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소개팅 =========================================================================
“이게…… 사실인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실장님.”
단단한 눈매의 남자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백세완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래 전에 없어진 줄 알았던 편두통이 밀려왔다.
책상에 놓인 얇은 보고서 한 장.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까지 얇지는 않았다. H반도체, 어쩌면 그룹까지 뒤흔들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정지원 팀장, 그 친구가 SJ인더스트리 소유주의 대리인이라고?”
“직함은 이사지만 그렇게 보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SJ인더스트리의 지분은 페이퍼 컴퍼니가 보유하고 있어 실 소유자를 추적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확실하다고 봅니다.”
“휴양이 필요하다고 한 친구가, 알고 보니 슈나우저 반도체 제조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CPU 시장을 지배했던 비글의 개발자가 휴식을 핑계로 사직한 후, 지금은 슈나우저 제조사의 이사라고 한다. 누가 봐도 해석의 여지는 하나뿐이지 않은가.
산업 스파이. 그리고 이적.
“기술을 빼돌렸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설계2팀은 다른 부서에 비해 출입 보안이 그렇게 엄격한 편이 아닙니다. 제대로 마음만 먹는다면 USB 한 개 정도는 얼마든지 빼돌릴 수 있습니다.”
“정지원 팀장이 우리 회사 설비를 이용해 기술을 개발하고, 회사에 넘기기 아까워서 빼돌렸다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300억으로는 만족을 못한 건가…….”
백세완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작년, 300억에 비글을 넘겨받을 때만 해도 이제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지원이 이렇게 큰 칼을 몰래 갈고 있었을 줄이야.
‘어쩌면…….’
백세완은 문득 상상한 것을 입 밖에 꺼냈다.
“비글이 슈나우저의 다운그레이드일 가능성은?”
“연구개발팀에서 슈나우저를 비글과 비교해서 정밀 분석을 해봤습니다. 먼저 슈나우저의 특징은…….”
“짧게. 결론부터.”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세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자신을 능멸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남자는 근거를 설명했다.
“슈나우저와 비글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로를 정밀 분석한 결과 유사한 패턴을 가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더미 회로로 의심되는, 전자학적으로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패턴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반도체는 세상에서 딱 두 개 뿐이라고 하더군요.”
“슈나우저와 비글.”
“물론 슈나우저는 비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회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슈나우저의 일부를 가져와 다운그레이드 시켰다는 정황이 보인다고 합니다.”
“심증은 있다는 거군.”
“예, 다만 물증은…….”
“없겠지. 하지만 상관없네.”
백세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잘 계획한 범죄일수록 원래 물증이 없는 법일세.”
슈나우저는 날개 돋친 듯이, 아니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데스크톱, 노트북, 휴대용 패드, 스마트폰, 워크스테이션 등 가리지 않고 모두가 슈나우저를 원했다.
윈텔은 항복을 선언했다. 모든 하이엔드 모델의 공정라인을 멈춘 것이다. 아무리 가격을 낮추고 출혈 경쟁을 해봤자, 이미 성능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세 발 자전거와 페라리만큼의 성능 차이가 있는데, 어느 누가 페라리를 마다하고 자전거를 사겠는가. 애초에 사고자 하는 품목이 ‘자동차’가 아니라면 모를까.
그나마 다소 비싼 가격 덕분에 일부 저가형 모델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머지않아 세상은 슈나우저 반도체만을 쓰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심지어 윈텔도 그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3억불 까는 건 금방이겠습니다.”
칼 루이스는 늘어가는 잔고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지원도 웃음으로 받았다.
“크렘 회장님의 과감한 투자 덕분에 사업을 빨리 궤도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늘 감사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아닙니다. 회장님이야말로 SJ인더스트리의 폭풍 성장에 매우 만족하고 계십니다.”
크렘 회장.
월가의 큰손으로, 칼 루이스가 평소 친분을 쌓고 지낸 미국의 거부였다.
