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소개팅 =========================================================================
백세완의 눈빛이 미칠 듯이 흔들렸다.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동요였다. 미국 시민권자란 일침이 그의 가면을 와장창 깨부수고 만 것이다.
“너…… 그게 무슨 의미야?”
“해석은 너 좋을 대로 해.”
“지원아.”
“말해. 듣고 있어.”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의 냉정한 눈빛. 백세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눈시울이 분노로 희미하게 붉어졌다.
마치 자신이 알던 정지원이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저런 눈빛으로 날 바라본 적이 없던 친구인데.
“너…… 다른 사람 같다. 변했구나.”
“난 원래 이랬다. 너만 몰랐을 뿐이지.”
“…….”
백세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은 이제 미국 시민권자라는 말.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고, 분명했다. H그룹의 힘으로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을 거라는 경고였다.
H그룹이 아무리 한국을 쥐락펴락 한다고 하나, 미국 입장에서는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나 다름없다. 겨우 국적을 바꾼 것만으로도 손을 쓸 수 없게 돼버렸다.
백세완은 한참을 침묵한 끝에 겨우 할 말을 꺼냈다.
“비글 때문에 네가 서운함이 어지간히 컸나 보구나.”
“서운했지. 많이 서운했지.”
“비글이 슈나우저의 다운그레이드라는 건 알고 있다. 비글을 먼저 내놓고 회사 반응을 떠본 거지? 그래서 만족스럽지 않자 슈나우저 들고 미국에 온 거냐?”
“다운그레이드?”
정지원은 잠시 갸웃거리다가 픽 웃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다운그레이드라…….”
“내 식견이 부족했다. 모두 내 잘못이다. 그러니 회사에 한 번만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친구로서 부탁한다.”
백세완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를 아는 이들이 봤다면 놀라워했으리라. 재벌가의 일족으로서 언제나 오만했던 그가 정지원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그만큼 급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겠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정지원에게는 큰 상관은 없었다.
“세완아,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지원아.”
“그런데 말이야. 넌 비글을 후려친 걸 먼저 사과하고, 그리고 H반도체의 우수한 생산능력을 무기로 이용해서 다른 어떤 파운더리보다 너희가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식으로 나왔어야 했어. 산업스파이니, 한국에 평생 안 올 거냐니 하지 말고.”
“미안하다. 내가 너무…….”
“막 나갔다. 인정하지?”
“…….”
백세완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표정의 평온함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힘을 줘야 했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가는 낯면이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아서, 필사적으로 호흡을 다스려야만 했다.
“너무 인기가 좋아서, 우리 공정라인의 생산능력이 딸린 건 사실이야. 그래서 여러 파운더리 업체를 검토 중이었지. H반도체는 내가 일한 곳이니만큼 누구보다 그 장점을 잘 알고 있었고. 대량 생산 능력, 신속함, 그리고 낮은 인건비까지, 그래서 나름대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헌데 지금 네가 하는 걸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빛이다. 한 번도 그에게서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건만.
“비즈니스에 감정을 섞지는 않으려 했는데…… 안 되겠구나.”
“지원아. 그건…….”
“기왕 미국에 왔으니 천천히 즐기다가 가라. 좋은 대답을 못해줘서, 친구로서 미안하다.”
‘친구로서’ 미안하다는 것. 그 말에 담긴 단호함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백철중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얼마든지 보상해주겠네. 그래야 같은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할 자격을 얻을 것 아닌가.”
“얼마를 부르던 간에 말입니까?”
“물론. 정지원 팀장, 그 친구만 만족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회사를 팔아서라도 그 미안함을 갚아주겠네.”
호탕한 대답에 한서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진심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공수표를 남발하는 건지 읽을 수가 없었다.
‘통찰안이 독심술까지 되면 좋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혼자 픽 웃고 말았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욕심인가. 지금 수준만 해도 세상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능력인데.
“제가 장담을 드리기는 곤란하지만, 비글 개발자한테 분명히 회장님의 뜻을 전달해 놓겠습니다.”
“꼭 부탁하네. 우리 회사가 살 길은 그것 밖에 없어.”
“어떤 건지 제가 여쭤 봐도…….”
“내, 자네에게 솔직히 말하지. 정지원 팀장, 그 친구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하네. 그리고 슈나우저의 위탁생산을 반드시 따낼 생각일세. 그것만이 우리 회사가 살 길이야.”
