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67화 (67/609)

00067  소개팅  =========================================================================

두 달 가까이 소개팅과 미팅만 죽자고 했으나, 신통한 결과는 없었다. 한서진은 ‘눈은 더럽게 높은데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능력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물론 본인은 그 별명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학생회장 조현석은 기필코 한서진을 커플로 만들겠다는 듯이 발품을 팔아 소개팅과 미팅을 주선했지만, 끝내 한서진이 짝을 찾는 일은 없었다.

“당분간 소개팅은 그만할게.”

“네? 어째서요? 지금까지 만난 애들보다 더 많은 애들이 지금 줄을 서고 형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부랑 회사 때문에 바빠. 이제 기말고사잖아.”

이번 학기는 B코스를 채택한 교수가 박효산뿐이었다. 때문에 한서진은 곧 닥쳐온 중간고사 준비를 맞이해야 했다.

슈나우저가 출시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리고 컴퓨터 반도체 시장은 슈나우저의 독주 체재로 재편되었다.

독과점이고 뭐고 논할 거리도 없었다. 애초에 비슷한 물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비글이 기존 CPU를 압도적인 성능 차이로 몰아내고 제왕을 차지했는데, 슈나우저는 CPU는 물론이고 AP시장까지 전부 다 먹어버린 것이다.

개인 PC, 스마트폰, 모바일 기기, 그리고 심지어 메인프레임과 수퍼컴퓨터까지.

모두가 슈나우저를 원하고, 목을 빼며 기다렸다.

슈나우저의 여파는 박효산 교수의 랩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직격타를 맞았다.

한서진이 수정한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이거라면 비글에 지지 않을 거라고 들떠 있다가 대번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이다.

슈나우저는 스코브리아늄이 아닌, 기존의 실리콘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PU 시장의 절대 강자, 비글을 은퇴시켰다.

말 그대로, 시장에서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었다. SJ인더스트리 생산라인은 밤낮으로 슈나우저를 찍어내느라 설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한서진이 설계 수정한 스코브리아늄 반도체를 내밀어 봤자 통할 리가 없었다.

“아깝네요. 서진이가 수정한 것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건데. 스코브리아늄 반도체가 상업적으로 의미 있는 동작을 하게 만든 거잖아요. 최초로요.”

슈나우저 천하가 열렸지만, 스코브리아늄 연구가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과 대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 시설에서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슈나우저를 넘어서려면 실리콘 반도체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스코브리아늄 반도체만이 해결책이다!

슈나우저는 분명 상식의 궤도를 벗어난 괴물이지만, 공략 가능한 약점은 있었다. 바로 실리콘 재질이라는 것.

스코브리아늄을 이용한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 슈나우저를 능가할 수 있으리란 믿음에, 많은 투자자들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박효산 교수는 대사기극이라고 비웃었지만 말이다.

“실리콘보다 스코브리아늄이 훨씬 더 좋은 소재인 건 맞아. 하지만 그래도 슈나우저는 못 이긴다.”

“왜요?”

“네가 SJ인더스트리라면 스코브리아늄이 개발되면 그걸로 슈나우저를 만들지, 실리콘으로 만들겠냐? 그냥 재료만 바꾸면 되는 건데?”

“……아.”

“이런 간단한 것도 여태껏 미처 생각 못했냐? 쯧쯧.”

박효산 교수의 말대로였다.

스코브리아늄 반도체의 길이 열린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스코브리아늄 버전의 슈나우저가 새로이 나올 뿐.

SJ인더스트리의 컴퓨터 반도체 시장 패권은 이미 완성된 것이었다. 슈나우저를 넘어선 획기적인 설계가 나오지 않는 한.

“슈나우저 설계도는 보면 볼수록 이상해.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아니 오히려 의미를 알 수 없는 회로 같은데 저런 성능을 낸단 말이야.”

슈나우저의 설계는 특허의 형태로 공개되어 있었다. 상업적인 이용은 불가능하지만 이리저리 뜯어서 연구하는 것은 가능했다.

윈텔, 진성전자, IBM 등 국제적인 컴퓨터 기업들은 심혈을 기울여 특허를 분석하고 매달렸으나, 별달리 뾰족한 길을 찾지는 못했다고만 전해졌다.

덕분에 스탠포드와 니트론 교수의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슈나우저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대항마조차 슈나우저에 탄복하고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은, 아직 많은 이들이 몰랐지만.

박효산 교수가 물었다.

“한서진, 네가 전에 설계해서 스코브리아늄 반도체가 작동하게 만든 거…… 그거 슈나우저에 응용할 순 없을까?”

“네?”

한서진은 뜨끔했다. 설마 교수님, 뭘 알고 물어본 건 아니겠지?

“스코브리아늄이 작동하게 하는 원리만 추출해서 슈나우저와 결합한다면 더 놀라운 괴물이 나오지 않겠냐?”

“아, 그 이야기 말씀이시군요.”

한서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SJ인더스트리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찔러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도 어떻게 그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그건 교수님이 알아낸다고 하셨잖아요.”

“……치사해서 원. 그렇게 이 늙은 교수를 맷돌에 넣지 못해서 안달이냐?”

“교수님 아직 쉰도 안 되셨지 말입니다. 한창 정정하시지 말입니다.”

“저놈 군대나 좀 다시 보내라니까.”

“공익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 말입니다.”

안홍철은 낄낄거리며 얼른 도망갔다. 나름 유쾌한 랩 분위기, H반도체의 사내 분위기와는 비교도 안 된다.

“슈나우저의 개발자가 누군지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찔러볼 여지가 없으니, 이거 원.”

박효산 교수의 중얼거림에 최태규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교수님? 설마 모르고 계셨어요?”

“뭐가?”