그는 칼 루이스가 좋은 투자처가 있다고 한 말에 두말 않고 흔쾌히 3억 달러의 투자금을 내어놓았다. 그런 거금을 내놓고도 10%의 지분을 갖는 것에 동의했다. 이때는 설계도만 있고, 아직 특허도 심사 중인 상태였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는 그만큼 칼 루이스와 비글 개발자의 야심작이라는 말을 믿었다.
단 크렘 회장이 3억 불을 충족할 때까지는 100%의 비율로 이익을 나누기로 했다. 그 이후에는 다시 지분대로 10:5:85%의 비율로 나눈다.
한서진 측은 10%의 지분을 내준 것은 아쉽지만, TX인더스트리를 빠르게 매입하여 바로 슈나우저를 출시할 수 있었다. 황금과도 같은 시간을 절약한 것이다.
그야말로 서로가 윈윈한,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SJ인더스트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니까요.”
정지원의 자신만만함에 칼 루이스는 웃었다.
처음 크렘 회장은 30% 이상의 지분을 원했다. 그것을 정지원이 10%로 딱 잘랐다. 대신 3억을 채울 때까지는 그에게 우선으로 이익을 배당하기로 한 것이다.
정지원의 차분한 설명과 설득에 칼 루이스는 더 이상의 고집을 부릴 수 없었고, 자칫 다른 투자자가 끼어들 것을 걱정한 크렘은 흔쾌히 10%에 동의했다.
“그런데 조금 의외이긴 합니다. 저야 성공보수로 크렘 회장님한테서 2%의 지분을 받을 예정입니다만…… 미스터 정은 지분은 단 0.1%도 갖고 있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과한 욕심은 부릴 생각 없습니다.”
“과한 욕심이라니요, 미스터 정이 미스터 한을 위해 한 일을 생각하면 5%의 지분을 받아도 될 자격이 있습니다. 한 번 그분에게 말씀을 해보시는 건?”
“제가 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분까지 탐낼 마음은 없습니다.”
“호오, 그런가요.”
칼 루이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정지원과 함께 일을 한 지도 어언 몇 달, 그는 정지원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끈기에 반했다.
또한 그는 명석했다. 미국 석학들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그런 인물이 고작 월급쟁이에 만족할 리가 없다. 아마도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테지. 칼 루이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더 큰 그림이라…… 과연 슈나우저보다 더 큰 그림이 있단 말인가?’
칼 루이스는 불현듯 얼마 전에 스탠포드에서 있었던, 니트론 교수와 한서진의 만남을 떠올렸다.
스코브리아늄과 한서진의 설계 능력. 그 둘을 하나로 엮으면 어떻게 될까, 하고 소름이 돋은 적이 있다.
‘이거, 아무래도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 것 같군.’
칼 루이스는 작게 피식거렸다. 정지원이 지분을 탐내지 않는 이유, 그리고 그가 그리는 큰 그림. 그 방향성이 무엇인지 언뜻 알 것 같았다.
“절대적인 신뢰로 다져진 관계를 원하시는군요.”
정지원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칼 루이스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업 및 개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칼 루이스가 먼저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살펴 가시지요.”
그가 나가고, 혼자 남은 정지원은 미간을 가볍게 주물렀다.
계속 몸이 부서져라 일하느라 피곤했지만, 이까짓 피로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온몸 가득 보람이 넘쳐흐르고 있었으니.
그때 비서로부터 콜이 왔다.
「정 이사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사전에 예약을 했나요?”
「아니요, 갑자기 찾아오신 분입니다. 한국에서 오신 백세완님입니다.」
정지원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올 것이 왔군.”
가볍게 마음을 다진 그는 비서에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섰다.
백세완, 그에게는 대학 동기이자 한때는 직장 상사였던 인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화사한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와, 세완아. 미국까지는 어쩐 일이야?”
