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소개팅 =========================================================================
약속장소를 들었을 때 한서진은 좀 많이 놀랐다. 그다지 부유할 것 없는 평범한 동네였기 때문이다.
재벌 순위를 다투는 백철중 회장의 위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서민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왜 회장님께서 이런 곳을?’
의아했지만 한서진은 일단 적당히 차를 주차할 곳을 찾았다. 좁은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고생들이 가끔 흘끔거렸다. 이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외제차라서 그런 모양이다.
좁은 길을 헤매다가 약속장소를 찾은 한서진은 이윽고 검은 벤틀리를 발견했다. 몇 번 본 적 있는, 백철중 회장의 차였다.
차는 약속장소 앞 도로에 주차돼 있었다. 약속장소를 확인한 한서진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회장님이 대체 왜 여기에?’
놀랍게도 약속장소는 오래 되고 낡은 2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은 허름한 실내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가게였고, 2층은 가정집으로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 둘이 그에게 말없는 눈빛을 보냈다. 마치 들어가 보라는 듯이.
“……수고하세요.”
한서진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안에 들어섰다.
좁은 가게 내부는 손님 하나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백철중 외에는.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철중 회장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서진에게는 참 신선했다.
재벌 회장님이 소주라니. 뭔가 가식적인 것 같은데, 잔에 담긴 술을 삼키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저 정도 자연스러움은 적어도 몇 십 년은 반복해야 묻어나오는 것, 한두 번 소주 자작 해본 솜씨가 아닌데?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회장님, 한서진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오, 한서진이. 자네 왔나?”
백철중 회장은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 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창창했다.
“한 잔 받게.”
“예,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얼른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한 손으로 잔을 따라주는 모습이 무척 안정감이 있었다. 역시, 소주 한두 번 따라본 솜씨가 아니다. 마치 몸에 맞는 슈트처럼 자연스럽다.
“샴페인이 아니고 소주라서 실망했나?”
“아닙니다. 저는 소주가 더 좋습니다.”
사실은 맥주가 좋지만. 그러나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었다.
백철중 회장은 껄껄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한서진도 두 손으로 공손히 건배를 받고는, 몸을 옆으로 돌려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잘 마시는군. 안주도 먹게. 이 집 이모가 꼬치구이를 기가 막히게 한다네.”
“잘 먹겠습니다.”
재벌 회장님이 이모라고 하니 뭔가 묘하다. 설마 인척이란 뜻에서 이모라고 하진 않았을 테고, 가게 주인을 말하는 거겠지?
“정말 맛있습니다.”
“허허, 그렇지?”
회장님 앞이라서 하는 빈말이 아니라, 꼬치구이는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겉보기에는 볼품없어 보이는데, 어떡하면 이처럼 맛있게 구울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백철중 회장은 추억이 서린 눈으로 허름한 가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가게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애용한 곳이라네. 벌써 40년 넘게 단골이지.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어.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와 열정뿐이었다네.”
오래 전을 상기하듯 백철중 회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요즘 사람인 자네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때는 가난했지만, 온 천지에 널린 게 기회였어.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그걸 움켜잡을 수 있었지. 나는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움직인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
“저기 저 건물이 보이나?”
백철중 회장은 손가락으로 가게 앞 도로 맞은편의 한 5층짜리 건물을 가리켰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이었다.
“예, 보입니다. 새로 지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저기 있던 건물에 내가 처음으로 세운 회사가 세들어 있었지. 사무실 한 칸에 직원 두 명이었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참 세상을 다 가진 듯이 뿌듯했었지.”
한서진은 조용히 들었다. 백철중의 얼굴에 씁쓸한 회한이 어렸다. 그때의 술맛을 추억하듯, 그는 지그시 술잔을 주시했다. 그리고 단숨에 털어 넣었다.
“용광로 같은 시대였네.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뭐든 다 되던 시절이었지. 힘들었지만 달러 버는 재미에 힘든 것도 몰랐네. 그리고 지금을 보게.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사는 나라인가? 그런데 요즘 것들은 자기가 얼마나 축복받았는지를 몰라.”
“…….”
어쩐지 공감하기 힘든 말에 한서진은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반발을 억눌렀다. 그러나 백철중 회장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아들딸이고, 손주들이고, 쓸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어. 정말 요즘 것들은……. 쯧쯧.”
“…….”
“나도 자네처럼 생산직 노가다부터 시작해서 온갖 걸 다 겪으면서 이 자리까지 올랐네. 정말 고생이 심했지. 내 자식 놈들만큼은 그런 걸 안 겪게 하고 싶었네. 그래서 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지.”
“…….”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게 내 패착이었던 것 같아.”
그가 잔을 들자 한서진은 급히 술을 따랐다. 그는 병을 쥐고 그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슈나우저 때문에 백철중 회장의 심기가 안 좋은 건 알지만, 그 정도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심한 듯했다. 납득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왜 하필 자신을 불러다놓고 한탄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내가 슈나우저 제작자라는 걸 알 리는 없을 텐데.’
미국에 출원한 슈나우저의 특허는 ‘한서진’이란 이름이 아닌 미국식 이름으로 되어 있다. SJ인더스트리의 지분 소유도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우회했다. 당연히 백철중 회장이 알 수가 없다.
그럼 왜 뜬금없이 자신을 불러내서 옛날이야기를 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걸까? 한서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그래서 자네 같은 젊은이가 좋아.”
