 큰 타격을 입었을 텐데?
「우리가 IBM에 직접 칼을 들이댄 건 아니니까. 사실 우린 시스템 반도체 제조 회사지, 컴퓨터 제조 회사는 아니잖아? 오히려 IBM과는 앞으로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거야. 사실 IBM은 지금 슈나우저의 가장 큰 고객이기도 해.」
“그런가요? 몰랐어요.”
「물론 토니가 IBM에 이를 갈고 있어서, IBM은 당분간 고행을 겪어야 할 거야. 결국에는 협력을 하더라도, 토니를 홀대한 값은 톡톡히 치러야 할걸.」
“천하의 IBM이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군요.”
「그래, 네가 만든 슈나우저 덕분이지.」
차분한 그의 음색은 묘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주었다.
「넌 지금 세계를 움직이고 있어.」
“……아하하.”
낯이 간지러웠다. 전화로 들었기 망정이지 만약 눈앞에서 직접 들었다면 그 쪽팔림을 감당 못할 것 같았다.
“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백철중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말해 봐.」
어느 정도 직감했는지 정지원은 잠시 숨을 고른 뒤에 그렇게 말했다. 한서진은 백철중 회장과 소주를 대작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했다. 물론 송하나를 봤다는 건 뺐다.
다 듣고 난 뒤 정지원이 물었다.
「너는 어떡하고 싶은 건데?」
“잘 모르겠어요.”
「어떡하는 게 좋을지를 잘 모르겠다는 뜻이야?」
“아니오, 백철중 회장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가요.”
「너한테는 그게 중요하냐?」
“…….”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어차피 사람의 진심은 알 수가 없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
“그건 그래요.”
「비즈니스는 냉정해야 해. 백철중 회장이 진정성 있게 비글에 관한 것을 사죄하고, SJ인더스트리와 긍정적인 관계를 쌓고 싶다면 받아줘도 괜찮겠지. 물론 네가 그걸 원한다는 전제 하에.」
“팀장님이 보기에 H반도체는 어떻죠?”
「……파운더리 능력으로는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지.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사실이야. 우리 회사의 생산 속도가 벅찬 것은 사실이고, 실은 H반도체에 생산 하청을 맡기는 걸 고려하고 있었어.」
듣자하니 과거형이다. 한서진은 갸웃거리며 물었다.
“고려만 했다는 건가요?”
「백세완 실장이 찾아와서 어깃장을 놓더군.」
“……아.”
「그래서 여기 자체적으로는 H반도체에 맡기지 않기로 잠정 결정을 했어. 우리를 우습게 보는 놈들한테 호의를 베풀 이유는 없지. 그게 비록 백세완 실장의 개인적인 뜻이었다고 해도.」
“친구 사이라고 하셨으면서도 냉정하시네요.”
「친구는 친구고, 사업은 사업이야. 넌 내가 우정에 흔들리면서 일을 하기를 바라냐?」
한서진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요. 냉정히 일처리 하시는 게 오히려 마음에 드는데요. 신뢰도 가고요.”
「물론 그건 백세완 때문에 내가 내린 결론이고, 너는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 그리고 네 생각이 더 중요하지.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제 생각이라…….”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과연 H반도체에 생산 하청을 주는 게 괜찮은 걸까?
‘송하나…….’
처음으로 ‘부적합’이 뜨지 않은 여자, 송하나. 그녀가 자꾸 생각난다.
첫눈에 반했다는 것과는 달랐다. 통찰안이 처음으로 다른 결과를 보여주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왜 그녀에게만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을까. 그녀에게는 다른 여자들한테 없는 특별한 점이 있는 걸까?
‘설마 통찰안 이놈, 나보고 그 여자랑 사귀라는 것은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한숨이 나온다. 재벌 총수가 애지중지하는 막내딸을 무슨 재주로?
‘SJ인더스트리를 내세우면 가능하겠지만…….’
슈나우저의 주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백철중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슬쩍 들었지만, 한서진은 곧바로 접었다.
‘그랬다가 정말로 떠밀리듯이 결혼이라도 해버리면 어쩌라고. 난 그 여자가 좋은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할 뿐인데.’
왜 통찰안은 그녀에게만 다른 결과를 보여줄까. 그 이유는 도대체 뭘까. 한서진은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정지원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백철중 회장님은 어떤 분이죠?”
「……재벌 총수 중에서는 그나마 낫지.」
“그나마, 로군요.”
「H반도체는 국내 동종업계에서 그나마 일반 직원 대우가 좋은 곳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재벌 기업인 건 변하지 않아. 차대웅 설계1팀장을 잊으면 곤란하지.」
차대웅, 획기적인 AP를 설계했으면서도 회사의 노예로 휘둘리며 살았던 사람. 그를 떠올리자 한서진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H반도체 일은 팀장님 뜻대로 하세요.”
「알겠다. 그리고…….」
“또 하실 말씀이 있나요?”
「구글이 모든 데이터센터를 슈나우저를 탑재한 네트워크 컴퓨터로 구축하고 싶어 해.」
“구글이요?”
한서진은 구글이란 이름에 살짝 놀랐다.