미묘한 거북함이 가슴을 맴돌았다. 조금 망설이던 한서진은 용기를 내어 그 거북함의 정체를 확인했다.
“만약 슈나우저가 나오지 않았다면, 회장님은 비글 건은 그냥 대충 넘어가셨을까요?”
큰 무게가 담긴 질문이었다. 백철중 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름에 섞인 망설임이 그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인다는 것. 한서진은 그 머뭇거림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예감을 받았다.
“……인정하지. 아마도 그랬을 것 같네.”
“솔직하시군요.”
“다 내려놓고 솔직해지기로 했네. 이제 와서 작은 가식을 떨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새 눈을 뜬 백철중 회장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기업이란 냉정하니까. 분명히 그랬을 걸세. 자네 말대로, 슈나우저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을 지경이 되니까 무거운 엉덩이 들고 사죄하겠다고, 수습해보겠다고 난리를 치는 거지.”
“무시무시한데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혹독한 짓도 참 많이 했네. 30대 재벌들을 보게, 깨끗한 놈이 하나도 없을 게야.”
“…….”
“그걸 면죄부 삼겠다는 게 아닐세. 어찌 되었든 비글은 우리 회사가 저지른 큰 잘못이고, 그걸 사죄하고 배상하려 하네. 그래서 SJ인더스트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네. 그 뜻은 분명하니, 자네가 정지원이 그 친구한테 잘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정지원은 과연 뭐라고 말을 할까. 비글을 들먹이며 냉정히 잘라낼까, 아니면 실리를 따져 손을 내밀까.
H반도체에 직접 근무하고 있기에 회사의 탁월한 생산능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H반도체는 파운더리 분야로만 치면 세계 1, 2위를 다투는 회사다. 그리고 SJ인더스트리는 지금도 공정라인이 부족해서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어떡해야 할까?’
한서진은 자신의 마음에 대고 물었다.
화해를 받아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러나 당장은 별 감흥이 없다. 슈나우저로 큰 타격을 입혔지만 그리 통쾌하지 않고, 그렇다고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마음도 크게 없다.
그저 무덤덤하다고 해야 할까.
“회장님, 여기 계셨네요.”
그때였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한서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참 찾았잖아요.”
차분하고 이지적인 느낌의 여자였다. 눈빛에서부터 기품이 흐른다고 해야 할까. 옅은 갈색 빛이 도는 긴 생머리에 백옥처럼 흰 피부. 170이 살짝 넘을 듯이 늘씬하고 큰 키에, 사정없이 발산하는 볼륨감.
마치 화보집에서 튀어나온 모델처럼, 화려하고 육감적인 느낌의 미인이었다. 거리를 걸으면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이 한 번 이상쯤 쳐다볼 것이다.
“오, 어쩐 일이냐.”
“결제를 안 해주셔서요. 비서실에 물어도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여기 계셨군요.”
“여긴 내 추억의 장소 아니냐. 너도 한 잔 할 테냐?”
“아니오, 전 괜찮아요.”
여자는 백철중 회장의 옆에 와서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압도당한다. 크고 늘씬한 키와 육감적인 바디라인, 그것은 매력적이기 이전에 남자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부수는 흉기였다.
“회장님. 이 분은…….”
“자네가 보기에는 우리가 무슨 사이 같나?”
백철중의 반문에 한서진은 살짝 패닉에 빠졌다. 이거 어떻게 대답해야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여자의 나이는 한눈에도 20초로 보인다. 그에 비해 백철중 회장은 겉보기에는 60 정도로 보일 만큼 정정하지만, 실제 나이는 70을 훌쩍 넘긴 고령이다.
게다가 여자가 그를 부르는 호칭도 ‘회장님’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 음. 잘 모르겠습니다. 막내 비서 같기도 하고…….”
“허허, 하나야. 들었니? 너보고 막내 비서 같단다.”
“의심한다는 거네요. 이상한 사이 아니냐고.”
“한서진 사원, 정말 그런가?”
“네?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한서진은 급히 당황했다. 사실 조금은 그런 불순한 의심이 있었다. 가지지 못한 게 없는 재벌 회장이 젊고 예쁜 세컨드를 거느리는 것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단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내 막내딸, 하나라고 하네. 어떤가, 예쁘지 않나?”
“예?”
