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64화 (64/609)

00064  수퍼반도체, 초수퍼컴퓨터  =========================================================================

“수퍼반도체라는 말, 참 좋은 것 같아요.”

따로 정지원과 자리를 마련한 한서진이 농담처럼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정지원도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지? 칼 이사가 생각한 단어인데,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문구 같다. 소비자들에게 특별하다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지.”

수퍼반도체가 들어간 개인용 PC, 혹은 스마트폰.

특별함을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이보다 더 근사한 단어가 있을까.

“근데 저만 이렇게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시면 어떡합니까? 다른 학우들 눈치가 보이잖아요.”

“좀 더 특별한 학교생활을 보내라는 배려다. 그나저나 소개팅은 많이 했어?”

“……아뇨, 아직 한 번도.”

그 말에 정지원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너 정도 월척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주변에서 아무도 낚싯바늘을 안 던졌다고?”

“……월척이라고 하니 좀 이상한데, 아무튼 그러던데요. 소개팅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바늘 던지는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제가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상하다.”

정지원은 소개팅 한 번 없었다는 것이 그리 신기한지 코치코치 캐물었다. 몇 시에 등교하느냐, 강의 일정은 어떻게 되느냐, 동아리나 학교 행사는 얼마나 나가느냐, 주로 학교에서 하는 건 뭐냐, 집에 가는 건 몇 시냐.

자세히 듣고 난 정지원은 혀를 치며 안타까워했다.

“전형적인 공돌이 테크트리를 타고 있구나. 군대는 안 가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집, 수업, 랩, 집, 수업, 랩, 이 동선만 반복하니 주변에서 바늘을 던질 틈이 있나. 2학기 개강하면 등교 시간을 1시간 일찍 당기고, 랩에서 보내는 시간은 절반으로 줄여. 저녁 10시 전에는 집에 들어갈 생각도 말고.”

“그럼 뭐가 달라지나요?”

“장밋빛 캠퍼스를 보게 될 거야. 나 믿냐?”

“물론 믿습니다.”

“그럼 해봐.”

“예.”

대화만 들어보면 세상물정 모르는 후배를 위하는 친절하고 상냥한 선배님. 하지만 사실은 회사 오너와 고용 경영인.

SJ인더스트리 견학은 학생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정밀한 공정 라인에서 끊임없이 찍혀 나오는 슈나우저를 보고 일부 학생들은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럼 슈나우저는 언제부터 판매되는 건가요?”

어느 학생의 물음에 회사를 안내 중이던 여직원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현재 몇몇 대형 보드 제조사와 칩셋 호환을 위해 물밑 교류 중에 있습니다. 슈나우저가 장착 가능한 보드가 개발되면 동시에 출시할 계획입니다.”

“현재 슈나우저는 몇 개나 생산되어 있나요? 여기 보이는 게 전부 pc용 슈나우저인가요?”

“어제 날짜까지 생산된 물량이 1백만 개가 조금 넘습니다. 모든 슈나우저가 동일한 성능과 스펙을 가진 것은 아니고, 탑재 기기의 종류에 따라 제조 단계부터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데스크톱과 스마트폰의 경우, 전자는 절전 기능을 포기한 대신 성능을 더 올리고 후자는 성능 대신 절전 기능을 좀 더 강화시켰죠.”

“그럼 개당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나오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PC 탑재용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약 399불 정도로 책정될 예정입니다.”

여기저기서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허탈함이 아닌,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의미의 한숨이었다. 현재 비글의 경우 420불에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나왔다.

“이건 누가 봐도 비글을 노린 가격이네.”

정교하게 포장된 채 판매만을 기다리고 있는 무수한 슈나우저 군단. 저 문이 열리는 순간 세상을 호령했던 비글의 목은 사정없이 물어뜯길 것이다.

SJ인더스트리 방문을 끝으로 반도체공학부 해외 프로그램은 모두 끝이 났다. 이번 미국행은 학생들에게 여러 모로 잊지 못할 좋은 추억, 그리고 강한 자극을 남겼다.