“일이 힘들어 잠시 휴양을 한다더니, 여기가 휴양지야?”
다리를 턱 꼬며 앉은 백세완이 강하게 말을 꺼냈다. 정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어.”
“쉰다는 건 핑계였고,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지?”
“오해야. 그건.”
“뭐가 오해라는 건지 모르겠군. 모든 게 확실한데.”
“쉬려던 중에 좋은 제안을 받았을 뿐이야. 타이밍이 겹쳐서 네가 오해한 것 같다.”
“계속 오해라고만 말하는구나. 너는.”
백세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또렷한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학창 시절 그의 옆에서 보았던, 금수저를 갖고 태어난 자 특유의 오만함이 보였을 뿐.
문득 백세완이 물었다.
“우리, 친구가 맞긴 했냐?”
“새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야 언제나 친구였지.”
“그래? 그런데 난 네가 내가 알던 정지원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이해해. 그럴 수 있어. 서운할 수 있어. 나라도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그런 마음을 가질 것 같아. 하지만 세완아.”
정지원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차분히 물었다.
“우리는 친구잖아?”
“…….”
“네가 이해해줘. 내 입장.”
백세완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어디서 들었더라. 분명 귀에 익은 말인데.
‘이 녀석이?’
그제야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낸 백세완은 얼음 같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 말은 자신이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네가 회사 입장을 이해해 줘. 네가 이해해 줘.
정지원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던, 마법과도 같은 문장. 그 말을 이런 식으로 돌려받게 될 줄이야.
백세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졌다는 듯이.
“좋아, 알았어. 그동안 내가 친구로서 네게 좀 무심했던 것 같다. 미안해.”
“천만에. 넌 무심한 적 없었어.”
“알겠어, 알겠어. 충분히 네 불만, 네 뜻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건실한 이야기를 해보자.”
“건실한 이야기?”
“슈나우저 인기가 아주 폭발이더군. SJ인더스트리의 생산라인으로는 미처 물량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도 파운더리 회사란 회사들은 전부 하청 생산을 맡겨달라며 목을 빼고 있다지?”
정지원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H반도체에 맡겨 줘. 독점 위탁은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위탁생산업체 중에서는 배려를 해줬으면 해.”
“세완아,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비즈니스를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백세완은 비릿하게 웃었다. 방금 또한 자신이 자주 입에 담곤 하던 말이었다. 가볍게 치민 감정에, 그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었다.
“친구야, 네 곤란함은 내가 십분 이해해. 하지만 내가 간절히 부탁할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들어주기 힘들 것 같아.”
“아니야. 그래도 넌 들어줘야 해.”
음색의 어조는 그대로다. 그러나 그 안에 박힌, 보이지 않는 가시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정지원은 덤덤히 반문했다.
“왜지?”
“왜라니, 평생 한국 안 올 거야?”
“…….”
“지금 경영진에서 말이 많아. 큰아버지도 엄청 분노하시는 중이고. 모두 네가 산업스파이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네가 비글 때문에 많이 서운했던 거, 이해하고 있으니까. 얼마든지 너,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회사 내부 여론이 매우 심각해.”
“계속해.”
“내가 필사적으로 막아보고 있지만 한계가 있어. 지금 회사는 그룹 차원에서 형사 절차도 고려 중이야. 하지만 얼마든지 긍정적인 관계로 개선할 수 있어. 네가 조금만 우리를, 아니 회사를 배려해준다면 말이야.”
“세완아.”
“내가 회사에 가져갈 변명거리, 큰아버지를 설득할 명분을 만들어 줘. 작은 양보면 돼.”
“친구야. 네가 하나 간과하는 게 있는데, 먼저 그것부터 짚어줘야 할 것 같다.”
“그게 뭔데?”
정지원은 차분히 백세완을 응시했다. 그도 지지 않고 그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나, 이제 미국 시민권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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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분들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여기서 한번 끊어보겠습니다.
사실은 다음편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