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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65화 (65/609)

00065  소개팅  =========================================================================

매출이 토막 난 H반도체는 슈나우저 개발자를 찾는답시고 난리였다. 멀쩡히 회사 잘 다니는 한서진의 눈으로 보기에는 웃기지도 않는 촌극이었지만.

저 여깄는데 다들 뭐하세요? 라고 외칠 수도 없으니 입이 근질근질했다.

진성전자나 엘린전자도 난리가 난 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다만 두 회사는 H반도체와는 차이점이 있었다.

“진성전자는 반도체 사업부만 타격을 입은 거고, 아니 그게 가장 크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전자제품 제조도 하잖아. 엘린전자는 반도체 사업 자체를 안 하고.”

문제는 H반도체가 가장 심각했다.

“우리 회사는 원래부터 반도체가 주력인데. 이름부터 H반도체잖아. 반도체 하나만 보고 외길로 걸어왔는데 이렇게 되면 대체 어쩌라고…….”

직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슈나우저의 여파는 비글에 이어 D램 등 다른 반도체 매출에까지 미쳤다. 슈나우저가 비메모리 반도체임에도 말이다.

자칫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었다.

백세완 실장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직원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죽을 것처럼 변한 채로 나왔다. 그걸 보면서 다른 직원들의 마음은 더욱 까맣게 타들어갔다.

어느 날 하정태는 백세완 실장의 호출을 받았다. 팀원들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하정태는 결전에 임하는 장수처럼 굳은 표정으로 연구실을 떴다.

한참 후 하정태는 돌아왔다. 생각보다는 표정이 좋았다. 아주 최악은 아닌 모양이었다.

“백세완 실장님이 그러시던데, 우리 설계팀 이제 통합한다더라.”

“통합이요?”

“설계2팀 없애고 우리 팀원 전부 1팀으로 합류시키겠대. 존속하는 의의가 없다면서.”

“완전 엿 됐네요. 텃세 장난 아니겠다. 그나저나 우리 연봉은 어떡한답니까?”

“그건 일단 유지할 모양이더라. 비글 개발 대가로 준 포상인데 함부로 거둬가는 건 다른 직원들 사기에도 안 좋겠지. 그걸 고려했나 봐.”

“일단이라는 거군요. 그럼 언젠가는 다시 원상복귀 되겠네. 비글 생산 라인도 접어야 할 판이니 뭐 그렇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다들 씁쓸한 얼굴로 끄덕였다. 연봉 삭감, 아니 원상복귀를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근데 정상적인 경영자라면 이런 때일수록 설계2팀을 더 밀어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연봉 올려달란 소리가 아니라 사람도 더 충원하고, 교수든 뭐든 실력자 데려다가 개발 체제 잡고 그래야지.”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우리 부서 입지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잖아.”

“비글을 누가 개발했는데? 아, 물론 서진이가 혼자서 한 거지만 회사에서는 우리 팀이 한 걸로 알고 있잖아? 비글이 대체 언제 나왔어? 작년에 나왔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내가 경영자라면 그때부터 우리 팀에 지원 팍팍 해서 밀어붙였다.”

“그래봐야 다 필요 없는 얘기다.”

“뭐, 그렇긴 하죠.”

경영진에 불만을 토로했던 최지석은 어깨를 으쓱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김경규가 한숨처럼 말했다.

“연봉을 깎든 원상복귀를 하든 좋으니, 제발 짤리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시기에 어느 회사를 가요.”

“……그러게 말이다.”

하정태의 무거운 맞장구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한서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설계팀 통합은 금세 진행되었다.

다음 날, 하정태 이하 설계2팀 전원은 짐을 싸들고 설계1팀 연구실로 옮겼다.

설계1팀장, 차대웅은 며칠째 잠을 못 잔 퀭한 눈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큰 관심은 없는 표정이었다.

“왔구나.”

“예.”

“책상은 빈 거 적당히 써라. 너네끼리 붙어 있어도 좋고, 흩어져도 좋고. 텃세 부리는 놈 있으면 알아서 이겨먹고.”

거친 듯 하면서도 생각과는 다른 표현에 한서진은 조금 얼떨떨했다. 차대웅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내뱉었다.

“어차피 너희나 우리나 다 같은 노예 신세 아니겠냐. 가급적 사이좋게 지내자.”

“감사합니다.”