역사가 변화하는 현장에서 저명한 석학들과 함께 호흡했다는 경험,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그들의 발전을 꾀할 것이다.

출국을 앞두고 한서진은 칼 루이스와 정지원, 이렇게 셋이서 함께 만났다.

“그런데 칼 이사님은 언제 그렇게 한국어를 배우셨어요?”

작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정지원이 통역을 해주던 기억이 생생한 한서진은 그 점이 신기했다.

“작년에 제가 맥플에서 비글 생산 사업을 맡으면서 한국에 오래 체류했었잖습니까?”

“네.”

“아무래도 한국에서 오래 일하려면 한국어를 할 줄 알아야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공부했습니다.”

“그, 그때부터요?”

아니, 무슨 언어를 일 년도 공부 안 해서 동시통역이 가능한 수준까지 이뤄?

“혹시 전공이 언어 관련인가요?”

“컴퓨터공학입니다. 취미로 불어와 독일어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 두 언어도 어느 정도는 구사할 수 있죠. 한국어는 아직 서투릅니다.”

아니. 문장이나 어휘를 보면 웬만한 일반인들보다 교양이 넘치는데?

“별 거 아닙니다. 맥플에 가면 저 정도 되는 사람은 널렸습니다.”

“……스탠포드 출신이라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나 도대체 무슨 괴물들이 이글거리는 곳에 갔다 온 거지? 용케 살아 돌아왔네?

헤어지기 전, 정지원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에 가면 아마 난리가 나 있을 거다.”

“슈나우저라면 이미 유명하던데요. 저도 기사는 빼놓지 않고 다 봤습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의 웃음은 의미심장했다.

“가 보면 알아.”

한서진 및 일행은 스탠포드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다. 어느새 방학은 한 달 가량을 남겨두고 있었다.

한국은 여러 모로 시끄러웠다. 슈나우저의 공표가 컴퓨터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판매 시장의 혼란은 전자기기 제조업체 전반에 번졌고, 이는 곧 증권가의 패닉으로 이어졌다.

국내 전자기기 제조업을 삼등분하는 진성전자, 엘린전자, H반도체라고 그 혼란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아니, 제조업의 삼대거목이기에 오히려 더 거센 풍파를 맞고 있었다.

이주 만에 출근한 한서진은 그 사이에 살벌해진 회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진이 왔냐?”

“네, 근데 분위기가 왜 이러나요?”

“왜긴, 좀 전에 경영그룹에서 한바탕 하고 갔다.”

“…….”

“헐값에 비글 뺏어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지랄, 아, 서진이 네가 더 짜증나겠지. 미안하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현재 설계2팀의 최고선임인 하정태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최지석과 김경규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있었다.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가요? 제가 회사를 잘 안 나오다 보니까 아무래도…….”

“많이 안 좋지. 비글 주문량이 뚝 끊겼어.”

“…….”

비글은 전 세계에서 H반도체가 독점 생산하고 있지만, 유통 역시 맥플이 독점으로 하고 있다. 오로지 맥플북에만 들어가는 CPU이기 때문이다.

주문량이 뚝 끊겼다는 것은 맥플이 모든 생산을 전격 취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큰일이 아니다.

“맥플도 지금 간 보면서 태세 굳히기 들어가려나 봐. 이게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어찌 되긴요, 선배님도 그 방송 보셨잖습니까. 이제 비글의 시대는 갔어요.”

“맞아요. 앞으로는 슈나우저가 모든 CPU와 AP의 시대를 지배할 겁니다. 디지털카메라에도 슈나우저를 박아 넣는 시대가 분명히 올 걸요?”

“데스크톱용이 399불이라던데, 디지털카메라까지 넣기에는 너무 비싸지 않냐. 과잉 성능 같은데.”

“아무튼 슈나우저의 시대가 왔어요. 그건 부정 못하는 현실입니다. 지금 소비자들도 거의 다 지갑 닫고 슈나우저 출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처나와’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컴퓨터고 노트북이고 안 팔린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숨이 쏟아졌다.

“우리 회사도 비글 덕분에 엄청 꿀 빨았는데 말이야. 그것도 이제 다 갔지.”