「일단 미국에 있는 6개 데이터센터부터 장비를 점차적으로 교체하고 싶어 해.」
“그럼 돈이 많이 들 텐데요. 제가 알기로는 데이터센터 설비들 아직 수명 많이 남지 않았어요?”
「걔네가 돈이 부족할 것 같아?」
한서진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자신이 괜한 것을 걱정했다.
「꼭 성능 차이 때문만은 아니야. 데이터센터는 디젤 발전기를 상시 가동해야 돼서 환경오염도 심하고, 그래서 구글도 여러 모로 곤란을 겪고 있어. 하지만 슈나우저는 소모 전력이 적고, 또 발열도 적어서 냉방에 들어가는 전력도 절약할 수 있지. 구글은 전력 소비량을 지금의 30% 이하로 낮출 수 있다고 견적을 낸 것 같아.」
“30% 이하면 괜찮네요. 이거 돈 좀 만지겠어요.”
「문제는 SJ인더스트리의 정체성이 반도체 제조 회사라는 거지. 컴퓨터 제조 회사가 아니야.」
실제로 TX인더스트리 시절에는 메인프레임 제조를 위해 다양한 공정설비가 있었지만, SJ인더스트리로 바뀐 이후에는 모든 라인을 반도체 제조 설비로 교체했다.
즉 Z7 같은 대형컴퓨터를 시제품으로 소량을 찍어낼 설비 정도는 있으나, 네트워크 컴퓨터 따위를 대량으로 제조할 생산라인은 갖추지 않은 것이다.
“슈나우저만 팔아주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구글은 완전한 서버 컴퓨터를 원하고 있어. 근데 걔네가 컴퓨터 제조 회사는 아니잖아.」
“그건 그래요.”
「매출도 그렇고, 또 구글이 선택했다는 상징성도 그렇고, 절대 거절해선 안 되는 계약이지. 그래서 다른 컴퓨터 제조사와 계약해서 전용 서버를 개발하려고 해. 근데 약간의 문제, 아니 아쉬운 점이 있어.」
정지원이 말을 흐리자 한서진은 다소 어리둥절했다. 잘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기존의 스토리지가 슈나우저에 비해 너무 성능 격차가 심하다는 거야. 못 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쉽지.」
“아하, 겨우 그거예요?”
「겨우라니, 구글이 지금 얼마나 아쉬워하고 있는데.」
스토리지는 저장장치를 말한다. 슈나우저는 종합연산장치지 데이터를 저장하는 전용 장치는 아니다. 물론 슈나우저 내부에 연산을 위한 메모리 장치가 있으나, 순수한 데이터 저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그 용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설마 저더러……?”
「1차 스토리지와 2차 스토리지의 장점만 묶은 새로운 저장용 반도체 개발은 어떨까? 이름은 코카 스패니얼이라고 하자.」
“……벌써 이름까지 정해두셨습니까.”
한서진은 맥이 빠진다는 듯이 웃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1차와 2차의 장점만 묶은 반도체?’
슈나우저라는 좋은 차를 만들었으면, 그 좋은 차에 어울리는 좋은 기름을 넣어주는 것은 인지상정. 그래야 더욱 좋은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서진은 알았다는 듯이 끄덕였다.
“좋아요, 한 번 노력해볼게요. 그런데 장담은 못해요.”
「H반도체 설비는 사용하지 마. 회사 내부에서는 어떤 구상도 남기지 말고.」
“걱정 마세요.”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그만 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H반도체에서 더 얻을 것도 없다고 본다.」
“음…… 사실 저도 생각해둔 게 있긴 해요.”
「뭔데?」
정지원의 목소리에 바짝 흥미가 깃들었다. 한서진은 그가 진지하게 달려들자 괜히 민망해졌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별 거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로 조그만 반도체 설계업체나 한 번 차려볼까 하고요.”
「거기에?」
“네. 설계는 제가 주도적으로 하고, 다른 직원들은 조금씩 보조하는 것 정도만 하게 하려고요.”
「설마 한국에서 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냥 설계만 여기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결과물은 SJ인더스트리에 보내서 생산하고요. 제 일이야 어차피 설계만 하는 건데 미국에서 하나 한국에서 하나 별 차이 없잖아요. 보안만 잘 유지하면.”
「그렇지. 난 또 따로 설계 사업을 한다는 줄 알았다.」
정지원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SJ인더스트리는 어차피 저 없어도 잘 굴러가고, 저는 설계 능력 밖에 없는데 그건 미국에서 하나 한국에서 하나 똑같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작업실만 거기에 만들겠다는 거구나.」
“네, 여기서 학교도 다녀야 하고요. 동생도 여기에 있어서요.”
「하긴, 한국이 너처럼 돈 많으면 살기에는 좋지. 큰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안 좋지만. 여기저기 다 뜯겨서.」
“윽, 저 돈 없습니다. 요즘 엄청 가난해요.”
잠시 침묵하던 정지원은 차분히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 작품 후기 ============================
"돈을 많이 벌면 한국을 떠서 미국 갈 거야."
-돈 많으면 정작 정말 살기 편한 나라.
"좋은 기술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걸로 돈을 벌 수가 없어. 어쩌지?"
-미국 가서 벌어.
그래서 사업은 미국에서 벌이고, 거주는 생활하기 좋은 한국에서 합니다.
이런 게 실탄식 게이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