하정태가 설계2팀을 대표해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차대웅의 시선이 한서진에게 돌아갔다. 이번에는 눈빛에 조금 흥미가 깃들었다.

“네가 그 땡보직이라는 애구나. 한서진 맞지?”

“땡보직……이요?”

“출근은 안 하고 맨날 학교에 여자애들 꼬시러만 다닌다며. 그러면서 월급은 따박따박 받고. 땡보직 맞지, 뭐.”

“…….”

“아니야?”

내용만 보면 비웃거나 조롱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차대웅의 눈이 담고 있는 감정은 분명한 ‘부러움’이었다. 순수하게 부러워죽겠다는 티를 대놓고 팍팍 내고 있었다. 나도 너처럼 살고 싶어, 하는 뭐 그런.

“부럽다. 인생은 너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치?”

“어, 음…….”

“나처럼만 안 살면 성공한 인생이지. 안 그래?”

차대웅은 키득거리며 뒤를 돌아보고 크게 말했다. 다른 연구원들이 들으라는 듯이.

“좋겠다. 나도 한국대 나왔는데 왜 그런 혜택 안 주지? 나도 월급 받아가면서 학교 다니고 싶다. 아, 한서진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고깝게 듣지 마. 그냥 나도 그러고 싶다는 것뿐이야.”

보다 못한 누가 말했다.

“팀장님, 그러다가 위에서 듣습니다.”

“들으라고 해. 어차피 내가 불만 많은 거 회사도 다 아는데 뭐 어때.”

“그러다 짤리시면 어쩌시려고요.”

“짤리면 또 싹싹 빌지 뭐. 한 번 빌었는데 두 번을 못 빌겠어?”

한서진은 당황했다. 이 분위기는 뭐지?

차대웅 이야기는 전에 들었다. 회사에 큰돈을 벌어다준 AP칩을 설계했지만 정작 본인은 성과금 15억으로 끝났다는 사람. 그래서 회사를 박차고 자기 사업체를 차렸다가, 회사의 방해로 다 말아먹고 빌다시피 해서 다시 회사에 들어온 사람.

당연히 회사에 불만이 엄청날 테지만, 그것을 사람들 있는 데서 곧이곧대로 말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자기 부하 직원들이라 해도 말이다.

“팀장님, 듣는 귀가 너무 많은데…….”

“처들으라고 해. 뭐, 내가 이러는 거 한두 번이야? 어차피 위에서도 신경 끄고 놔두잖아.”

회사를 박차고 나갔다가 빌다시피 들어온 사람. 그렇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언행에 한서진은 잠깐 멍해졌다.

‘혹시 어차피 망한 인생, 그냥 막 나가자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싹싹 빌고 들어왔다는 건 좀 이상하고.

자포자기 할 정도로 어지간히 많이 쌓였나 보다.

한서진은 방학 중이라 얌전히 회사를 다녔다. 사실 개강이 은근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사내 분위기 안 좋은데, 회사에서 눈치 주면 어떡하지?

‘그냥 이제 그만 때려치우고 사업이나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풉 하고 웃고 말았다.

설계팀 기존 직원이 옆에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한서진 씨,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왜, 곧 회사 빠지고 학교 갈 생각하니까 즐거워?”

“절대 아닙니다.”

그제야 직원은 쪼는 것을 멈췄다.

한서진은 그가 보지 못하게 조용히 키득거렸다.

‘때려치우고 사업이나 할까라니.’

이미 미국에서 버젓이 자기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사업이나 한다는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슈나우저 출시를 앞두고, 전 세계 컴퓨터 반도체 시장은 마지막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SJ인더스트리가 밝힌 생산물량이 백만 개를 넘어서자 소비 기업들은 너도 나도 돈을 싸들고 대기 중이었다. 반면 윈텔, IBM 같은 경쟁기업들은 이 여파가 어디까지 가나 잔뜩 긴장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드디어 슈나우저가 출시되었다.

반전은 없었다. 슈나우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하게 비글의 목을 물어뜯었다.

“형님, 2학기에는 뭐뭐 들으실 겁니까? 이번에도 B코스로 하실 거죠?”

“응? 글쎄.”

“왜요? 설마 B코스 안 하실 겁니까?”

학생회장 조현석은 개강첫날부터 한서진 옆에 붙어 다녔다. 마치 도장을 단단히 찍어놔야 한다는 것처럼. 아무래도 스탠포드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 듯했다.