김경규의 한탄이 H반도체가 처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글 생산으로 차지하는 매출이 제일 컸는데, 그게 뚝 끊어졌으니 초상집이나 다름없게 되고 말았다.

한서진이라고 마냥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은 아니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회사에 조금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정지원은 말했다. 회사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오히려 회사고 맥플이고 자신에게 미안해야 한다고. 비글을 뺏긴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정 팀장님, 회사 분위기 엿 같아지기 전에 잘 빠져 나가신 거지.”

“맞아. 박수 칠 때 제대로 뜨셨으니까. 지금 어디서 뭐 하시려나.”

그러고 보니 이들은 정지원이 SJ인더스트리의 경영진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직 회사에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결국 시간문제겠네.’

언제고 정지원이 SJ인더스트리 경영진이라는 게 알려지면 회사는 더 큰 불이 붙겠지?

아무튼 사내 분위기가 우중충한 터라 한서진도 눈치가 보여 열심히 연구실에 붙들어 있었다. 방학 중이라도 학교 행사는 있지만, 그것도 상부 눈치가 보여서 빠졌다.

오다가다 길에서 마주친 백세완은 표정이 매우 안 좋았다. 매출의 2/3 이상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좋을 수가 없겠지만.

“슈나우저 개발자가 한국인이란 말이 있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SJ인더스트리가 원래 IBM 메인프레임 사업하던 자회사 TX인더스트리였잖아. 그걸 어떤 투자자가 사서 지금의 SJ인더스트리가 된 건데, 그 자금이 한국에서 흘러나온 거래.”

“정말?”

“그래서 진성전자고 우리 회사고 지금 난리 났잖아. 누가 기술 빼돌려서 미국에 회사 차린 거 아니냐고. 제대로 물고 늘어질 모양이던데.”

“기술 빼돌려? 정말?”

“그게 아니고서야 한국에서 회사 안 만들고 미국까지 가서 회사 차릴 이유가 있냐는 거지. 뭔가 캥기는 게 있으니까 미국까지 가지 않았을까?”

“엘린전자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 좋겠네. 거기는 반도체 안 만드니까.”

“그냥 우리보다 덜한 거지, 거기도 마냥 좋지는 않을걸.”

온갖 근거 없는 소문과 루머가 사내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셋이 모일 때마다 비글과 슈나우저 이야기를 하며 회사의 미래를 걱정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루머와 무리한 추측.

SJ인더스트리의 진실을 아는 한서진에게는 한편의 대규모 촌극과도 같았다.

“매출이 얼마가 줄었다고?”

백세완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음성만으로 사람을 벨 수 있을 듯이 예리하다. 직원은 황급히 보고서를 뒤졌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읽어보고 보고해야 하나?”

“죄, 죄송합니다. 이번 달에 들어서 약 7조 3,500억 원이 하락했습니다. 전부 비글 생산 주문이 취소되면서 빚어진 매출 감소입니다.”

백세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팔이 부르르 떨렸다.

“백억불 클럽 진입이 눈앞이었는데…….”

연간 순수익 백억 달러.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발걸음이 너무 허망하게 무너졌다.

원래라면 올해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슈나우저가 비글의 목을 물어뜯는 바람에, 모든 게 좌초되고 말았다.

“슈나우저 기술이 한국에서 흘러나왔다는 말이 있던데.”

“증권가에 그런 소문이 있긴 합니다. SJ인더스트리를 매입한 자금이 한국에서 흘러나간 것이라고…….”

“슈나우저 제작자, 아니면 투자자, 하여간에 찾아.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무조건 찾아.”

백세완은 차갑게 덧붙였다.

“그래야 협상을 하든 애걸을 하든 할 거 아니야.”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새벽에 집에 들어왔어요. 원래는 어제 저녁 8시쯤에 들어가서 글을 써서 0시에 연재를 할 계획이었는데 일정이 틀어졌네요.ㅠ

다음 편도 지금 바로 후딱 써서 올리겠습니다. 2~3시간 정도 예상해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