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63화 (63/609)

00063  수퍼반도체, 초수퍼컴퓨터  =========================================================================

반도체공학부 학생들에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자연계 다섯 번째 힘의 존재 가능성, 그를 위해 시간과 몸을 아끼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권위 있는 과학자들. 쉴 틈 없이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국제적 학술 교류, 그리고 발전.

“스탠포드에 오길 잘했다.”

“역시 미국은 위대해.”

“타이밍이 정말 절묘하게 좋았던 것 같지만…… 어쨌든 이번 연수 프로그램은 대만족이야.”

해외 명문대와의 학술 교류를 위한 가벼운 한 걸음이, 위대한 역사가 쓰이는 현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한국대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소득이었다.

대석학들의 사이에서 호흡했던 경험은, 그들에게 다시없는 자극과 경험이 되어줄 것이다.

스탠포드 방문 행사 마지막 날, 최유선 교수가 학생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스탠포드 방문은 여기까지입니다.”

“교수님, 며칠만 더 있으면 안 돼요?”

“아악! 안 돼! 여기서 끝이라니!”

여기저기서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 스탠포드는 니트론 교수를 중심으로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이렇게 뜨거울 때 떠나야 하다니.

반도체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는 현장에서 떠나기란, 그들에게 보통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안다는 듯 최유선 교수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

“스탠포드 방문 종료는 아쉽지만, 그래도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세요. 내일은 SJ인더스트리에 견학을 갑니다. 알다시피 SJ인더스트리는 슈나우저와 Z7을 만든 제조사지요.”

“우왓! 교수님, 그게 정말이세요?”

“SJ인더스트리가 우리 방문을 받아준대요? 와, 이런 일이!”

아쉬워했던 것은 잠시, 학생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슈나우저, 반도체공학을 전공하는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반도체였다. 그 수퍼반도체를 제작하는 회사를 직접 견학하다니, 조금 전의 아쉬움은 씻은 듯이 날아가 버렸다.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서 SJ인더스트리에 관해서 가볍게 설명해줄게요. SJ인더스트리의 전신은 IBM의 자회사이자 IBM의 메인프레임 사업을 담당하던 TX인더스트리입니다.”

“헐, IBM?”

IBM이란 말에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서로 돌아보았다.

“그럼 SJ인더스트리는 IBM의 자회사인가요?”

“아니, 그렇진 않아요. IBM이 동양 출신 투자자한테 TX인더스트리를 매각했거든요. 그 뒤로 SJ인더스트리로 사명을 바꾼 거죠. SJ인더스트리는 IBM과 독립된 별개의 회사입니다.”

“와, 대박이다.”

“IBM 지금쯤 속이 엄청 쓰리겠네. 자기들이 판 애물단지가 금의환향해서 자기를 찍어내려 하니.”

“애물단지?”

“몰랐어? IBM 메인프레임 사업, 유닉스에 밀려서 완전히 망했잖아. 그래서 매각한 것 같은데.”

“속 뒤집어지겠네. TX인더스트리 매각 계약 추진한 사람은 회사에서 경질되겠다. 이거 어쩌면 손해배상도 엄청 물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궁금증을 풀어놓았다.

최유선 교수는 피식거리며 다시 말했다.

“TX인더스트리를 매수한 투자자가 누군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창립 멤버 중에 여러 분이 알 만한 사람이 두 명 있어요. 한 명은 바로 맥플 부사장 출신의 칼 루이스 이사죠.”

“아, 그 분!”

학생들은 탄성을 질렀다.

칼 루이스는 이들에게도 유명했다. 비글 출시 때, 맥플을 대표하여 한국에서 관련 사업을 전두지휘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대 반도체공학부에 초청돼서 강의까지 했으니, 여기 있는 학생들이 모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정말 여러분에게 익숙한 사람이에요. 실은 다행히도 그분이 견학을 허락해주셔서 이런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거고요.”

최유선 교수는 웃음을 가득 띠고 말했다.

“바로 우리 자랑스러운 반도체공학부 03학번, 정지원 졸업생이랍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가, 곧 댐 터지듯 경악이 쏟아져 나왔다.

“네? 교수님? 정지원 대선배님이요?”

“그 암모나이트 형님께서 SJ인더스트리 창립멤버라고요?”

한서진은 째릿, 그를 노려보았다. 기억해뒀다가 정지원한테 그대로 일러바쳐야지.

암모나이트라니, 같은 화석으로서 이런 부당한 대우는 절대 참고 넘어갈 수가 없다.

다음 날.

“SJ인더스트리에 온 걸 환영합니다, 후배 여러분.”

한국대 학생 방문단이 SJ인더스트리를 찾아가자 정지원이 직접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 환영해주었다. ‘사주’가 회사 사찰을 왔으니 이사로서 당연한 영접이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은 창립멤버이자 부사장이나 마찬가지인 그가 맞이하러 나온 것에 감격했다.

“저 분이 그 비글 제작팀이었다는 정지원 선배님? 나 말로만 이야기 들었어.”

“비글 솔직히 개쩔어주는 CPU인데 아무것도 못하고 H반도체에 뺏겼잖아. 그리고 H반도체는 또 그걸 맥플에 고스란히 갖다 바치고, 그래서 빡친 정지원 대선배님께서 사표 던지고 나와서 혈혈단신 미국으로 가신 거래.”

절이 싫으니까 중이 떠나겠다!