“B코스를 하면 나야 좋지. 근데 모든 교수님들이 그거 하시는 건 아니잖아. 저번 학기에 최유선 교수님도 그거 안 하셨고.”

“하긴, 그거 때문에 좀 말이 많았습니다. 형님 편의 봐주려고 학교에서 작정한 거 아니냐고 항의도 많았고요. 재수 없으면 박효산 교수님 말고 B코스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교수님이야 학과에서 아무도 못 건드리니까요.”

“그럼 그 교수님 것만 통과하고 나머지는 수업 듣지 뭐.”

“수업…… 형님, 과제가 장난 아닐 겁니다.”

사악한 미소로 말하던 조현석은 문득 화제를 바꿨다.

“근데 형님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아까 보니까 혼자서 막 웃으시던데요.”

“응? 아아, 일하던 거 월급 들어와서. 기분이 좋네.”

“아, 그런 기분 저도 알죠. 근데 방학 때 따로 일하셨습니까?”

“방학은 아니고 올 초부터 프리로 좀 하던 거 있어. 그게 이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네.”

“와, 잘 됐네요. 축하드립니다.”

그 돈이 얼마인지 알면, 조현석은 아마 뒤집어지겠지?

한서진은 법인 구좌에 쌓이는 순수익을 보면서 터지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제 처음으로 법인 구좌에 순이익이 쌓였는데, 그게 무려 200억 원이었다.

물론 아직 자기 돈은 아니었다. 칼 루이스가 끌어온 투자금에 먼저 정산을 해줘야 한다고 했다.

애초에 한서진이 CD를 팔아서 댄, 300억 좀 못 되는 돈으로 TX인더스트리를 구매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매 비용은 대부분 칼 루이스가 끌어온 투자금으로 댔다.

그 투자금이 무려 3억 불이라고 했다. 칼 루이스를 믿고 투자한 투자자는 그 많은 돈을 내고도 한서진에게 85%의 지분을 양보한 것이다. 슈나우저의 특허 가치가 17억 불 이상이라고 인정을 해준 셈이다.

‘내 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네.’

처음부터 3억 불을 정산할 때까지는 순이익의 100%를 그 투자자에게 배당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그래서 당분간 한서진한테 돈이 들어올 일은 없었다.

‘근데 3억불을 어느 세월에 다 까지? 그래서 정 팀장님이 회사 계속 다니라고 하셨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또다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몇 백 만 원에 벌벌 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몇 억 불이나 되는 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니. 자신이 참 많이도 컸구나 싶었다.

“그럼 형님, 한턱 쏴야 되는 거 아닙니까?”

“한턱은 무슨. 돈은 들어오는데 빚 갚느라고 다 나가.”

“어, 형님 빚 있으셨습니까? 몰랐습니다.”

“이상한 상상하지 마. 오피스텔 살 때 대출받은 거니까.”

“아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대충 둘러댄 말에 조현석은 납득했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야, 현석아.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형님.”

“……음, 좀 되게 민망한 질문이야.”

“네, 형님.”

“듣고 나서 오해하거나, 혹은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안 돼.”

“네, 형님. 뭔데요?”

“저기, 내가 우리 과에서 화석이잖아?”

조현석은 펄쩍 뛰었다.

“누가 형님더러 화석이라고 합니까? 그런 연놈 있으면 저한테 바로 알려주세요! 제가 혼쭐을 내놓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흥분할 건 없고.”

한서진은 얼른 그를 말렸다.

진정한 조현석이 다시 물었다.

“근데 형님, 그게 궁금하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좀 그런데…… 우리 과는 소개팅 같은 거 안 하냐? 다른 단대학과든, 아니면 타학교든 간에. 아니, 그냥 궁금해서. 다른 의도는 전혀 없어.”

조현석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한서진은 아차 싶은 마음에 자책했다. 역시 암모나이트 따위가 패총(조개무덤 유적)에 조개인 척 하고 숨어들려는 게 아니었어!

조현석이 각을 잡고 말했다.

“형님, 저한테 모든 걸 일임하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마련해놓겠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뭐?”

============================ 작품 후기 ============================

"자아, 크고 싱싱한 대형 월척 들어갑니다! 다들 낚싯대 준비하시고요!"

월척은 슈나우저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이상한 오해는 안 하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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