“예?”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 않나. 생산직 하면서 독학으로 한국대 들어가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건 나도 아네. 나도 공부를 해봐서 잘 알아. 그런 열정이 난 참 좋네. 내 아들딸도 보고 닮았으면 할 만큼.”
백철중 회장은 빈 잔을 탁 내려놓으며 혀를 끌끌 찼다.
“내 자식 놈들은 도대체 노력을 안 해. 거저 얻은 게 다 지가 잘나서인 줄 알아.”
“…….”
한서진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무섭고 근엄하던 재벌 회장이 지금은 마치 동네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거부에게도 나름대로의 속앓이는 있구나.
“왜 갑자기 자네를 불렀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겠군.”
“……예, 조금. 실은 회장님이 절 왜 부르셨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요. 저 말고도 오랜 지기들이 있으실 텐데 왜 저에게 이런 말씀을…….”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군. 내 앞에서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젊은이는.”
한서진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아니, 탓하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그러네. 날 오래 섬긴 애들도 내 앞에서 이야기를 길게 하진 않아. 그런 애들한테 둘러싸여 있다 보니 이런 것도 신선하군. 자, 한 잔 더 들게.”
그렇게 또 한 잔이 비워지고.
“회사라는 게 말이야. 모든 게 내 뜻대로 돌아가지만은 않네. 인의 장벽이라고 아는가? 나를 위해, 나와 함께 왕국을 건설한 이들이 거꾸로 사람의 장벽이 되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너무 높은 자리에 있다 보니 까마득한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지 못하지. 그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다 잘만 돌아가는 줄 알게 되지.”
“…….”
한서진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재벌 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겨우 신세타령을 하자고 자신을 불렀단 말인가?
백철중 회장은 빈 잔에 술을 스스로 따랐다. 한서진이 급히 따라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탁, 하고 테이블에 빈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어쩐지 크게 울렸다. 동시에 백철중 회장의 눈빛이 침중하게 빛났다.
“나름대로 조사는 했네. 대강 어떻게 된 건지 알겠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비글을 개발한 정지원이, 그 친구가 지금 SJ인더스트리에 있다지?”
가벼운 소름과 함께, 머리카락이 쭈뼛 솟구쳤다.
물론 H반도체의 정보력이라면 SJ인더스트리에 정지원이 있다는 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크게 주의하던 비밀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왜 굳이 자신을 불러다가 이야기를 꺼낸 걸까?
설마……?
“자네가 그 친구와 많이 친했다는 것도 들었네. 그 친구, 참 난 친구야. 자네도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었다지? 자네가 한국대에 간 것도 그 친구 권유 때문이라 들었네.”
“……예, 저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비글…… 작년 우리 회사를 살찌우게 한 효자 아이템일세. 알고 있나? 우리 H반도체가 비글로 올린 순이익만 무려 8조 원일세. 일 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올린 거지.”
8조 원.
직접 회장의 입으로 숫자를 확인하고 나니 새삼 놀라웠다. 맥플의 특허 지분이 70%인데도, 8조 원이나 순익을 냈다니.
“세완이가 큰 욕심을 부린 건 알고 있네.”
한서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백철중 회장은 백세완 실장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역시?
‘백 실장이 오너 일가라는 말이 정말로…….’
“그렇게 하면 안 됐어. 그런 대단한 성과를 올린 직원을 그리 홀대하다니, 아무리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라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됐네. 세완이가 작은 것에 눈이 어두워 큰 실수를 했네.”
“…….”
“정지원이, 그 친구한테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네. 비글 때문에 회사에 실망한 것도 이해하네. 아마 그래서 그 친구도 미국으로 떠난 걸 테지. 모두 아랫사람을 관리 못한 내 책임일세. 그 친구에게는 내가 모든 걸 직접 사과하고 싶네. 자네가 자리를 마련해주게.”
한서진은 차분하게 호흡했다.
백철중은 자신의 비밀을 아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정지원이 비글을 뺏긴 것에 분개해서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새 회사를 차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지원 팀장님은…… 300억도 과분한 대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신 건 더 큰 기회가 생겨서이지, 그에 따른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평소…….”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네. 나는 그 친구의 마음, 그리고 선택을 이해하고 있어.”
“…….”
“세완이가 회사의 이름으로 홀대한 것은 회사의 잘못이고, 그건 곧 내 책임일세. 나는 책임을 회피할 마음이 없네.”
백철중 회장의 눈빛에 분노가 스몄다.
그것은 과연 백세완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조직을 관리 못한 자신을 향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슈나우저에 휘청거리는 회사의 나약함을 향한 것일까.
그는 지금 진심을 말하는 것일까, 가식을 늘어놓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통찰안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제가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렵게 꺼낸 말에 백철중 회장은 흔쾌히 끄덕였다.
“얼마든지 말해보게.”
“정지원 팀장님…… 비글 개발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비글을 헐값에 가져가고, 그걸 또 지키지 못하고 맥플에 강탈당하는 걸 보며, 솔직히 속이 많이 쓰렸습니다.”
그건 한서진이 정지원의 이름을 빌어 꺼낸, 자신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백철중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이해하네.”
“회장님은 그에 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으신 겁니까?”
“물론일세.”
한서진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본 적이 있다. 슈나우저로 H반도체가 타격을 입고, 그걸 비웃으며 고소해하는 달콤한 상상.
“그럼 사과를 하기 전, 비글에 대한 잘못된 보상을 다시 정산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연참을 담아서, 실↗탄↘♥
(이 후기를 위해 본문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