한국 기업의 부당한 착취에 분노한, 한 위대한 반도체 공학자의 미국 점령기. 정지원의 미국행은 슈나우저와 맞물려 그런 식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돼 있었다.

정지원은 최유선에게도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선배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어. 사업가 기질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는데, 아주 과감해.”

“먹고 살다 보니 남의 밥그릇 탐내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더라고요. 그런 놈들 사이에서 내 밥그릇 안 뺏기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되더라고요.”

“뼈가 있는 말이구나.”

최유선 교수는 그가 학부생 시절에 조교로 일하던 인연이 있었다. 그보다는 몇 살 연상이다.

“자, 다들 이쪽으로 와요.”

정지원은 자연스럽게 병아리 떼를 안내하면서, 그중의 한 병아리와 슬쩍 눈을 마주쳤다. 정확히는 병아리도 아니면서 병아리인 척 하고 무리에 끼어 든 맹금이지만.

‘…….’

‘…….’

정지원이 조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한서진은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SJ인더스트리의 사주고, 정지원은 고용 경영진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 다른 학생들은 자신을 평범한 학생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 부끄러우면서도 왠지 뿌듯하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제 전 직장의 후배도 있군요.”

“서진이 형 말하는 거 같은데?”

“그때도 나름대로 참 재미있었죠. 같이 밤을 세워가며 연구하고, 비글을 개발하고……. 특히 한서진 후배님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전부터 탐을 내고 있었습니다. 졸업하면 반드시 우리 회사에 와줄 거죠?”

정지원은 눈을 찡긋하며 말을 건넸다. 당사자만이 그 진의를 알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농담이 아니었다. 그들은 난리가 났다.

“우, 우왓! 지금 서진이 형, 스카우트 된 거야? SJ인더스트리에?”

“와, 대단하다! 부러워죽겠네.”

“H반도체에서 월급 받으면서 학교 다니다가 졸업하면 SJ인더스트리로 이직하는 건가? 캬, 제대로 승자 테크 타시네.”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러워하자 한서진은 민망해서 죽을 맛이었다. 정지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걸 보고 다시 한 번 눈을 찡긋했다.

‘정 팀장님, 짓궂으시네.’

결국 한서진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용기를 얻은 척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바로 회사에 사표 내고, 학교 휴학하고 오면 받아주실 겁니까?”

“후배님 뜻만 확실하다면 물론입니다. 하지만 좀 더 캠퍼스의 낭만을 누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참고로 우리 학교 미대쪽 후배님들 중에 참한 여후배님들 많습니다. 후배님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좀 더 놀 거 다 놀고 나서 입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 여기 있는 후배님들이 공증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네!”

학생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부러움과 동경이 가득했다. 특히 정지원보다는 한서진을 부러워하는 표정이 강했다. 정지원은 까마득하게 높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한서진은 그래도 일단 보이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

그들 눈에 보기에는 말이다.

“니트론 교수님께서 감사하게도 Z7을 언급해주신 덕분에 우리 회사는 최근 갑자기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도 갖가지 문의가 쏟아지고 있지요. 그런데 그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뭔지 아시나요?”

“뭔가요?”

학생들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입을 모아 물었다. 큰 성공을 이룬 대선배님 앞이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미국물 마시면서 달러로 연봉받고 살 수 있다.

“첫 번째 오해는 우리 회사가 수퍼컴퓨터 제조 회사가 아니라는 건데, 그걸 모르신다는 거지요.”

“아…….”

몇몇 학생들은 깨달았다는 듯이 나지막한 탄성을 냈다. 정지원은 그걸 보고 대견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는 본래 메인프레임 제조사입니다. 메인프레임은 대량의 트랜잭션처리에 탁월하고, 가용성, 시스템운영, 보안성, 안정성이 매우 우수하지요. 수퍼컴퓨터에 비해 그 크기도 작아 관리도 쉽습니다.”

“Z7은 수퍼컴퓨터의 성능을 가진 메인프레임이군요.”

“바로 그렇지요. 그 둘의 장점만을 묶어놓은 겁니다.”

학생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SJ인더스트리의 경영진으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으니, 앞으로 Z7이 세상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할지 상상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수퍼컴퓨터 제조회사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요?”

“윈텔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지원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의 주력 사업은 TPU 제조입니다. 개인용 컴퓨터나 중대형 컴퓨터, 그리고 수퍼컴퓨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컴퓨터가 우리 회사의 TPU를 사용하도록 할 겁니다. 나아가서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캠코더, 거치용 및 휴대용 콘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슈나우저 시리즈’를 쓰도록 할 겁니다. 항공기, 로켓, 컴퓨터, 인공위성 컴퓨터에도 슈나우저 시리즈가 들어갈 겁니다. 그게 우리 회사가 바라는 이상이고, 목표입니다.”

학생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SJ인더스트리가 Z7을 세상에 내놓은 진정한 목적을 알 것 같았다.

바로 기술력의 과시다. 우리는 이런 초수퍼컴퓨터에 들어가는 초수퍼반도체를 만든다는 퍼포먼스.

그 화려한 공연을 보고 열광한 이들이 과연 다른 반도체 제품에 지갑을 열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 팀장님은 역시 대단하셔.’

정지원은 강연 중 내내 한서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서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분위기는 마치 자신을 대상으로 한 브리핑 같다고.

민망한 생각이지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SJ인더스트리의 85%를 가진 오너였으니까.

============================ 작품 후기 ============================

후배 위하는 선배...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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