“SJ인더스트리 창립 멤버 중에 정지원 선배님 있잖아요. 설마 여태 모르신 거예요?”

“뭐? 그게 정말?”

박효산 교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반응을 보니 정말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니, 왜 그 놈이 거기 있어? 그리고 뭐라고? 창립 멤버라고 했냐, 지금?”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여름방학 때 우리 과 스탠포드 방문 프로그램 하면서 SJ인더스트리도 찾아갔다잖아요. 서진이도 그때 그 선배님 보지 않았니?”

“봤습니다.”

“봤는데, 왜 말을 안 했어!”

박효산 교수가 답답하다는 듯이 따져 묻자 한서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리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저도 당연히 교수님이 아시는 줄 알았죠.”

“……으으. 이 망할 놈이, 스승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거기 있었다니.”

분명 귀찮아질 것이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 한서진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거 나도 학교 다니는 동안은 숨겨야겠어.’

자신이 슈나우저의 개발자이자 SJ인더스트리의 오너라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보통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H반도체에서는 목을 매달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냥 지금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 어차피 자신만 입을 열지 않으면 알려질 일이 없을 테니까.

“일단 우리 랩은 스코브리아늄 연구나 계속한다. 저번에 서진이가 한 수정 설계 위주로. 분명히 그 안에 스코브리아늄을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규칙이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서진이 너도 감으로 한 거라고만 하지 말고, 생각나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주고.”

“……알겠습니다, 교수님.”

한서진은 약간 찔려서 대답했다.

아, 미스릴을 미스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 답답함이여. 언제쯤 스코브리아늄을 미스릴이라고, 니트론 교수가 존재를 주장한 제5의 힘은 에테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한서진, 너 요즘 랩에 오는 횟수가 적다?”

“소개팅 하러 다니느라 좀 바빴습니다. 죄송합니다.”

“소개팅?”

박효산 교수는 의외로 별반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알았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하긴, 1학년이면 부지런히 여자 만날 때지. 그러고 보니 너 군대는?”

“아, 저는 면제입니다.”

“그랬냐? 잘 됐네.”

잘 됐다는 말이, 마치 갈아 넣을 시간이 충분하니 잘 됐다로 느껴지는 건 과연 착각일까.

시간을 확인한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자마자 간다고? 또 어딜 가는데?”

“소개팅 하러 갑니다. 이제 한 시간 남았어요.”

“사진은? 예쁘냐?”

“봤어요. 예쁘던데요.”

“어디 학교인데? 무슨 과?”

“K여대 영문학과라던데요.”

박효산 교수는 혀를 차며 말했다.

“소개팅은 좋은데, 우리 같은 이과는 문과 여자 만나면 안 돼.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사모님과 요즘 갈등 있으시지 말입니다.”

“넌 아직도 실험실 안 갔냐!”

박효산 교수는 버럭 역정을 냈고, 안홍철은 킬킬 웃으며 다시 도망쳤다. 한서진도 쿡 웃으며 연구실을 나섰다.

소개팅은 별 거 없었다.

누가 봐도 예쁘고 착한 여대생이었지만, 그리고 심지어 말도 매우 잘 통했지만, 한서진은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다. 통찰안이 ‘부적합’이란 내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로는 안 어울린다는 건데. 대체 왜?’

통찰안이 지성이 있다면 멱살을 쥐어서라도 묻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유감이었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에 통찰안이 발동한 터라 한서진은 끝까지 시간을 보냈다. 데이트 중간에 갑자기 표정이 싹 변해서 ‘우리는 안 어울리는 거 같네요.’하고 일어설 수는 없지 않은가.

마지막까지 매너 있게 시간을 보내고, 한서진은 여자와 헤어져서 돌아왔다.

“결국 오늘도 포르쉐 자랑만 하고 끝났네.”

차가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한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종종 여자들이 자신이 아닌 조건을 보고 호감을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한국대학교 학생, 포르쉐, H반도체 연구 직원, 이것만 봐도 훌륭한 타이틀이지 않은가.

‘SJ인더스트리와 슈나우저 건까지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네.’

잠시 상상을 하던 그는 픽 웃었다.

자신이 지닌 그 어떤 스펙도, 통찰안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통찰안에 비할 수는 없으리라.

간단한 힘의 응용만으로도 슈나우저 같은 수퍼반도체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찰안의 힘을 탐내고 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그는 스스로도 자신감이 부쩍 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되라지, 뭐. 어차피 나는 통찰안이 있으니까, 전혀 문제없어. 이런 느긋함?

‘그나저나 적합이 대체 있기는 한 거야? 나 설마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대충 찾아보다가 못 찾겠다 싶으면 그냥 저냥 마음에 드는 여자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고 살아야 하나?

그래도 이왕이면 통찰안이 적합이라고 보여주는 여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세상 어디에 있는지, 아직 태어나기는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때였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시작했다. 흘끗 발신인을 확인한 한서진은 무척 놀랐다.

발신인이 바로 백철중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이분이 대체 왜? 한서진은 아무 생각도 안 날 정도로 놀랐으나,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회장님. 사원 한서진입니다. 전화 받았습니다.”

「……자네, 지금 뭐 하나?」

“예, 집에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나와 술 한 잔 하겠나?」

술을 하자고? 회장님이? 나에게?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한서진은 혼란스러웠으나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뵈러 가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서진아...형 요즘 많이 힘들다... 슈나우저가 뭐라고 그거 하나 때문에 회사가 이렇게 흔들리고... 근데 슈나우저보다 더 싫은 게 뭔지 아냐? 그건 바로 나야. 이런 마음 터놓고 말할 친구도, 가족도, 부하 직원도 없어서 너나 붙들고 술주정하는 내가 밉다... 겨우 이 정도 시련에 힘들어하는 내가 오늘 참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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