한서진은 당황해서 반문했다. 막내딸이었어? 그런데 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런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었다.
“밖에서는 회장님이라고 불러요. 그게 입에 붙어서요.”
“그, 그러시군요. 저는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H반도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송하나라고 해요.”
송하나? 백하나가 아니라?
그런 낌새도 알아차렸는지,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바득바득 우겨서 자기 성을 붙여주셨어요. 백하나보다는 송하나가 더 이름이 예쁘다고.”
재벌가에서 그런 게 가능해? 한서진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나저나 나이 차이를 보면 한참 늦둥이인데, 재벌가에도 용케 그런 게 있구나 싶었다.
“회장님, 어서 일어나세요. 오늘 저녁에 엄마와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그랬었지. 가자꾸나. 한서진 군, 모쪼록 잘 부탁하네.”
“……부탁? 회장님이?”
그 말이 이상했는지, 송하나는 부축을 하다 말고 갸웃거렸다. 백철중 회장과 팔짱을 끼고 걷던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뭐하는 사람이지?’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서진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빛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별안간 가볍게 머리를 치는 듯한 통증과 함께 통찰안이 발동되었다. 시야가 휘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눈에 송하나가 지닌 진실이 떠올랐다.
그 진실이 너무나 황당해,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혼잣말을 했다.
“적합인 듯 적합 아닌…… 적합 같은 부적합? 이게 뭐야?”
통찰안이 미쳤나?
백세완은 돌아갔다.
혼자 남은 정지원은 그제야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백세완, 이 녀석…….’
스무 살 대학에서 만났을 때부터 사귄 친구다. 처음에는 재벌 일가인 걸 몰랐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백세완을 바라보는 것과,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친구, 친구라고…….’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백세완은 한 번도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친구로 자신을 여긴 적이 없을 것이다.
금수저를 갖고 태어난 그에게 친구란 관리해야 할 인맥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은 친구라는 정의에서 이탈된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에서는.
그래서 미련 없이 H반도체를 떠나 미국에 올 수 있었다. 아무 유감없이 옛 회사에 독이 묻은 비수를 찔러 넣을 수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친구라 생각한 적이 없기에, 자신 역시 소급해서 그를 친구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낮게 울리는 친구란 단어는, 공허하기만 했다.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친구야.”
============================ 작품 후기 ============================
1. 지분 관계에 관해서.
현재 기준으로 크렘 회장 10, 토니 제나인 5, 한서진 85입니다.(이 부분은 전편에서 수정을 했습니다)
칼 루이스가 크렘 회장을 찾아갔을 때는 설계도만 있고, 미국에서 특허 신청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설계도만 달랑 있는 상황이죠. 그런 상황에서 크렘 회장은 칼 루이스의 안목만 믿고 투자한 거고요.
이 과정에서 정지원과 칼 루이스가 서로의 대리인으로서 협상을 하다가 3억 불에 10%, 대신 크렘 회장이 투자금 3억 불을 충족하기 전까지는 배당 100%를 받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크렘 회장은 구두 협의가 끝나고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전, 그 자리에서 바로 돈을 쏴줬습니다.)
덕분에 정지원은 시간 낭비 없이 바로 TX인더스트리를 매입할 수 있었죠. 시간 절약 측면에서 이득을 봤습니다. 다른 투자자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 시간을 더 낭비했겠죠.
전개 과정의 선택지일 뿐이고, 선택지를 고르는 건 오롯한 저의 권한이니 양해해주셔야 합니다.
2.
자꾸 한서진을 미국 보내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그런 말을 볼 때마다 제가 스트레스 받습니다. 그만 하시면 좋겠네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저 역시 한국 사회의 불합리함에 평소 비판의식을 가진 사람이고, 재벌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러나 백철중 회장은 재벌이기 이전에 제가 창조한 캐릭터이고, 이 사람을 통해서 재벌을 미화한다거나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애초에 주인공과 한 배를 탈 사람이라고 제가 못을 박은 것도 아니고요.
작품이 선박이라면, 저는 선장이고 독자 여러분들은 승객분들입니다. 기분 좋은 항해가 되도록 친절하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배의 키에 자꾸 손을 대려 하시면 그 외 다른 모든 승객분들의 안락한 항해와 안전을 위해서 저는 냉정히 자를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길.
3.
안 그래도 빚투성이 인생이라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어요. 따뜻한 눈으로 격려해주세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